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와 정치사의 숨은 행간을 통해 20세기 최악의 전쟁을 꿰뚫어보다

저자 A. J. P. 테일러 | 옮김 유영수 | 출판사 페이퍼로드

[시사매거진=여호수 기자] 제2차 세계대전의 주범은 누구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장 먼저 히틀러를 떠올릴 것이다. 다수의 생각처럼 제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와 그 일당들의 치밀한 계획하에 이뤄진 ‘오직’ 히틀러만의 전쟁이었을까? 심지어 독일인들까지도 히틀러의 모략에 놀아난 피해자였던 것일까?

‘준비되지 않은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의 저자인 A. J. P. 테일러는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권좌에 올려놓았고, 그들만이 히틀러를 축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하면서 오직 히틀러 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해석이 모두에게 면죄부를 줄지는 몰라도 역사를 전부 설명하진 못한다고 반박했다. 그 이면에는 보다 많은 정치적, 외교적 움직임이 얽혀 있었다는 것이다. 히틀러에게만 전쟁의 책임을 묻던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난 테일러는 히틀러를 그저 권력을 쫓았던 ‘역사 속 한 인물’로 표현하며 그동안 히틀러의 뒤에 숨어 면죄부를 받던 이들을 역사라는 무대 위로 다시 끌어올린다.

테일러는 역사의 굵직한 흐름이 아니라 그 흐름에 휘말리게 되는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과정을 설명한다. 책은 히틀러의 침략과 이에 대항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기보다, 독일 문제로 인해 흔들리는 유럽 질서 속에서 그 문제를 안고 고군분투하는 유럽 정치가들의 노력과 실패의 이야기로 보이게 된다. 악당은 드물었지만, 현명한 자는 그보다 더 적었다. 테일러는 ‘전쟁의 원인은 독재자들의 사악함만큼이나 다른 이들의 실수에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저자는 당시의 외교 기록과 히틀러의 공식 및 비공식 발언, 전범재판 기록, 전쟁 이전과 전쟁 기간 내 주요국의 통계 지표를 치밀하게 인용한다. 그 결과 얻어진 진실은 대중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책이 출간되면서 테일러는 나치의 부역자라는 오명을 들어야 했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강의도 접어야만 했다. 그 당시 대중과 학계는 그에게 찬사보다 격한 비난을 보냈지만 끝내 이 책이 자아낸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세월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에 관한 비할 데 없는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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