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10경에 스민 ‘김삿갓 병연, 청운의 한(限)’

김삿갓이 방랑을 떠나기 전 거주했던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자리 잡은 김삿갓문학관은 영월군 시설관리공단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사진_이관우 기자)

 

[시사매거진263호=오경근 칼럼니스트] 새해 들어 마지막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하루, 유순하게 흐르는 서강(西江)을 바라보며 방랑시인 김삿갓(본명 김병연, 1807~1863)’이 살았던 강원도 영월군 노루목으로 향한다. 잿빛 안개가 피어나는 회청색의 넓은 겨울바다를 보는 것도 특별하지만, 기암절벽과 자작나무 흰 산골짝을 타고 내려 평야로 굽이치며 흐르는 회녹색 겨울강을 보는 것도 이 추운 계절에 빼놓을 수 없는 겨울 백미 중 하나다.

자연이 있고,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는 이곳 강원도 영월군(寧越郡)은 예로부터 백두대간 태백산과 소백산, 치악산에 가로막혀 산간벽지 중의 벽지이며 궁지 중의 궁지로 일컬어진다. 그와 더불어 우리나라 대표적 예언서인 <정감록>에서 사람들이 생명을 길하게 보존할 비밀한 장소로 지목돼 관심이 집중되기도 하다. 그러한 영월에 조선후기 민중과 함께하며 해학과 방랑을 일삼은 떠돌이 천재시인 김삿갓의 주거지와 <난고 김삿갓문학관>이 있어 찾아보았다.(자료:서세원 팀장(영월군청 문화관광체육과 박물관계)
 

김삿갓문학관 입구에 들어서면 방랑의 삶을 선택한 방랑시인 김삿갓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모형과 그가 떠돌며 보았던 산수의 풍광들이 그림으로 전시돼 있다.(사진_이관우 기자)

 

하늘의 죄, 풍운처럼 떠도는 김병연의 삿갓

두리둥실 내 삿갓은 빈 배와 같은데 / 한 번 썼다가 사십 평생 쓰게 되네 / 목동은 들녘 송아지 치기 좋고 / 어부는 강가 갈매기 짝하기 좋아라 / 취하면 벗어다가 꽃나무에 걸어두고 / 흥이 일면 옆에 끼고 달구경하러 누대에 오르네 / 사람들 의관이야 모두 겉치장이건만 / 하늘 가득 비바람 쳐도 나는 홀로 걱정 없네

조선후기 방랑시인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이다. 자는 성심(性深)이고, 별호는 김립(金笠) 호는 난고(蘭皐). 김삿갓이란 별칭은 그가 20세 이후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를 떠돌며 한 평생 삿갓을 쓰고 방랑한 데 기인한다. 1807(순조 7) 음력 313일 경기도 양주군 회전면 회암리에서 안동김씨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삼중대 광태사의 후예로 휴암공파 24대 손으로 태어났다. 또한 양반계 성골인 노론 장동김씨가문에서 부친 김안근과 모친 함평이씨 사이에서 4남 중 차남으로 위로, 형 김병하와 아래로 3째 김병호, 4째 김병두 아우를 두고 있다.

그가 5세가 되던 1811(순조 11) 무렵 평안도 일대에서 홍경래가 주도한 평안도 농민전쟁이 일어난다. 당시 평안도 선천의 부사(선천 방어사)이며 함흥 중군(3)으로 전관되어 온 그의 조부 김익순은 새로운 임지에서 서너 달 동안 어수선한 공관 일을 정리한 후 시골의 저명한 선비들을 모아 수일간 잔치를 벌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홍경래의 농민군이 쳐들어와 술에 취해 있는 김익순을 결박하고 투항을 받아내게 된다.

이때 가산군수를 지낸 정시는 포로가 되어 저항하다가 죽임을 당하였으나, 선천부사인 김익순은 홍경래의 농민군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구명했다가 농민군이 다시 관군에게 쫓길 때 농민군의 참모인 김창시의 목을 1천 냥에 사서 조정에 바침으로 전공을 위장하게 된다. 그런 이중적인 처사가 드러나게 되자 김익순은 참형을 당하고, 조모인 전주이씨는 광주의 관비로, 아들인 김안근은 남해로 귀향 간다.
 

제1전시실에는 김삿갓의 정체성과 방랑의 시작이자 종착지인 영월 김삿갓 유적지를 발견한 고 박영국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사진_이관우 기자)

 

어린 김병연은 형 김병하와 함께 노복(머슴) 김성수의 등에 업혀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하고, 모친 함평이씨도 어린 김병호와 김병두를 데리고 경기도 여주, 이천으로 피신한다. 이후 조부 김익순의 죄가 일가족을 모두 죽이는 멸족에서 벼슬을 할 수 없는 폐족으로 감형이 됨에 따라 4형제는 모두 모친의 품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귀향길에 오른 부친이 울화병으로 사망하고, 모친은 사람들의 괄시와 천대를 피해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로 숨어들게 된다.

가문의 내력을 모른 채 살던 김병연은 20세 되던 1827(순조 27)에 한 살 연상인 장수황씨와 결혼한다. 그리고 그해 영월군 동헌에서 실시한 백일장 과거에 참가해 장원급제를 한다. 이때 시제가 논정가산충절사탄 김익순죄통우천으로 홍경래의 반란에 대항하여 싸웠던 가산군수 정시를 예찬하고, 투항했던 선친부사 김익순(그의 조부)을 비판하라는 내용이었다.

뒤늦게 모친에게서 조부의 대역죄와 폐족 신분을 알게 된 김병연은 한 번 죽은 것으로는 부족하니 만 번은 죽어야 마땅하다고 조상을 비난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책감에 빠져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어둔으로 이사해 은둔생활을 하게 된다. 이어 1829년 그의 나이 22세 때 장남 김학균을 낳고, 한양으로 상경하여 안응수의 문하에서 이름을 김란, 자를 이명, 호를 지상으로 바꾸고 공부를 새롭게 시작한다. 하지만 24세가 되던 해엔 돌연 귀향해 장남 학균을 자신의 형인 김병하에게 입양시키고 모친과 처, 차남 김익균을 남겨둔 채 방랑길에 오른다.

제2전시실에는 설화 속 주인공으로 더 친숙한 김삿갓 일화와 민중의 편에서 시를 썼던 김삿갓의 문학적 가치를 볼 수 있다.(사진_이관우 기자)

 

해학과 풍자로 유명해진 김삿갓의 방랑의 시()

모친 함평이씨와 처 장수황씨에게 홍성 외가에 다녀오겠다고 말한 후 정반대인 북쪽의 금강산으로 첫 방랑길을 떠난 김병연은 각지의 서당을 순방하며 떠돌이 생활을 이어간다. 서울과 충청도, 경상도를 떠돌다가 안동의 도산서원 아랫마을 서당에서는 몇 해 동안 훈장 노릇을 하기도 하고, 다시 전라도, 충청도, 평안도를 거쳐 어릴 때 자랐던 곡산의 노복(머슴) 김성수 아들집에서는 1년쯤 기거하며 훈장이 되었다가, 29세 무렵에는 가련이라는 기녀와 동거를 한다. 그러는 동안 그의 시()는 민중을 향한 풍류와 해학과 풍자로 사람들의 구전을 통해 회자되기 시작한다.

나는 지금 청산을 찾아가는데 / 옥수야 너는 왜 흘러오느냐(我向靑山去 綠水爾何來)

소나무와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 바위와 바위 사이를 돌아가니 / 물과 물, 산과 산이 곳곳마다 기기묘묘하구나(松松柏柏岩岩廻 水水山山處處奇)

꼿꼿, 뾰족뾰족, 괴괴한 경개가 하도 기이하여 / 사람도 신선도 신령도 부처도 모두 놀라 참말인가 못 믿을 것 같다(矗矗尖尖怪怪奇 人仙神佛共堪疑)

내 평생의 소원이 금강산을 읊으려고 별러 왔으나 / 이제 금강산을 대하고 보니 시를 못 쓰고 감탄만 하는구나(平生詩爲金剛惜 及到金剛不敢詩)’

또한 그가 함경도 어느 곳에서 기거하다가 속 좁은 친구 내외가 끼니문제로 서로 나누는 대화를 듣고 파자를 풀어서 파자로 반박하는 일이 발생한다. 안주인이 인량차팔(人良且八) 하오리까?” 하고 묻자 집주인이 월월산산(月月山山) 하거든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김삿갓이 화를 내며 정구죽요(丁口竹夭)로구나, 아심토백(亞心土白)하며 그 집을 떠나왔다.

인량차팔(+++)’식구’(食具)이니 밥상 차릴까요?” 하고 묻자, ‘붕붕산산(+++)’ 붕출’(朋出)이니 이 친구 나가거든이라고 답한 것이다. 이에 김삿갓은 정구죽요(丁口竹夭) 아심토백(亞心土白)’ 곧 합자하여 저종가소’(猪種可笑)로써 이 돼지 새끼들아, 가소롭다고 비웃으며 떠난 것이다.

김삿갓은 전국을 떠돌다가 하루는 시골 어느 서당에 들려서 하룻밤 유숙할 것을 청하자 마음 씀씀이가 고약한 훈장은 실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 찾을 멱()’4개로 운을 떼어 시를 짓게 했다. 이에 김삿갓은 사멱난운이라는 시를 지어 훈장을 곤란케 하고, 기어이 하룻밤 묵어가기도 했다.

많고 많은 운자에 하필 멱자를 부르는가(許多韻字何呼覓)

첫 번 멱자도 어려웠는데 이번 멱자는 어이 할까(彼覓有難況此覓)

오늘 하룻밤 자고 못자는 운수가 멱자에 걸리었는데(一夜宿寢懸於覓)

산촌의 훈장은 멱자밖에 모르는가(山村訓長但知覓)’

또한 당대 함경도 관찰사 조기영의 가렴주구를 폭로한 시가 있다. 선화당, 낙민루, 함경도, 조기영의 한자 훈을 바꿔서 기가 막히게 가렴주구를 폭로한 시다.

선화당상선화당(宣化堂上宣火黨) /낙민루하낙민루(樂民樓下落民淚)

함경도민함경도(咸鏡道民咸驚逃) / 조기영가조기영(趙冀永家兆豈永)

선화당에서 화적 같은 정치를 행하고 / 낙민루 아래에서 백성들이 눈물 흘리네

함경도 백성들이 모두 놀라 달아나니 / 조기영이 가문이 어찌 오래 가리오

어느 시골의 노인 회갑연에서는 말석에서 푸대접을 받자 즉석으로 축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도 있었다. 첫 소절을 보고 가족과 하객이 몰매를 치려 하자 두 번째 소절로 그들을 탄복시켰다. 세 번째 소절에서는 긴장감을 고조시키다가 마지막 연에서는 맛 좋은 술을 청한 후 극찬으로 마무리한다.

피좌노인비인간(披坐老人非人間) / 의시천상강신선(疑是天上降神仙)

슬하칠자개도적(膝下七子皆盜賊) / 투득천도헌수연(偸得天桃獻壽宴)

저기 앉은 늙은이는 사람이 아니니 / 마치 하늘에서 내려 온 신선 같구나

슬하 일곱 아들 모두 도둑놈이니 / 천도복숭아를 훔쳐다 잔치를 빛내는구나

제3전시실에는 ‘김삿갓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연속성을 통해 ‘김삿갓’이라는 콘텐츠로 생명력을 불어넣은 작가 정연택의 작품을 전시해 놓았다.(사진_이관우 기자)

 

평생 바람의 벽, 영월에 잠들다

이렇게 김삿갓은 평생 방랑하며 유리걸식 하다가 잠시 집에 들러 노모와 처자식(황씨부인. 장남 김학균, 차남 김익균)의 안부를 확인하고는 곧바로 다시 떠나곤 했다. 충청도 계룡산 밑에 기거할 때는 아버지를 찾아간 아들 김익균을 재워놓고 몰래 도망하기도 하였다. 이후 1년 만에 다시 경상도 어느 산촌으로 찾아간 아들을 만났으나 이번에도 심부름을 보내놓고 줄행랑쳤다. 그리고 3년 뒤 경상도 진주에서는 아들을 만나 귀가할까 마음먹었으나 이내 변심하여 용변을 본다는 핑계로 도망하였다. 아들 김익균에게 3차례나 귀가를 권유받았지만 계속 거절하고 방랑을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전국을 유랑하다가 전라남도 화순군 동북면에 이르러서는 기력이 다해 쓰러지게 된다. 당시 그곳 동북면에서 참봉을 지내던 안 선비는 나귀에 태워 자기 집 사랑방에 데려가 보살펴 준다. 하지만 김병연은 기력을 차린 후 다시 일어나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이후 쇠약한 몸으로 다시 그 선비의 집으로 돌아와 1863(철종 14) 3월 음력 32957세의 나이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주검은 그곳 마을 뒤편에 묻힌 것을 그로부터 3년 후 부친의 행방을 찾아 헤매던 아들 김익균이 유골을 수습하여 강월도 영월군 의풍면 태백산 기슭으로 옮겨온다.

스무나무 아래 앉은 설운 나그네에게(二十樹下三十客)

망할 놈의 마을에선 쉰밥을 주더라(四十村中五十食)

인간에 이런 일이 어찌 있는가(人間豈有七十事)

내 집에 돌아가 설은 밥을 먹느니만 못하다(不如歸家三十食)’

이 시에는 20, 30, 4050, 70세 나이를 비유해 전통적인 한시의 양식을 파괴한 파격미를 갖추고 있다. 자꾸만 읽어보아도 해학이 넘쳐난다.

현재 영월군 김삿갓면에 있는 김병연(김삿갓) 주거지는 1982년 발견할 당시 엄운섭(당시 64) 씨가 수리해서 살고 있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1972년경 처음 들어간 본채의 대들보가 썩어 내려앉아서 철거하고 바깥채에서 살았다고 한다. 강원도 영월군 화전민 촌의 집들이 모두 통나무로 짓는 데 비해 김삿갓의 주거지는 본채가 기둥, 천장보, 도리 등으로 되어 있고, 사용한 나무 역시 도끼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모친인 함평이씨가 양반가문의 안목 있는 주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의 주거지 건물은 강원의 얼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20029월에 복원한 것이다.

이외에 영월군에서는 1경에 장릉(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사적 제 196)2경 청령포(국가지정 명승 제50), 3경 별마로천문대·천문과학교육관, 4경 김삿갓유적지, 5경에 고씨동굴(천연기념물 제219), 6경에 선돌(국가지정 명승 제76), 7경에 동강 어라연(국가지정 명승 제14), 8경 한반도지형(국가지정 명승 제75), 9경 법흥사, 10경으로 요선암·요선정이 있다. 역사와 문화가 겸비된 유적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김삿갓문학관 인근에는 전남 화순 동복에서 생을 마감하고 묻혀 있는 김삿갓을 아들 김익균이 이장해와 봉분을 마련한 김삿갓의 묘가 있다.(사진_이관우 기자)

 

저작권자 © 시사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