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이홍위의 묘, ‘참배하면 좋은 일 생긴다’

서강의 샛강인 평창강 끝머리에 자리 잡은 ‘한반도지형’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를 꼭 닮아 유명해졌다.

 

[시사매거진264호=취재_오경근 칼럼니스트/사진_이관우 기자]2 020년 새해 들어, ‘만수(萬壽)’무강(無疆)’의 축복 인사를 나누기보다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인해 밤새(終夜) 안녕(安寧)”을 묻는 문안이 이어지고 있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항간에는 영월에 있는, 조선조 제6대 임금 단종 이홍위(1441~1457)의 묘소인 장릉(莊陵)’이 새로운 축복의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이곳에 참배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속설에 의해서다.

왜 그럴까? ‘주검을 수습하면 3대를 멸족시킨다는 세조(수양대군)의 왕명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내걸고 강물 위에 떠가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영월 호장 엄흥도(嚴興道)의 충절과 더불어 시루산(688m) 줄기를 타고내린 발산(667m) 자락 끝 두목고개 그의 선산에 위치한 단종 이홍위의 묘인 장릉이, 멀리 남양주시에 있는 정비 정순왕후 송씨(114~1521)’의 묘인 사릉을 바라보며 지고지순한 사랑을 울림을 보내기 때문이다

그러한 역사와 더불어 문화적 의미는 물론 조선왕조의 정통성과 권력투쟁의 이면을 되짚어볼 수 있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을 찾아보았다. 이곳에는 단종의 묘소인 장릉과 함께 영월부 관아였던 관풍헌’, 그의 유배지였던 청령포등 영월 명소 3곳이 위치한다. (자료_서세원 영월군 학예사(사진자료 제공))

영월시내에 위치하고 있는 관풍헌은 관아로 단종이 세조가 보낸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한 곳이다. 현재 새롭게 복원공사를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중앙고속도로를 따라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2시간 반경 남짓한 거리에 천혜의 자연과 더불어 비경을 자랑하는 영월의 동강(東岡)과 서강(西江)이 있다. 농담을 달리해 짧은 붓질을 수없이 반복하여 어렴풋이 안개에 쌓인 고담한 실경산수를 그려낸 청전(靑田) 이상범의 한국화처럼, 영월은 향토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서정적 풍광은 물론 정취 또한 수려해 많은 사람들의 감탄사를 자아낸다. 특히 그곳에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구획해 흐르는 두 개의 강이 남한강으로 합류하여 수도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漢江)의 강폭과 유세를 확장시켜 지리적 우위를 차지하기도 한다.

 

영월, 안녕과 장애 & 장자와 차자의 역설

그러한 영월읍에는 조선조 제일의 적통이며 적장자인 제6대 임금인 단종(端宗) 이홍위(1441~1457)의 묘가 위치한다. 보통 조선왕실의 무덤은 수도 서울의 정궁이며 법궁인 경복궁을 비롯한 4대문에서 39.3km(100) 안팎으로 조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곳 단종의 묘는 멀리 동남쪽으로 200km 이상 떨어진 산간내륙 지역에 조성된 까닭이 특기할 만하다. 적통 장자를 미워하는 차자의 슬픔과 갈등, 열등감과 트라우마가 힘의 세기와 권력으로 팽창해 그만큼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였다는 역설을 보여주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또 다른 역설로는 영월이라는 지명도 한몫 한다. 본래 영월(寧越)은 평안하다, 문안하다, 거상하다(죽음을 치르고 있는 중 있다) 등의 ()’자와 넘을 ()’자를 합해 험준한 산과 굽이치는 물줄기 등 자연 장애를 편하게 넘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태백산맥과 차령산맥 줄기에서 뻗어 내린 크고 작은 산들이 중첩돼 있어 죽음의 지형이라 관통하기 어렵다는 역설이다. 이를 편안히 넘어가기를 바라는 민간의 염원이 담겨 있다.

이러한 영월의 단종애사(端宗哀史)는 과거 비극적인 사건으로 비칠 수 있지만, 오히려 현대에 와서는 정치적 비운의 왕, 슬픈 단명 왕, 젊은 소년 왕 등의 타이틀을 달고 문화계에 새로운 이야기를 전달한다. 세계 3소년 왕으로 손꼽히는 이집트의 투탕카멘, 영국의 에드워드 5세와 더불어 한국의 단종 이홍위 역시 무한한 문화 이슈의 소재거리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장릉은 단종의 능으로 1516년(중종11) 암장지를 찾아 봉분을 하였으며, 1580년(선조13) 상석과 표석, 장명등, 망주석 등을 세워 능역을 조성하였다.

 

조선 제6대 소년왕, 단종의 실권과 비애

1441(세종 23) 723, 세종대왕의 맏아들로서 왕세자 시절 이향으로 불리던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사이에서 적통, 적장자이며 외아들로 태어난 단종은 본명이 이홍위(李弘暐, 1441~1457). 할아버지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으며 성장한 이홍위는 7세 무렵에 이미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2년 후 아버지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9세의 나이로 왕세자가 되었다. 또한 14525, 39세의 문종이 붕어하자 그 뒤를 이어 11세의 소년왕 단종이 등극한다.

이후 3년 즉위하는 동안 친할머니 소헌왕후 심씨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가 일찍 사망함으로 차세대 왕들에 비해 수렴청정 할 만한 왕대비들이 없었다. 오직 문종의 고명을 받은 3정승으로 세종대왕 때 활약했던 영의정 황인보,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이 최측근이 되어 보좌했다. 거기에 행정실무를 담당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신숙주, 이개, 유성원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 선왕의 부탁을 받아 단종을 보호하고 보필했다.

하지만 단종(端宗·이홍위·11)이 즉위한 지 1년 반 만인 145310월에 숙부이며 세종대왕의 아들 중 차남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유·35)’3안평대군(安平大君·이용·34)’ 사이에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인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난다. 수양대군과 한명회가 한편이 되어 안평대군과 황보인, 김종서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본격적인 숙청작업에 들어간다. 이어 권력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영의정 부사 영집현전 경연 예문춘추관 서운관사(領議政府事領集賢殿經筵藝文春秋館書雲觀事) 겸 판이병조사 중외병마도통사(兼判吏兵曹事中外兵馬都統使)’라는 길고 긴 직함으로 무소불휘의 권력을 행사한다.

이어 14556, 단종에게 도움을 주던 세종대왕의 6남이며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유·29)과 이하 여러 종친은 물론 궁인과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각 지방에 유배를 보낸다. 이러한 정세에 두려움을 느낀 단종은 마침내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어 거처를 옮긴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후 6, 유배를 떠난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집현전 학사 성승, 무신 유응부 등과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고 그해 7, 상왕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낸다. 이어 같은 해 10, 마침내 사사 당한다.

청령포는 단종이 유배됐던 곳으로 3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영월군 남면 광천리에 위치하고 있다.

 

단종과 영월 3, ‘청령포-관풍헌-장릉역사의 궤적

#1. 청령포_암벽과 물길에 둘러싸여 유형지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淸泠浦). 서쪽에는 육육봉(六六峯)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고, 동쪽과 남쪽·북쪽 3면이 모두 서강(西江)에 둘러싸여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 없었다. 다만 이곳에 기거할 수 있는 작은 집이 있어 영월 호장 엄흥도만 밤에 몰래 찾아 문안을 하곤 했다.

단종은 하루 종일 적막한 곳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생활을 하며 소나무 숲을 배회하곤 했다. 당시 두 갈래로 갈라진 소나무가 있었는데 그곳에 걸터앉아 한양을 바라보고 아내를 그리워하며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볼관() 자에, 오열하는 소리음() 자를 붙여 관음송이라 부른다. 1988년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까지 현재까지 600년간 생장하고 있다.

또한 청령포 뒷산 육육봉과 노산대 사이 층암절벽 위에는 단종이 유배생활 할 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직접 쌓아 올린 망향탑이 있다. 그의 유일한 유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자신의 앞날과 멀리 남양주에 떨어져 있는 왕비 정순왕후 송씨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어떠하였는지 엿보게 한다. 그 외에 소년왕이 머물렀던 단종어소와 영조대왕이 직접 쓴 단묘재본부시유지비’, 중종 때 금표비가 서 있다.

#2. 관풍헌_영월부관아에서 이뤄진 생과 사의 기로

14576, 창덕궁을 출발하여 7일 후 유배지인 청령포에 도착한 단종은 그해 여름 홍수로 인해 강물이 불어나자 황급히 영월부관아인 관풍헌으로 옮겨간다. 이곳은 영월읍 중앙로에서 동강1교 방향으로 약 70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단종은 관풍헌 동쪽에 있는 작은 누각 관풍매죽루(觀風梅竹樓)’에 매일같이 올라 시를 지으며 울적한 마음을 달래곤 했다. 또한 그가 피를 토하며 운다는 소쩍새(자규)의 한을 담은 시를 읊었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곳을 자규루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곳에서 보낸 유배생활도 그리 길지 않았다. 그해 10, 순흥으로 유배 간 금성대군이 또 한 차례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등된 단종은 결국 사약을 받게 된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가지고 내려오기 전 단종은 관풍헌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이어 그의 시신은 강물에 버려졌다. 당시 왕방연은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노래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

#3. 장릉_풀 무성한 곳에 뉘다.

영월의 하급관리이며 호장이었던 엄흥도는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되던 시절부터 사사되기까지 한결 같은 마음으로 충절을 다했다. 마지막 시신에 손을 대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강물에 떠가는 단종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자신의 선산인 시루산 줄기를 타고내린 발산 끝자락 두목고개 선산에 암매장한다.

이후 1516(중종 11)에 비로소 왕릉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이어 1681(숙종 7) 7, 숙종은 그를 노산대군으로 추봉(追封)한 뒤 1698(숙종 24) 11월에는 전 현감 신규의 상소로 사후 241년 만에 단종을 왕으로 복위시킨다. 또한 숙종은 그의 시호를 단종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端宗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이라 칭하고, 묘호를 단종(端宗)으로 능호를 장릉(莊陵)으로 추복한다.

장릉의 모습은 매우 단출하다. 올라가는 길도 매우 가파르다. 사사된 후 암매장 되었기에 더욱 그렇다. 또한 서인으로 강봉되었다가 추존되었기에 병풍석이나 난간석도 없다. 삼면에 낮은 담장을 두른 곡장도 없었으나 현대에 와서 재현했다. 이러한 장릉과 더불어 단종의 정비인 정순왕후의 사릉 또한 매우 소박하다. 단종이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유배에 처해지자 왕비 역시 서인이 되어 궁 밖으로 쫓겨나 81세까지 홀로 지내다가 사망했다. 죽은 후 거두는 이가 없자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의 시가에서 자신들의 선영에 왕비의 묘인 사릉을 조성했다. 사적 제209호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다(세종대왕 당시 참판을 지낸 경혜공주의 시아버지 정충경과 형조판서를 지낸 남편 정종 그리고 경혜공주의 묘는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대자골마을에 있다).

이러한 장릉에는 강압적 왕위 찬탈로 목숨까지 빼앗긴 단종을 영원히 사모한다는 뜻의 능묘각 현판과 영모전(永慕殿) 이외에도 반드시 눈여겨보아야 할 곳이 있다. 바로 정려각(旌閭閣)이다. 목숨을 내걸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릉에 몰래 모신 엄흥도(嚴興道)’의 혼을 기리는 곳이다. 영월이 충절의 고장으로 불리게 된 까닭과 참배를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속설도 여기에 기인한다.

선돌은 영월군 영월읍 방절리 날골마을과 남애마을 사이의 서강 강변에 있다. 서강의 푸른 물과 어우러져 경치가 뛰어나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장릉과 영월 관광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에 있는 사적 제196’ ‘영월 장릉(莊陵)’ 지난 200963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단종과 관련한 장릉을 포함해 조선왕릉은 40기다. 그해 627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청령포에 유배됐던 단종(조선 제6)17세 되던 해(1457) 사약을 받고 묻힌 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것을 결정했다.

또한 이곳 영월은 현재 16개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들어서 있다. 그로 인해 국내 유일의 박물관 고을 특구로 지정되었다. 수려하게 풍광을 자랑하는 동강사진박물관(하송리)을 비롯해서 영월곤충박물관(문곡리), 화석박물관(판운리), 호야지리박물관(무릉3), 아프리카미술박물관(진별리), 국제현대미술관(삼옥리), 호안다구박물관(내리), 별마로천문대(봉래산) 등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영화 <라디오스타>에 등장했던 천문대 옆 천문과학교육관은 별자리 여행과 천문에 관련된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영상강의실, 전시실, 취미교실 등이 마련돼 있다. 더욱 이곳 정상에서 소박하나마 정겨운 영월읍내 야경도 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영월하면 역시 동강과 서강이다. 소정(小亭) 변관식의 한국화를 보듯 깎아지른 절벽과 더불어 백두대간에서 흘러나온 동강이 60넘는 장강으로 굽이굽이 길게 흐르며 아우라지 뱃사공들의 옛 이야기를 들려줘 역사성이 깊다. 더욱 어라연은 동강 협곡이 빚은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일명 삼선암(三仙岩)으로 불리는 어라연은 고기가 비단결 같이 떠오르는 연못이란 뜻이다. 그만큼 워낙에 아름답다. 또한 선암마을은 한반도 지도를 강물 속에 옮겨 놓은 듯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3면이 바다인 지형은 물론 호미곶을 연상시키는 후미 부분까지 한반도를 흡사하게 닮아있다. 여기에 소나기재 부근 선돌70m 높이의 큰 바위로 신선암이라 불린다. 두 갈래로 우뚝 솟아있는 선돌 사이로 보이는 서강의 푸른 물줄기가 잊을 수 없는 풍광을 뇌리에 각인시킨다.
 

별마로 천문대는 대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지방자치단체가 세운 시민 천문대로 2011년 10월 13일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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