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아래 아름다운 고을 ‘강화도’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

고려궁궐터 내에는 조선 정조 때 왕실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외규장각이 복원되어 있다.

 

[시사매거진261호=오경근 칼럼니스트 / 사진_이관우 기자) 한반도 서쪽에 위치하며 교동도와 석모도를 좌측에 둔 강화군(강화도)이 한강과 서해 수로인 강화만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개성특급시남한의 인천광역시라는 한반도 분단의 마지막 서쪽 경계를 이룬다. 3·8선의 남북 경계선이라는 지리적 특성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는 고려의 수도 개성과 조선의 수도 한양이라는 정치적 세력의 경계선이기도 하다. 그런 강화도는 한강을 비롯해 임진강과 예성강 등 여러 강을 끼고 있는 아랫고을이라고 하여 강하(江下), 바다의 입구를 뜻하는 해구(海口), 샘의 입구를 뜻하는 혈구(穴口)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태조 왕건 때에는 강 아래 아름다운 고을을 뜻하는 강화현(江華縣)으로 편제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연결된 인천·경기 수도권에서 가장 가까운 섬으로 손꼽힌다. 또한 이곳은 원래 김포반도에 이어진 내륙의 일부였으나 오랜 침강운동으로 바닷물에 쓸려 구릉성 섬으로 떨어져 나와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이 되었다. 남쪽에 민족의 성산인 마니산(469m)이 있고 그 꼭대기에는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참성단(塹星壇)이 있다. 무엇보다 이곳 강화도에는 조선시대 제25대 임금인 강화도령 철종의 생가가 있고, 고려시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국서·외교문서 집필자인 백운거사 이규보가 잠들어 있다.

서울에서 88올림픽대로를 타고 여의도를 지나 서김포·통진IC까지 직진한다. 이곳에서 48번 국도를 타고 마송택지개발예정지구가 있는 통진읍을 지나 강화대교를 건너면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 갑곶돈대가 위치한 갑곳리다. 강화병원이 있고, 강화산성남문 곁에 강화군청이 있다. 그리고 강화읍사무소를 지나 북쪽으로 조금 더 달리면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강화읍 관청리743-1)강화고려궁지가 위치해 있다. 자동차로 약 40여분 소요된다.

강화고려궁지는 고려 고종 19(1232)에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무신정권의 최고 집권자인 최우의 권유로 개성 송도에서 천도해 강화도에 수축한 궁궐이다. 고려 원종 11(1270)에 개성으로 다시 환도할 때까지 38년 동안 고려의 수도 역할을 담당했다. 현재는 국가사적 제133호로 지정돼 있다.

갑곶돈대는 사적 제306호로 1679년(숙종5년)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방어시설이다.

 

최씨 무신정권의 집권자 최우 & 고려 최고 문신 이규보

삼국시대 <대동지지>에는 강화도가 처음에는 백제의 갑비고차현으로 기록돼 있었다. 이후 고구려가 남하정책을 실시해 중부지방을 점령하고 나서 혈구군(穴口郡)으로 개칭되었다가 통일신라 때는 해구군(海口郡)으로 바꾸어 지금의 경기광주 지역인 한주에 예속시켰다. 그리고 고려태조 왕건 초기에는 하음현으로 개칭하였다가 왕건 말기인 23(940)경에는 다시 강화현(江華縣)으로 개칭했다.

이후 1232년 몽고가 고려를 침입해 오자 최씨 무신정권의 제2대 권력자인 최우의 권유로 궁궐을 천혜의 요새인 강화도로 옮겨 지군사로 승격시켰다. 1270년 개성으로 환도하기까지 38년간 고려의 수도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강화도는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등을 평정하고 무소불휘의 무신정권을 장악한 아버지 최충헌의 뒤를 이은 최우에 의해 최고 전성기를 누린다. 고종에서 원종까지 고려의 임금들이 강화도에 거주했고, 최우는 개성 자택에 정방을 두어 인사권을 휘두르는 세도를 누렸다.

초기에는 아버지가 축재한 금은보화 등을 고종에게 바치고 부당하게 탈취했던 토지와 재산을 백성에 돌려주었으며, 청렴한 학자를 등용하고 권신에게 아부하던 관리 등을 유배보내기도 했다. 자주 금품을 요구하는 몽골 사신을 냉대하고, 북변의 여러 성과 개경의 황라성을 수축했으며 몽골의 침입에 대처하는 지혜가 있었다. 일종의 문무를 모두 갖춘 엘리트 무인이었다. 그러나 그도 30년 누리던 정권 말기에는 권력자 특유의 전횡을 자행하여 백성의 원성을 샀다.

이 때 등장한 고려 최고의 문장가가 바로 이규보(李奎報). 그는 의종 220(1168)에 여주에서 출생해 고종 28(1241)에 강화도에서 숨을 거두었다. 어려서부터 시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영웅서사시 <동명왕편>을 지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특히 최씨 무신정권의 권력자인 최우의 비호 아래, 국서와 외교문서를 작성해 외국에 보낼 정도로 학문과 학식이 뛰어났으며 한국 문학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문인이다.

산승이 달빛을 탐하여(山僧貪月光) / 병 속에 물과 함께 길어 담았네(甁汲一壺中) / 절에 다다르면 바야흐로 깨달으리라(到寺方應覺) / 병 기울이면 달빛 또한 텅 비는 것을(甁傾月亦空)’ 물에 비친 달빛조차 공허하게 여길 정도라 그의 시적 인식은 감탄사를 자아낸다. 저서로는 <동국이상국집> <국선생전>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일대기를 다룬 동명왕편등이 있다.

강화 고려궁궐터(고려궁지) 입구에는 사적 제133호 승평문이 있다.

 

병자호란 국치 & 강화도의 파란

1413년 조선시대에 강화도는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가 일시 몽진하는 피난처가 되었다. 이후 다시 환도하여 유수부로 승격되었다. 이어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강화성이 함락되어 청나라와 반강제적인 협약을 맺었다. 숙종 때에는 53개의 돈대를 설치하고, 강화의 내성과 외성 등을 축조하여 방비를 굳게 하였다.

그러다가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프랑스 함대가 강화성을 함락하여 약 1개월간 머물렀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에는 미군 함정이 잠시 초지진과 덕진진, 광성보를 함락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1876년 운요호사건이 일어나 일본과 강화에서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거대한 서양의 세력이 침범하는 창구로써 파란 많은 세월을 겪었다.

1895년 지방제도 개편에 의해 강화군으로, 다시 1896년에는 강화부로 바뀌었다가, 1906년에는 원래대로 강화군이 되었다. 또한 1995년에는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인해 현재의 인천광역시에 통합되었다. 한편 1970년 강화대교와 2002년 초지대교의 개통으로 인천·경기 수도권에 연결된, 가장 가까운 섬이 되었다.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강화 부근리 고인돌은 200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민족의 신령이 깃든 마니산 참성단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참성단 제단이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마니산에 위치한다. 고려 원종 11(1270)에 보수했으며, 조선 인조 17(1639)과 숙종 26(1700)에 다시 고쳐 쌓았다. 이렇게 여러 번 고쳐서 쌓았기 때문에 고려시대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나 오늘날까지 선녀들과 함께 천신제를 지내고 있다.

참성단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쌓은 하단과 네모반듯하게 쌓은 상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둥근 하단은 하늘, 네모난 상단은 땅을 상징한다. 마치 경주의 첨성대와 비슷하다. 고려와 조선 왕조는 때때로 이곳에서 도교식 제사를 거행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조선 후기에는 단군왕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참성단을 신성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고 1909년 일제강점기 때는 나라를 잃은 백성들이 설움을 호소할 길 없어 이곳에 모여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를 일으켰고 민족의 신령이 깃든 성지로 추앙하게 된다. 지금도 해마다 개천절의 제천행사를 강화도에서 거행되고 있으며, 전국체전의 성화 역시 참성단에서 발화해 옮겨가고 있다. 단군왕검과 더불어 상고시대 풍습이 전해내려 오는 강화도는 원시시대 정치의 원형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문화적 행사를 가지고 있으며 축소된 한반도 역사를 살펴볼 수 있어 1977년 마니산이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1656년(효종7년)에 구축된 초지진은 신미양요와 운요호사건 등의 격전지이다.

 

고대인의 무덤 부근리 고인돌

강화역사박물관이 위치한 외부는 고인돌공원이 조성돼 있다. ‘돌을 괴다’ ‘돌을 고였다고 해서 붙여진 고인돌은 한자로 지석묘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세계의 거석문화를 대표하는 역사적 유산이다. 대략 3000년 전으로 추정된다. 특히 한반도의 고인돌은 전 세계에서 밀집도가 약 40% 분포하며 매우 높은 수치를 자랑한다. 남한과 북한의 고인돌을 모두 종합하며 대략 4만기 이상 된다.

2000년 강화도의 고인돌은 전북 고창과 전남 화순의 고인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특히 강화도에는 주로 고려산 기슭에 100여 기가 넘는 고인돌이 흩어져 있다. 고창이나 화순의 고인돌에 비하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이 최고 오래된 유물로 불린다. 이 고인돌은 2개의 고임돌 위에 덮개돌이 덮여 있는 전형적인 북방식이다. 그 모습이 탁자를 닮아 탁자식 고인돌이라는 별칭도 있다. 7.1m 길이에, 2.6m 높이다. 덮게돌 무게만 50여 톤에 이르는 초대형 고인돌이다.

이러한 고인돌은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이 있다. 그중 탁자식 고인돌은 무덤방이 땅 위로 노출된 형태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도굴되고 훼손되어 일부만 전래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부근리 고인돌은 현재 2개의 고임돌과 1개의 덮개돌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4개의 고임돌로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어 총 5개의 거대 돌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일부가 사라지고 3개만 남은 형태로 위엄이 가득한 모양이 위풍당당해 사적 제137호로 지정되어 있다.
 

광성보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대항하기 위해 강화로 천도한 후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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