쪽팔린 게 죽기보다 싫은
어느 응급실 레지던트의
삐딱한 생존 설명서

저자 곽경훈 | 출판사 원더박스

[시사매거진=여호수 기자] 흔히들 직업에 귀천은 없다고 말한다. 직업에 귀천은 없을지 몰라도 명예와 자부심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어린 시절, 귀에 딱지가 앉도록 '사'자 직업을 가지란 말을 들었던 걸지 모른다.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이야기를 담은 신작이 출시되었다.

의사, 그것도 응급실 의사가 쓴 책이라니, 엄청난 사명감과 존경할만한 직업의식이 이 책을 가득 채울 것 같지만 저자는 너무도 덤덤히 성적에 맞춰 응급의학과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의사가 된 이유는 다르지 않을까? 저자는 그저 마음껏 꿈을 좇을 만큼 집안이 여유롭지 않았고, 그렇다고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꿈을 이루고 싶을 만큼의 재능이나 의지도 없었으며, 어쩌다 보니 고등학교 내내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의대에 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성적에 맞춰간 의대에서 다시 성적에 맞춰 된 응급의학과 레지던트라 할지라도 자존심마저 버리고 대형병원의 부속품처럼 살 순 없어, 저자는 최악의 응급실에서 보낸 4년의 시간을 회고한다.

책은 환자들은 모를, 그리고 의사들은 쉬쉬할, 날것 그대로의 병원 이야기를 담은 동시에 부조리한 조직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하는 개인의 처절한 투쟁 기록이다.

저자가 있던 병원의 교수들은 권력을 두고 정치 싸움에 골몰했고, 서로 책임 전가하기 바빴기에 ‘환자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목적은 간데없었다.

그러나 독자들의 기대와 달리 저자 역시 여타 책에 등장하는 정의로운 주인공은 아니다.

'성적에 맞춰 의사가 됐다'고 고백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그는 질 싸움은 피해 가며, 기회가 오면 주먹질도 서슴지 않는 골 때리는 의사이로, 책은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솔직하다.

쪽팔린 게 죽기보다 싫다는 저자는 ‘부조리를 바로잡고 열정을 다해 일하겠다’는 정의로운 목표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의사라는 전문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자존심, 그저 자존심을 버릴 수가 없어서 목소리를 내고 펜을 잡았다.

저자는 '오늘도 괴물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하고 투쟁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바친다'라는 말로 책을 마무리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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