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대 대통령선거, 독재정권을 향한 불행한 욕심, 3선 개헌

[시사매거진262호=이회두 기획편집국장] 제3공화국(第三共和國)19631217일부터 19721017일까지의 대통령중심제 정부를 말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집권기에 대한 평가는 심각할 정도로 극명하게 갈라져, 지금도 우리 정치계에는 뜨거운 이슈로 작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대립적인 평가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경제발전과 관련된 치적, 독재정권으로 인한 민주화의 후퇴와 인권탄압에 대한 과오를 두고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시 말하자면 전반부부터 경제재건이라는 공로가 있음을 인정하자는 주장, 공로만을 인정하기에는 후반부에 극심해진 독재정권의 폐해가 너무 크다는 식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제5, 6대 박정희 정권을 제3공화국 전반부로, 7, 8, 9대 박정희 정권을 후반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사진_뉴시스]

당시 대통령은 3선 금지조항이 있었기에 이미 대통령직을 두 번 역임한 박정희 후보에게는 자격이 없었다. 장기집권으로 가기 위해서는 3선 금지 조항을 없애야 했고 더불어 박정희 정권의 영구화를 위한 밑 작업들이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196759일 국무회의를 통해 대통령을 포함한 고위 공무원이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의 선거법 시행령 개정을 의결하여 정부가 직접 나서서 여당을 지원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9681월 이른바 북한의 민족보위성 정찰국 특수부대 소속인 124부대 소속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부요인 암살을 위해 군사분계선을 넘어 청와대 근처까지 잠입하는 김신조 사건(121 사태)이 발생했다. 이틀 후 북한 해안에서 40떨어진 동해의 공해상에서 승무원 83명을 태우고 임무를 수행하던 미국 함정 푸에블로호가 북한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에 의해 나포되는 사건도 일어나고 연이어 울진 삼척 무장공비 사건, KAL기 납북 사건이 터지는 등 연이은 사건으로 국민들은 불안에 휩싸였다.

1968824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통일혁명당 사건의 주모자인 김종태가 4회에 걸쳐 월북했다는 사실을 발표했으며, 125일에는 국민교육헌장이 발표되어 교과서 첫머리에 인쇄되기 시작했다. 학생들에게는 국민교육헌장을 암송시키고 정권은 국민들을 '반공'이란 국시 앞에 꽁꽁 묶어버리게 된다.

정권이 교체되어 혼란이 오면 안 된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니 이제 개헌을 밀어 부칠 차례다. 196987일 윤치영 의원 외 121명의 이름으로 대통령 3기연임을 허용한다는 골자의 3선 개헌안이 국회에 제안되어 다음 날 제71회 임시국회가 개헌안 발의를 위해 소집되었다.

1969914일 새벽 227, 야당 의원들은 그 전날 이효상 의장이 절대 오늘 밤은 별일이 없을 테니 집에 가서 조용히 쉬시오라는 말에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그날 밤 갑자기 소집 통고를 받고 나와 대기하던 공화당 의원들이 밤중에 제3별관으로 자리를 옮겨 야당 몰래 개헌안과 국민투표방안이 날치기처럼 변칙 통과되었다. 이때 국회의장 이효상은 의사봉을 준비하지 못해 국회 직원이 가져다준 물건으로 세 번 책상을 쳐서 안건을 통과시키게 되는데 이 물건은 바로 주전자 뚜껑이다.

이후 김종필, 이효상, 백남억, 이만섭 등 공화당 중진들은 “3선 개헌이 잘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하던 일을 마저 끝내기 위해서 한 번만 더 한다고 하니, 국민들은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다며 지역별로 나뉘어 유세에 나섰다.

19691017일 국민투표에서는 77.1%의 투표율에 찬성 65.1%, 반대 31.4%, 그리고 무효 3.5%로 개헌안은 확정됐다. 국민투표가 끝나자 박정희 대통령은 민심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조작정치의 실세로 불리던 이후락 비서실장을 주일(駐日)대사로 임명하고 김형욱은 그만두게 했지만 8대 때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불러왔다. 영구집권을 바라는 욕망의 토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승만 시절 초대 대통령 중임제한 철폐로 빚어진 참극과 이기붕, 3선 금지 철폐로 시작되는 참극과 이후락. 닮은 듯 닮지 않은 기록 속에는 기득권력을 추악하게라도 유지하려는 욕심이 가득 숨겨져 있다.

김종필, 이효상, 백남억, 이만섭 등 공화당 중진들은 “3선 개헌이 잘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하던 일을 마저 끝내기 위해서 한 번만 더 한다고 하니, 국민들은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다”며 지역별로 나뉘어 유세에 나섰다. 사진은 김 전 총리가 1963년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하는 모습. (사진_뉴시스)

 

혼전을 거듭한 신민당 대통령후보 경선, 김영삼의 깨끗한 승복

1969118, 3선개헌 반대 투쟁을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당시 김영삼(당시 42) 원내총무가 40대 기수론을 제창하며 제7대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196912, 후일 킹메이커로 불리기도 한 김윤환이 사십대 붐을 일으키기 위한 전략으로 김대중에게 접근하여 세대교체 운동에 동참하기를 요구하였는데 김대중은 자신의 목표는 75년 대통령 선거라며 지명전 참여를 거부한다.

1970122일 유진산은 대권 출마를 선언한다.

1970124일 김대중(당시 44)은 뉴서울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서겠다고 밝힌다.

1970125일 유진산은 후보 추천권을 대가로 불출마를 선언한다.

1970125일 신민당은 일단 총재 경선을 진행하여 유진산을 당수로 선출한다.

1970212일 이철승(당시 47)도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설 것을 선언한다. 뒤편에서 권력을 독점하면서 경쟁보다는 계파 간 협상을 통한 정치를 해온 원로들은 6월에 치르려던 신민당 전당대회를 9월로 연기한다.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누가 되든 계파정치를 일삼던 보수 야당 사상 초유의 이변이 예고된 것이다.

1970929일 서울시민회관에서 개최된 신민당 전당대회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경선으로 좁혀졌다. 재야 운동가이자 민주당 신파 리더로서의 명망이 높았던 이철승 후보는 당내 기반이 약해서 김영삼 후보에게 추천에서 밀렸다. 거기에 투표 직전 본인의 신상발언이 봉쇄되자 격분한 이철승계 대의원들은 모두 백지투표를 하고 만다.

그 결과 김영삼 421, 김대중 382, 무효 84표로 과반수인 443표 득표자가 없어 결선투표를 위해 40분간의 휴회가 선포되었다.

휴회 시간 중 김대중은 그 자리에서 당권과 대권의 분리와 아울러 이철승에게 당 대표를 넘기겠다는 내용을 자신의 명함에 서명과 함께 적어서 참모 조영하에게 건네주었다. 이철승은 곧바로 김대중 후보 지지로 선회하였다. 신민당 최대계파인 유진산계의 내부분열, 호남 출신인 유진산이 영남 출신 김영삼 후보를 지명에 반발한 이철승계와 이재형계의 반발, 타 후보가 위에서부터 다져놓은 조직을 밑에서부터 침투해 말단부터 포섭해 들어간 김대중캠프의 작전 등이 명함 한 장으로 폭발을 한다.

2차 투표결과 김영삼은 410, 김대중 458, 기타 18표로 김대중이 과반수를 넘겨 후보자로 선출되었다.

이철승이 김영삼에서 김대중으로 지지를 선회한 것을 두고 훗날 김영삼은 당시 그 둘 사이에서 나온 말이 우리가 남이여 시방?’이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후에 나돌게 되는 우리가 남이가?’와 함께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찝찔한 대사들이다.

경선에서 김대중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로 선출되자 구민주당 구파 출신들인 윤보선, 장준하, 박기출 등은 후일 신민당을 탈당하여 국민당 후보로 나서는 등 반발하지만 김영삼은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하고 신민당에 남아 김대중의 유세를 다니며 김대중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라고 확실하게 밀어주었다.

난전을 겪기는 했으나 신민당의 김대중은 1970929일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당선되면서 당시 대한민국에 불어 닥친 사십대 기수론이라는 전국적인 거센 돌풍을 이어가며 경선에 참여했던 김영삼과 이철승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일찌감치 선거전에 뛰어들며 박정희 정권에 무서운 대항마로 등장한 것이다.

경선에서 김대중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로 선출되자 구민주당 구파 출신들인 윤보선, 장준하, 박기출 등은 후일 신민당을 탈당하여 국민당 후보로 나서는 등 반발하지만 김영삼은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하고 신민당에 남아 김대중의 유세를 다니며 ‘김대중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라고 확실하게 밀어주었다. (사진_뉴시스)

 

박정희 정권을 위기의식에 빠뜨린 김대중 후보

1971427일 실시되며 후보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신민당의 김대중, 국민당의 박기출, 자민당의 이종윤, 정의당의 진복기, 중도사퇴한 통사당의 김철, 민중당의 성보경이 선거에 임한다.

박정희와 김대중의 맞대결 형태로 치러진 선거 결과 6342,828(득표율 53.2)를 얻은 박정희 후보가 5395,900(득표율 45.2)를 얻은 김대중 후보를 95만여 표차로 따돌리면서 간신히 대통령에 당선된다.

박정희는 경상도 지역에서 김대중보다 3배나 되는 표를 얻었고, 김대중 역시 전라도에서 박정희에게 2배가 넘는 표를 얻었으며, 농촌은 여당을 지지하고 도시는 야당을 지지하는 등 지역대결 득표와 여촌야도 현상이 나타났다.

여당의 유리함과 관권을 장악하고, 군부대의 표를 독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후보와 표차가 90여만 표에 불과할 뿐이고, 얼마 뒤 치러진 제8대 총선에서 신민당이 204석 중 89석을 획득하여 개헌저지선인 69석을 훌쩍 넘기자 박정희 정권이 느끼는 위기의식은 매우 심각해 상황으로 몰리게 된다.

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을 향한 초석을 닦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계기로 정권 장악력 강화를 위한 유신 개헌을 결심하게 된다. 선거 당시 김대중 후보는 박정희 후보가 3선에 성공하면 그 즉시 영구집권 제도를 시행하려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박정희 후보는 이번이 마지막 출마라며 다시는 국민 여러분 앞에 나와서 표를 달라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약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실제로 1년 뒤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영구집권 헌법을 제정하게 되는데, 이 헌법은 대통령이 국민들이 아닌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기관에 의해 간접 선거되게 되었으니 후에 사람들에게 두 후보의 말이 모두 맞아 떨어졌다는 조롱이 나오게 되었다.
 

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을 향한 초석을 닦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계기로 정권 장악력 강화를 위한 유신 개헌을 결심하게 된다. (사진_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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