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민정신으로 가열차게 ‘노력하는 천재임금, 세종’

[시사매거진 262호=취재_오경근 칼럼니스트 / 사진_이관우 기자] 햇살이 맑고 차가운 어느 겨울 하루, 우리시대 음유시인 정태춘이 부르는 ‘손님’을 들으며 ‘세종대왕릉(世宗大王陵)’이 위치한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를 찾아간다. ‘갑자기 누구라도 올듯하여 설레임 속에서 기다리는데, 스치는 바람결에 들려오는 외로운 나그네의 노랫소리.’ 그 음이 하도 단조롭고 간략하여 쓸쓸하게 고적감이 드는 ‘왕의 숲길’에서 애민정신으로 가열차게 ‘노력하는 천재임금, 세종’을 기려본다. 이곳은 큰 물줄기를 이루며 좌측 지척으로는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먼 원적산의 정기를 타고 산세가 용의 세력 같이 살아 꿈틀거리는 칭성산(稱城山) 허리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민족의 성군 ‘세종대왕(世宗大王)’과 혁혁한 북벌의 기상 ‘효종대왕(孝宗大王)’이 잠들어 있는 ‘영녕릉(英寧陵)’이 있다. 봄이면 울컥울컥 붉은 울음을 토해내듯 흐드러지게 피는 진달래가 아니어도, 우람하게 듬직한 백년송이 즐비하게 도열해 있어 한번쯤 걸어보고 싶게 만드는 신들의 정원 ‘왕의 숲길’이 포물선을 그리고 있다. (자료:박현주 학예사(문화재청 세종대왕유적관리소)) 

세종대왕 어진(왕의 초상화)은 1973년 운보 김기창 화백이 제작했다.

 

근래 세종대왕의 일생과 업적을 소재로 한 영화가 두어 편 개봉되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전 2008년경에도 86부작 드라마 <대왕 세종>과 2011년 24부작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가 제작되어 방송을 종영하기까지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다시 2019년 송강호 주연의 영화 <나랏말싸미>와 한석규 주연의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가 제작·개봉되었다. 세종대왕의 큰 업적인 ‘한글 창제’와 ‘천문기구 창설’을 중심으로 천민 출신의 괴짜 신미스님과 기생의 아들인 장영실의 인연을 재구성·극화 하였다. 단연 세종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과 측은지심 그리고 옥석을 가려 쓸 줄 아는 인재 등용관을 엿볼 수 있었다. 

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합장한 능이다.

 

민족의 성군, 세종대왕 ‘이도’는 누구?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손자이며 제4대째 왕위를 이어받은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1450)은 태종 이방원과 정비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휘(살아생전 이름)는 ‘도(祹)’이고 자는 원정(元正)이다. 또한 명나라에서 준 시호는 장헌(莊憲)이고, 조선에서 올린 시호는 ‘영문예무인성명효(英文睿武仁聖明孝)’이며 묘효는 ‘세종’이다.

1397년(태조 6) 4월10일 한성부 준수방에서 ‘정안군’이라 불리던 시절 이방원과 민씨 사이에서 이제(양녕대군)와 이보(효령대군)에 이어 셋째 아들 이도(충녕대군)로 태어났다. 이후 넷째 이종(성녕대군)과 더불어 4남4녀 8남매를 이룬다. 이후 아버지 이방원이 제3대 태종으로 왕위를 계승되자 1408년(태종 8) 2월11일 이도는 충녕군에 봉해지고, 같은 해 2월16일(양력 3월22일)에는 우부대언 심온의 딸과 결혼한다. 바로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 심씨(沈氏)다. 

그리고 다시 4년 후인 1412년 5월3일 충녕대군으로 진봉된다. 6년 후인 1418년(태종 18년)에는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됨에 따라 그해 6월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10일(양력 9월18일) 태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의 4대 임금으로 등극한다. 22세 약관의 나이로 즉위하여 치리하는 동안 아버지 태종이 4년간 상왕으로 생존하며 어려운 일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후 세종대왕은 1명의 정비와 9명의 비빈을 두었는데 그중 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와 5명의 비빈에게서 모두 18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낳았다. 모두 22남매다. 장남 이향은 제5대 문종이 되었고, 차남 이유(수양대군)는 조카 단종에 이어 제7대 세조임금으로 등극한다. 그리고 세종대왕의 정비인 소헌왕후는 1450년(세종 32년) 2월17일(양력 4월 8일) 여덟째아들인 이염(영응대군)의 사저 중 동쪽 별궁에서 운명한다.   

이러한 세종대왕은 재위기에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국가 전반적으로 기틀이 잡힌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를 배양했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와 제도를 정비했다. <고려사(高麗史)> <속육전(續六典)> <농사직설(農事直說)>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등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을 주도했으며 훈민정음 창제, 농업과 과학기술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법제 정리, 공법(公法) 제정 등 많은 사업을 통해 조선의 창업을 확고히 했다. 

혼천의는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던 천문관측기로 세종대왕 능 내에 모형이 있다.

 

노력하는 천재대왕, 세종의 ‘업적과 애민정신’

세종대왕은 1420년(세종 2년) 집현전을 설치하고 황희, 맹사성, 허조 등을 등용해 중앙집권 체제를 왕권과 신권(臣權)이 조화를 이루는 중앙집권 체제를 성립했다. 이어 1436년(세종 18)에는 의정부와 6조의 관계를 정비하였고, 집현전을 왕립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최항 등의 젊은 학자를 등용해 학문진흥을 꾀했다. 

1443년(세종 25) 집현전 젊은 학자들이 협력을 받아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였고, 3년간 검증 기간을 거쳐 1446년에 반포한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를 이용하여 유교경서, 의례서, 문학서, 훈민정음 관계서, 지리서, 농서, 역사서, 법률, 천문 등 여러 서적을 출간하여 출판문화의 전성기를 이룬다. 

불교정책에는 전통신앙을 소멸시키지는 않고, 부분적 억불정책을 써서 난립하던 종파를 교종(敎宗)과 선종(禪宗) 2종으로 통폐합했다. 또한 사찰은 종단 각 18개 총 36사찰만 인정하고, 도성 안에서의 경행(經行)이나 연등행사 등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말년에 궁중에 내불당을 짓고 승과제도와 경행을 인정하는 등 왕실 불교로 장려하였다. 

음악 분야에서는 1425년 관습도감을 설치하고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雅樂)을 정리하게 하여 음악을 장려하였다. 악기도감을 설치하여 많은 아악기들이 제조되었고, 편경과 편종을 대량 생산하게 되었다. 

또한 천문 역법 기상 분야에서는 1442년 이천, 장영실이 측우기(測雨器)를 제작하여 농사에 도움을 주었으며 궁중에 과학관인 흠경각(欽敬閣)을 설치해 과학기구를 비치하게 하였다. 천체 관측기구로는 혼천의(渾天儀), 해시계(앙부일구), 물시계(자격루) 등이 발명 제작되었다. 나아가 이순지 등이 천문, 역법, 의상 등에 관한 지식을 종합한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펴냈다.

또한 경제와 사회 분야에서는 1436년 공법상정소를 설치하고 각도의 토지를 3등급으로 나누어 세율을 정했다. 1443년 이를 보강하기 위해 전제상정소를 설치하고 풍작과 흉작에 따라 연분 9등법과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전분 6등법에 의한 수등이척법으로 조세의 공평화를 도모했다. 전국의 토지를 20년마다 측량하여 양안을 작성케 하는 반면 금속화폐 ‘조선통보’를 주조하였다. 그리고 의창, 의료제도, 금부삼복법을 제정하였고, 노비에 대한 지위 등을 개선하여 사형을 금하였다. 

이렇게 세종대왕은 정치, 경제, 국방, 문화 등 다방면에 훌륭한 업적을 남겨 우리 민족을 수준 높게 만들었으며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다졌다. 적절한 억불숭유 정책과 그 외 단군사당 봉사, 삼국의 시조묘 제사 등 민족의 역사와 뿌리를 소중히 여기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아울러 백성을 아끼는 애민정신으로, 백성의 소리를 듣는 데 온 마음으로 전심전력 했다. 

세종대왕 능 입구에 위치한 세종역사문화관에는 3개의 상설전시관과 1개의 기획전시실, 영상실, 카페, 수장고 등을 갖추고 있다.

 

여주의 지리적 이점과 왕릉(영릉)이 선택된 배경

‘영녕릉(英寧陵)’ 중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세종대왕과 정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최초이며 하나의 봉분 아래 현실을 둘로 둔 형태로 조성되었다. 동쪽은 왕후의 무덤이며 서쪽 방은 왕이 살아있을 때 미리 마련한 수릉(壽陵)이다. 

처음 강남구 내곡동에 위치한 헌·인릉 안 세종대왕릉을 1469년(예종 1)에 경기도 여주로 옮겨올 때 봉분 내부를 석실에서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조성하였고, 석물 중 망주석, 장명등, 석수, 석인은 단릉처럼 배치하였으나 혼유석만 2개를 설치하여 ‘합장릉’임을 나타내었다. 영릉은 조선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는 능으로, 무덤 배치는 <국조오례의>에 기록된 제도를 따랐다. 봉분 둘레에는 난간석을 두르고 횡석주를 받치고 있는 동자석주(童子石柱)에 한자로 12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다. 

무엇보다 세종대왕릉의 위치는, 풍수지리사상에 따라 주산인 칭성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으로 청룡과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세종대왕은 부왕인 태종의 무덤 곁에 있기를 원했고 승하 후 그의 유언에 따라 선왕이 잠들어있는 헌릉 서쪽에 묻혔었다. 그러나 최양선은 세종대왕릉을 옮기지 않으면 ‘절사손장사(후사가 끊기고 장자가 일찍 죽는다)’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문종과 단종, 의경세자(세조의 장남이며 성종의 아버지, 덕종추존)가 요절하자 적장자가 이어지지 않는 데 불안을 느낀 왕실에서는 예종 때 영릉을 지금의 여주로 옮기게 된다.   

세종대왕 능과 주변을 새롭게 단장하여 경내에 만든 세종대왕상

 

‘모란꽃봉오리 형상’의 명당과 세종대왕릉   

세종대왕의 장남인 문종과 장조카 단종에 이어 제7대 왕위를 계승한 세조는 장남인 의경세자가 일찍 죽자 신숙주, 한명회, 서거정 등을 시켜 영릉의 개장을 논의케 하였다. 그러나 서거정은 “천장을 하는 것은 복을 얻기 위함인데 왕자가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며 이장을 반대하여 옮기지 못했다. 

그러나 세조가 승하한 뒤 예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영릉의 천장 문제가 거론되었고, 예종은 1468년 노사신(盧思愼, 1427~1498), 임원준(任元濬, 1423~1500),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등을 파견해 여러 지역과 지리를 답사하도록 하였다. 그중 경기도 광주와 이천을 거쳐 여주를 답사하게 된 신하들은, 산천이 수려하고 강물이 맑은 여주 북성산에 올라 풍수지리를 살폈다. 

지세가 수려하고 모란꽃봉오리 형상의 명당이지만 이미 세조 때 대제학을 지낸 이계전(李季甸, 1404~1459)과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 1395~1463)의 묘가 있는 곳이라 쉽사리 결정을 하지 못했다. 다만 한양으로 돌아와 예종에게 “이계전의 무덤이 있는 곳이 자손이 번성하고 왕조가 흥할 땅이라며 왕릉을 모실 장소로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고 보고하였다. 

이후 예종은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이인손의 맏아들 이극배(李克培, 1422~1495)를 불러 무덤 자리를 비워 달라는 뜻을 비쳤고, 이에 이극배는 가문과 상의한 후 무덤 자리를 내놓았다. 예종은 이에 대한 사례로 이극배를 의정부 우참찬(정2품)으로 승진시키고 세종대왕릉을 지금의 자리로 이장해 소헌왕후와 합장릉을 이루었다. 

또한 이극배의 집안에서도 이장을 위해 산소를 허물고 유해를 발굴하다보니 “이 자리에서 연을 날리어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바람에 날리어 연이 떨어지는 곳에 묘를 옮기어 모셔라”는 예언서를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예언서대로 연을 바람에 날리어 서쪽으로 3.927km(10리) 밖으로 떨어진 자리에 이장을 하였다. 이후 자손이 번성하여 마을 이름을 연주리로 명명하였다. ‘연이 떨어진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로 인해 ‘세종대왕릉을 여주 영릉 자리로 이장하였기에 조선왕조가 100년은 더 연장되었다’는 의미의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는 속설이 회자되었다. 영릉의 형국은 신하가 부복한 형상으로 북성산의 산세가 영릉을 향하여 북으로 달리다가 다시 한줄기 봉우리가 솟으면서 남으로 머리를 돌려 주산(主山)인 칭성산을 감싸고 끊어진 형세를 이루어 마치 꽃봉오리를 에워 싼 듯한 ‘모란반개형(牡丹半開形)’의 명당이다. 

 

여흥 민씨의 본적지, 여주의 한국사  

여주(驪州市)는 한반도 중앙부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강원도 원주와 충청북도 충주, 남서쪽으로는 이천, 서쪽으로는 광주, 북쪽으로는 양평군과 접경을 이룬다. 무엇보다 여주를 관통하는 남한강의 흐름은 수운에 유리하여 미곡집산지로 발전시켰다. 또한 수도에 있는 정궁이자 법궁인 경복궁과 여주를 잇는 물길이 되어 한양 100리길을 앞당겼다. 

과거 백제 22년(온조왕 40)부터 214년(구수왕 1)까지는 술천성이 있던 군사적 요충지였던 여주는 장수왕 때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여 골내근현이 되었다가 신라 진흥왕 때에는 잠시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그리고 660년(무열왕 7) 천녕군(川寧郡)에 술천성을 축조하였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는 황효라 불렸고 기천의 영현으로 되었다.    

고려 태조 때 황려현으로 개칭되었다. 1018년(현종 9) 강원도 원주에 이속되었다가 1031년에 다시 경기도로 귀속되었다. 고종 때에 영의로, 충렬왕 때 여흥으로 개명되었다가 다시 군으로 승격되었다. 우왕 때 군에서 부로 승격되어 황려라 불리다가 공양왕 때 다시 여흥군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조선 제3대 태종의 정비인 원경왕후의 내향(본적지)으로 다시 부로 승격되었고 1413년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예종 때 세종대왕의 영릉이 이장되면서 천령현이 폐지되어 ‘여흥’에 병합되면서 목으로 승격되었다. 원경왕후가 ‘여흥 민씨’이고, 고종의 정비인 명성황후가 ‘여흥 민씨’다. 바로 본관 여흥이 여주이다. 1914년 원주군의 지내면과 서면이 편입되어 강천면이 되었고, 주내면이 여주면으로 개칭되었다. 1941년 10월 1일 여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오늘날 ‘여주’라는 지명은 고려시대 황려(黃驪)라는 지명의 누루 황(黃)을 순우리말 ‘느루(늘은, 늘어난)’라는 뜻으로 보고, 검은말 려(驪)의 ‘검’을 순우리말 ‘곰(크다, 미련하다, 웅장한)’에서 파생된 단어(감, 검, 굼, 금)로 보아 “늘은 큰 마을(확장된 큰 고을)”이 아닌가 추측이 된다고 여주문화원에서 발간한 <여주고을 땅 이름의 유래>에서 밝히고 있다. 

이 외에 여주에는 세종천문대, 세종국악당, 세종전, 신륵사지, 어우실지, 명성황후 생가와 기념관, 명성황후 조각공원, 목아박물관, 서봉서원, 세계생활도자관, 여주도요단지, 여주박물관, 여주시립폰박물관, 한얼테마박물관, 해여림식물원 등이 있어 두루두루 가족과 함께 관람할 수 있다. 

저작권자 © 시사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