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헌법으로 전환된 제8대, 제9대 박정희 정권은 독재정권의 폐해가 가득한 우울한 시대

[시사매거진263호=이회두 기획편집국장] 제3공화국(第三共和國)19631217일부터 19721017일까지의 대통령중심제 정부를 말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집권기에 대한 평가는 심각할 정도로 극명하게 갈라져, 지금도 우리 정치계에는 뜨거운 이슈로 작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대립적인 평가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경제발전과 관련된 치적, 독재정권으로 인한 민주화의 후퇴와 인권탄압에 대한 과오를 두고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시 말하자면 전반부부터 경제재건이라는 공로가 있음을 인정하자는 주장, 공로만을 인정하기에는 후반부에 극심해진 독재정권의 폐해가 너무 크다는 식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제5, 6대 박정희 정권을 제3공화국 전반부로, 7, 8, 9대 박정희 정권을 후반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유신헌법으로 전환된 제8, 9대 박정희 정권은 독재정권의 폐해가 가득한 우울한 시대였다.

(사진_뉴시스)

 

급변하는 70년대 세계정세

박정희 정권은 1963년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경제성장의 기반을 이루고 제6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권력의 기반까지 넓혔지만 1970년을 전후하여 세계정세의 급변과 내수 경제의 극심한 정체라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무언가를 해야 했다.

1970815일 대통령 박정희는 한반도 평화정착상호 문호개방과 신뢰회복남북한 자유총선거라는 평화통일 3단계 기본원칙을 발표했다. 즉시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이전까지 밟았던 격렬한 대립 관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처럼 보였다.

197012,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은 북한국장 강인덕에게 새로운 대북정책을 주문하고 남북적십자회담안을 채택한다.

1971726일 일본 요미우리 신문이 남북적십자회담안을 보도했다.

1971812일 대한적십자사는 KBS 방송을 통하여 북한에 남북한 이산가족 찾기를 위한 적십자회담을 개최할 것을 제의하고, 북한 측은 814일 평양방송을 통하여 북한 조선적십자회는 남북적십자회담 개최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1971920일 열린 제1차 예비회담을 시작으로 1972811일까지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이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총 25차례 개최되었다. 많은 이들이 남북통일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환영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이 한참 남북회담을 진행할 즈음 세계정세가 급변하는 사건들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1971년 베트남 전쟁에서 대실패를 맛본 미국은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에 이어 국제 연합에서 중화민국을 추방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상임이사국에 올렸으며 소련은 미국과 접촉해 상호 전략무기 제한 협정을 맺는 등 냉전시대에서 동·서 화해 시대의 분위기가 형성된다.

1972년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중국의 마오쩌뚱과 회담을 갖고 수상 쩌우언라이(주은래)와 상하이에서 공동성명을 통해 한반도 긴장 완화, 교류증진 노력을 지지하는 것 등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미국의 전쟁 실패와 닉슨 독트린, 세계적인 화해무드, 우리 국민들의 자유민주의식의 성장, 전태일 열사의 분신 등의 시대적 변화는 반공·안보 이데올로기와 경제개발을 결합시켜 정권을 유지해왔던 박정희 정부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시 박정희 정권 초기부터 권력에 밀착되어 온갖 권력을 휘두르던 세력들의 수장, 특히 김형욱과 이후락의 정치공작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타락해 있었다.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었고 실제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사진은 김 전 총리가 71년 당시 열린 제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식장으로 안내하는 모습. (사진_뉴시스)

 

197274일 오전 10시 남북한에서 동시에 깜짝 놀랄만한 발표가 나왔다.

서울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52일부터 55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평양의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회담을 진행하였으며, 박성철 제2 부수상이 1972529일부터 61일까지 서울을 방문하여 이후락 부장과 회담을 진행했다는 경과보고가 나온 것이다.

더불어 민족의 문제를 외세의 개입 없이 자주적으로, 평화적 방법으로,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조국을 통일하자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남북한의 통일에 관한 7개 항의 합의 내용을 발표한다. 주요 내용이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성명서의 내용만을 놓고 본다면 참으로 우리나라에 꼭 필요하고 절실한 위대한 내용이다. 북한과의 교류를 주장하는 진보측도 선언의 내용만은 인정하고 있고, 남북기본합의서를 바탕으로 이후 6.15 남북 공동 선언과 10.4 남북 공동 선언, 2018427일의 판문점 선언도 이 선언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남한은 같은 해 101719시 계엄령을 선포해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정당과 정치단체들의 활동을 중지시켰고, 북한은 헌법을 개정해 주석(직위)을 신설해 김일성이 취임하여 영구집권과 세습에 대한 기반을 마련한 상황들을 분석해 보면, 공동성명조차도 남북 정권이 비밀리에 교섭하여 국제정세를 이용한 집권 강화에 써버렸다는 비판과 실제로는 북한에 이용만 당했다는 평가를 낳게 된다.

제3공화국(第三共和國)은 1963년 12월 17일부터 1972년 10월 17일까지의 대통령중심제 정부를 말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집권기에 대한 평가는 심각할 정도로 극명하게 갈라져, 지금도 우리 정치계에는 뜨거운 이슈로 작용하고 있다.(사진_뉴시스)

 

유신헌법, 목 매달린 자유민주주의

몇몇 정치적인 전술도 수출성장형으로 진행하다가 내수부진이라는 위기를 맞은 상황을 타개해 주지 못하자 8·3 사채동결조치를 발표한다. 8·3조치의 핵심은 당시 금액 35백억 규모의 사채를 동결하고 2천억 가량의 특별대환, 6백억을 초과하는 산업합리화 자금 공급과 금리인하 등 자본에 대한 지원을 극대화한 것이다. 이 조치는 자본계급을 위해 대다수 국민의 허리를 동여매는 저급한 내용이었다. 1960년대부터 8·3조치 직전까지 노동생산성 상승률은 12.5%임에도 실질임금 상승률은 5.4%에 머물렀다. 노동자들은 극한까지 생산량을 늘리면서 점점 더 가난해지는 상황인데 정부는 기업과 자본가의 편에 서버린 것이다.
 

미국의 전쟁 실패와 닉슨 독트린, 세계적인 화해무드, 우리 국민들의 자유민주의식의 성장, 전태일 열사의 분신 등의 시대적 변화는 반공·안보 이데올로기와 경제개발을 결합시켜 정권을 유지해왔던 박정희 정부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진_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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