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 발렌티나 리시차 피아노 리사이틀 (3/23)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 객석의 청중들처럼 마스크를 쓴 채 연주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오푸스)

[시사매거진=강창호 기자] 봄 날씨의 따스함을 뒤로한 채 서울 예술의전당은 모두가 마스크를 착용했다. 마치 화생방 훈련을 하듯 객석은 하얀 마스크로 진풍경을 이뤘다.

코로나19가 가져온 공연장의 이색적인 모습은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파쇼적이다. 동시에 바이러스와의 치열한 전장의 한 복판에 와 있음을 실감케 했다. 빛바랜 지난 오랜 세월의 기억 속에서 핑크플로이드의 1982년 뮤직비디오 <더 월>의 장면들이 스쳐간다. 획일주의와 강압적인 시스템으로 상징되는 벽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저항들, 현재 우리에게 닥친 현실 같았다.

발렌티나 리시차, 마스크를 쓴 청중들 그리고 키예프에 계신 어머니와 절망적인 상황에서 승리한 베토벤. 이 모든 상황의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왔으리라 결국 그는 피아노 앞에 엎드려 울고야 말았다. (사진제공=오푸스)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는 2013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첫 내한공연을 한 이후 한국을 자주 찾는 아티스트로 유명하다.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으로 펼친 이번 리사이틀은 ‘격정과 환희’로 2015년 내한 때처럼 첫 곡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로 출발했다. 그리고 23번 <열정>, 인터미션 후 연주한 29번 <함머클라이버>는 한국에서는 처음 연주하는 곡이었다.

리시차는 세계적인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도 어렵게 한국을 찾았다. 무대 첫 등장부터 마스크를 착용하고 나온 그는 연주 중에 어떠한 이유에선지 건반 위에 엎드려 엉엉 우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고야 말았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객석. 그러나 곧 연주자를 응원하는 객석의 열정적인 박수에 다시 무대에 오른 리시차는 미안하다는 메시지와 함께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런데 이어가는 그의 연주는 함머클라비어 4악장이 아니라 미스터리하게 소나타 <월광>이었다.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 객석의 청중들처럼 마스크를 쓴 채 연주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오푸스)

이 부분에 대해 리시차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연주 중에 갑자기 86세 연로하신 어머니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가 코로나 때문에 힘든 상황에 있으며, 오늘 객석에 계신 관객 분들 모두가 마스크를 쓴 채 음악을 갈구하는 모습이 제 마음을 건드렸습니다. 곡 또한 굉장히 공감을 일으키는 곡이라 감정에 복받쳐 끝까지 연주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달빛이 사람들을 따뜻하게 비추고 감싸는 것처럼 오늘 함께해주신 객석의 모든 분들을 감싸주고 싶어서 월광을 연주했습니다. 오늘 저의 연주가 많은 사람들에게 달빛 같은 위로가 되었음 합니다. 미안하고, 너무 감사합니다.”

50분간 펼쳐진 앙코르를 마치고 마스크를 쓴 청중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발렌티나 리시차 (사진제공=오푸스)

베토벤의 슬픔과 현재 우리의 괴기스러운 고통의 상황들이 맞닿았을까?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중 ‘함머클라비어’는 베토벤이 직접 초연했다고 알려진 곡이며 기존 곡들과는 다르게 4악장으로 꾸며진 특이한 구성으로 장대한 음악적 내용을 갖춘 피아노 소나타의 새로운 도약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베토벤 자신도 이 곡을 연주할 당시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단지 손끝으로 전달되는 건반의 덜컹거림으로 느끼는 감각이 유일했을 것 같다. 이런 곡의 흐름 속에 베토벤의 지독한 고뇌와 슬픔이 연주자에게 전이된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감사하게도 이번 연주를 통해 베토벤의 감정을 소리로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객석의 환호 속에 꿋꿋하게 앙코르를 네 곡이나 들려준 그는 역시 건반 위의 검투사였다.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Valentina Lisitsa) (c)Gilbert Francois

 

저작권자 © 시사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