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남 작가

이순신은 빛바랜 추억으로 변한 영의정 유성룡과의 지난 기억을 더듬었다. 지금으로부터 십 이년 전인 1585년 을유년의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때 이순신은 부친상을 당하여 아산에 머물고 있었다. 하늘이 쨍하고 매미가 자지러지는 울음이 생생하던 그 뜨거운 정오에 유성룡이 방문했다. 무더위의 기승으로 한 걸음도 길을 나서기가 쉽지 않은 날씨를 마다하고 당시 예조판서이던 유성룡의 방문은 실로 의외였다.

“시원하게 한 사발 목을 축이시죠.”

“그러세. 정말 아산은 덥군!”

이순신이 건네주는 차가운 식혜를 벌컥벌컥 들여 마시면서 땀을 식이던 유성룡이 문득 말했다.

“자네는 혹 내가 찾아온 연유를 아는가?”

“기별도 없는 불시의 방문이니 이 아우는 짐작을 못하겠습니다.”

“이 사람아, 한 낮의 더위를 뚫고 비지땀을 흘리면서 먼 길을 왔거늘 섭섭하이.”

“송구합니다. 워낙 소제가 그 방면에는 재주가 없는지라.”

“하하하, 그런 표정은 짓지 말게. 웃자고 한 소리이니. 사실 알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네. 솔직히 말해주게나.”

이순신은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상주의 몸으로 아산으로 낙향한지 2년이 넘었거늘 새삼 자신에게 알고 싶은 것이 있다는 건 납득이 되지 않았다.

“성심껏 대답해 올리지요. 어떤 일이십니까?”

“조선의 수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유성룡은 이미 작정하고 있었던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이순신에게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돌발 상황이었다. 이 엉뚱하다 못해 황당한 물음에 이순신은 평소의 소신을 그대로 말했다.

“조선의 수군은 매우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병영입니다. 신라와 백제, 고려는 물론이고 조선에 이르기 까지 삼면이 바다를 인접한 나라이므로 끊임없이 왜구의 침입을 받았고 상당한 인명 피해도 입었습니다. 그리고 빈번하게 재물을 약탈당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한때는 바다를 장악하여 해상왕국의 명성을 드높였고 이국과의 교역을 왕성하게 확대하여 부강한 국력을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소제가 수군만호로 복무하여 보니 참으로 개탄스러웠습니다.”

“그래. 수군의 부족이 뭐였든가?”

“군사점고와 수전조련을 절대 게을리 해서는 아니 되며 전 수군의 통합적 관리 감독이 절실하지요.”

“군사점고와 수전조련을 어찌 하라는 것인가?”

“군사점고란 각 수군진영 및 읍진의 군사와 군선, 집물 등을 포함한 제반 군사 상황을 점검하는 일이고... 수전조련은 바다와 혹은 강에서 병선의 대오 열 관계, 진퇴의 유무 등 적선을 마주쳐서 전투에 임하는 법을 훈련하는 것이지요.”

“과연 중요한 일이로세.”

“바다 위에서는 함선의 거리, 조류의 변화, 기상 관계 등 고려해야 할 돌발 상황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사전의 철저하고 준비 된 상호 훈련과 준비가 필요합니다.”

“우리 수군은 그러한 체계적 훈련에 임하고 있는가?”

예조판서 유성룡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순신은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일개 수군만호로서 그의 한계가 분명 존재했었기 때문이었다.

“어림없는 일이지요. 낡은 병선의 개조와 수군들의 일사불란한 통솔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과감한 수군의 제도적 정비가 필요합니다.”

“그렇군. 그래서 내가 땀을 흘리고 여기 온 것이라네.”

이순신은 그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자신은 상중에 있고 예조판서의 직책은 더욱 더 수군과는 거리가 있었다.

“내 생각에는 우리 조선은 200여 년간 그래도 평화로웠네. 그 풍요로움이 우릴 병들게 했지. 전혀 다른 나라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했어. 다만 잦은 왜구의 침입은 그래도 우리에게 경각심을 안겨주는 일종의 신호였지 않았을까? ”

“혹 강력한 외세의 침입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계신 것이옵니까?”

이순신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유성룡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조짐이 그러하다는 것이지.”

“그렇다면 방비를 해야겠지요.”

“주변에 마땅한 인재가 없음이야. 자네가 그래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수군의 적임자야!”

이순신의 눈이 크게 놀랐다. 설마 예조판서 유성룡이 더위에 달려와 이런 말을 꺼낼지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 아우를 너무 높이 평가해 주시는 거 아닌지요.”

“아닐세. 난 이미 자네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내 일찍이 자네에게 율곡대감을 만나라고 충고 했을 때 오히려 자네가 나를 무안하게 했지. 기억나는가?”

“그건......”

“그래. 먼 인척 관계이니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네만 자네는 막 관직에 나온 사람으로 이미 당상관에 올라 있는 율곡대감을 뵙는 것이 옳지 않다 하였지. 이미 그 성품을 알고는 있었지만 나라의 녹을 받는 관리로서의 품성은 매우 감탄할만한 행동이었어. 뿐인가. 일전의 파직 역시 상관의 부정을 인정하지 않은 자네의 청렴한 태도로 인한 모함이 아니었던가?”

“대감?”

“다수는 아닐지라도 분명 자네의 그런 결백과 청렴함이며 충정어린 관리의 태도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믿어주게. 치밀하고 집요한 성격과 그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기백이 존재함이니 언젠가는 이 나라를 위하여 큰일을 도모할 것일세!”

“그 말씀을 해주기 위해서 한성으로부터 아산까지 걸음을 해주셨습니까?”

“이보다 더 먼 길이라고 가야하지 않겠나? 이보다 더 비지땀을 흘리더라도 만나야 하지 않던가. 나라를 당부하는 일이니 어찌 소홀 할 수 있는가. 자네는 상중일지라도 조선 수군에 대한 통합적 제도를 고심해주게나.”

“명심하겠습니다.”

“바다가 강하면 조선이 강해질 것이야!”

유성룡의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후 이순신은 전라좌수사가 되었다. 이후 조일전쟁이 발발하며 획기적인 수군의 제도 변화로 통제영을 설치하고 삼도수군통제사란 관직을 신설했다. 조선의 바다를 강하게 만들고자 했던 유성룡과 이순신의 합작품이었다.

‘서애대감은 높고 긴 안목을 지니고 계시다. 오늘의 이순신은 나 홀로의 이순신이 아니다.’

유성룡의 절대적 신뢰가 존재 하였기에 남해바다를 지키고 조선을 구원할 수 있었다. 이어서 이순신은 권율에 대해서도 잠깐 회상하였다. 1592년 임진원년에 이어 계사년 1593년의 행주산성 전투는 전설에 가까웠다. 불과 3천여 명에 달하는 군사를 이끌고 적의 3만 군대를 상대하여 물리친 것이다. 그 전공으로 도원수에 오른 권율은 이순신과 한산도에서 대면한 적이 있었다.

“놀랍소. 진정 놀랍소... 서애대감으로부터 장군의 명성은 오래 동안 들어왔소이다. 오늘날의 강력한 수군을 형성한 공로가 대단하오. 난 오늘에야 비로소 장군이 남해바다를 석권한 이유가 분명 존재함을 깨달았소이다.”

도원수 권율은 한산도에서 치러진 수군의 군영의식을 참가한 뒤 거품을 물고 찬사를 토해냈다. 각 수군의 연합 함대가 바다를 가득 메우고 해상훈련을 실시했었다. 색색의 깃발이 나부끼는 가운데 함포와 장병들의 함성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대장선의 깃발 지시에 따라 수군의 판옥선 함대가 좌와 우로, 상과 하로, 학익진과 장사진을 연출하며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전시체제임을 감안하여 다소 무리하지 않은 수전조련을 보여준 것이다.

“귀선은 이번 훈련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요?”

“거북선은 조선의 돌격 선봉으로 일본의 안택선을 최전방에서 공략하는 조선 함대의 비밀병기입니다. 지금이 비록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 협상으로 전쟁이 소강상태이기는 하지만 함부로 노출 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렇구려. 말로만 듣던 거북선의 위용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거늘.”

“도원수께서 정 원하신다면 거북선이 정박하고 있는 장소를 공개 하도록 하겠습니다.”

도원수 권율은 정색을 하며 손을 내 저었다.

“통제사, 절대 그럴 필요는 없소이다. 정국이 어떤 방향으로 기울어질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형편이요. 만일 협상이 타결 된다면 이 전쟁이 종식 될 것이지만, 만일 그 반대의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면 혼란은 더 커지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왜적은 임진년보다도 예민해 질 것이고 광폭해 집니다. 거북선은 극비리에 항해함이 옳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옵니다. 따라서 협상의 여부에 따른 수군의 동향에 만전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과연 훌륭하오. 통제사 이장군이 존재 하는 한 조선의 남해바다는 안전하리라 믿소. 실로 감사하오!”

도원수 권율은 흡족해 했다. 그만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함대는 믿음직스러웠던 것이다. 무려 20여 차례의 크고 작은 해전을 모조리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수군 함대로 인해서 조일전쟁을 총지휘하는 도원수 권율은 오랜만에 기쁘게 웃을 수 있었다.

‘도원수는 나를 신뢰한다. 그러나 나의 함대가 포문을 일제히 조선으로 향한다면 그는 어찌할 것인가? 그래도 날 신뢰하겠는가?’

‘서애대감은 내가 꿈꾸는 나라에 합류할 수 있을까? 이순신의 나라에는 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순신은 입술을 깨물었다. 핏물이 흘렀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심장을 후벼 파는 고통이 엄습할 뿐이었다. 그들은 이순신 자신과 더불어 조선의 영원한 수호신들이었기 때문이다. 또 새벽의 한기가 오싹 겨드랑이를 타고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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