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의원내각제 기반의 헌정체제 제2공화국

[시사매거진 260호=이회두 기획편집국장] 우리나라의 서해를 중국에서 바라보면 동해라고 말한다. 어디에 서서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같은 대상을 동과 서라는 상반된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상황을 ‘판단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평가하기도 한다. 같은 사건이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좋다 나쁘다의 식으로 극과 극으로 나뉘게 된다.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도 관점의 차이가 극명하다. 몇 마디 단어로 그분들의 공과를 표현하기는 어려운 일이기에 선거와 관련된 객관적인 자료들을 통해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를 정리해본다.

(사진_뉴시스)

제2공화국(第二共和國)은 1960년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된 후, 제1차 과도 권한대행 체제(1960년 4월 27일~6월 14일)를 거쳐 6·15 개헌으로 성립되어 1961년 5월 16일까지 불과 11개월간 존속했던 대한민국의 두 번째 공화 헌정체제이다. 제2공화국 체제는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의원내각제 기반의 헌정체제이다. 

4·19 혁명은 지금까지도 악명 높은 3·15 부정선거에 대한 항거에서 시작되었다. 제4대 국회의원선거를 준비하기 위해 제출된 국회의원선거법 개정안은 여야가 80여 차례의 협상을 걸쳐 민의원 의원선거와 참의원 의원선거를 분리한 여야협상선거법으로 1958년 1월 25일 민의원 의원선거법으로 공포되었다.

그 사이 1958년 1월 13일 진보당의 조봉암 등은 명화통일 주장이 국가보안법에 위반된다는 죄목으로 구속되고 진보당은 등록이 취소되어 해산되는 일이 발생한다. 

같은 해 10월 2일 대구시장 선거에서 민주당의 조준영 후보가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당선하면서 이승만 정권, 특히 이기붕 당시 부통령에게 위기의식을 강하게 심어준다. 

자유당 정권연장을 위해 도가 넘는 권력의 힘이 남용되기 시작했다. 1958년 12월 24일, 언론을 통제할 목적의 보안법을 야당의원들을 지하실에 감금시킨 상태에서 통과시킨 ‘二四波動’ 사건이 벌어진다.
 
동시에 직선으로 선출하게 되어 있던 시·읍·면장을 모두 임명제로 바꾸고 의원의 임기 3년을 4년으로 연장하여 대통령 선거 때까지 유지하도록 하는 지방자치법의 4차 개정안을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관권선거를 향한 밑그림이 그려진 상태에서 자유당은 6월 29일 전당대회에서 정·부통령후보로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명한다.

일찌감치 선거 구도를 잡아가는 여당에 비해 야권은 계파, 정당, 특히 민주당 신구파들이 폭력 사태까지 벌이며 극심한 분열양상을 보이며 끝없는 소모전을 벌인다. 민주당은 11월 전당대회에서 가까스로 구파의 조병옥이 대통령 후보로, 신파의 장면이 부통령후보와 당대표 최고위원으로 각각 선임한다. 

1958년 12월 24일, 언론을 통제할 목적의 보안법을 야당의원들을 지하실에 감금시킨 상태에서 통과시킨 ‘二四波動’ 사건이 벌어진다. 동시에 직선으로 선출하게 되어 있던 시·읍·면장을 모두 임명제로 바꾸고 의원의 임기 3년을 4년으로 연장하여 대통령 선거 때까지 유지하도록 하는 지방자치법의 4차 개정안을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관권선거를 향한 밑그림이 그려진 상태에서 자유당은 6월 29일 전당대회에서 정·부통령후보로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명한다. (사진_뉴시스)

민주당의 조병옥이 이듬해 월 미국으로 신병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자 자유당은 선거 실시를 예년보다 앞당겨 3월 15일에 실시할 것을 결정해 버리고 2월 3일 발표한다. 

가뜩이나 분열된 야당으로서는 선거준비가 촉박해 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0년 2월 15일 하와이에서 신병치료를 하고 돌아오는 도중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갑자기 사망한다. 

3대 선거에서는 신익희 선생이 유세 중 선거 직전 사망하여 수월하게 선거에서 이긴 이승만, 4대 선거에서도 민주당의 조병옥이 선거 한 달 전 사망으로 이번에는 단독후보가 되었다. 

이런 사정으로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의 낙승이 예상되었지만, 1956년 부통령선거에서는 4,012,654표를 얻은 민주당의 장면이 3,805,502표를 얻은 이기붕을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된 것처럼 여전히 이기붕은 당선이 불확실하고 장면의 당선이 확실시되고 있었다. 

권력 남용의 비극, 국정농단의 원조, 3.15 부정선거
1960년 8월 15일에 실시된 4대 대통령 선거를 말하려면 국정농단의 원조 격인 박마리아와 그녀의 남편 이기붕에 의해 저질러진 3.15부정선거를 빼놓을 수 없다. 

3.15부정선거의 중심에 있는 이기붕 부통령후보는 한국전쟁사에 일어난 가장 참혹한 사건 중에 하나인 ‘국민방위군 사건’ 때 이승만에 의해 국방부장관에 임명된 자로 자신의 아들을 이승만의 양자로 보낼 만큼 이승만에게 충성을 바친다. 

이기붕의 부인인 박마리아는 1951년 6월 이기붕의 국방부장관 취임을 빌미로 미국대사, 미8군 부사령관 등을 초대하여 자신의 제자들인 이화여대 학생들을 불러 팝송을 부르게 하기도 하고, 이승만이 호출하는 인사들을 조정하는 등 야심이 가득한 여자였다.

이기붕과 자유당은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 조작을 계획한다. 선거 조작을 위한 내용을 보면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저열하기 짝이 없다.

  • 정부로 하여금 공무원을 통한 선거 운동망을 조직한다.
  • 전국 경찰에 지시하여 이를 감시, 독찰하도록 한다.
  • 정치 깡패를 동원한다.
  • 공개 투표를 계획한다(예: 사람들이 단체로 지나가면 정부의 지원을 받은 이들이 그들에게 “자유당인 거 잊지 마라” 등의 말을 하는 것).
  • 완장 부대를 활용한다(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누구 찍어야 하는지 알지” 따위의 말로 자유당에 한 표를 던지라고 협박하는 것).
  • 투표가 시작되기 전에 자유당에 한 표를 던진 가짜 투표용지를 무더기로 집어넣는다.
  • 야당 참관인은 투표하는 장소에서 추방 시킨다. 

실제로 깡패들과 경찰까지 동원하여 선거 전날인 3월 14일 모든 투표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이 찍혀 있는 위조 투표지를 무더기로 집어넣었다.

국립 4.19민주묘지에 전시된 김주열 열사. 4·19 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 선거에 항의해 조직화하지 않은 학생들이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으로 김주열 군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시체로 발견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됐다.(사진_뉴시스)

또한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기도 하고 야당성향의 사람에게는 투표용지를 아예 주지 않고 자기 측 사람에게 투표용지를 20장까지 주는가 하면 자유당 당원들이 기표소까지 들어가 자유당을 뽑는지 아니면 야당을 뽑는지 감시하기까지 하는 등의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동사무소에는 내 표를 달라는 사람들이 줄을 잇기도 했다고 한다. 

온갖 부정으로 얼룩진 3.15선거의 개표를 해보니 투표자 수가 유권자 수보다 많은 경우가 발견되기도 하고, 이기붕의 득표율이 100%에 육박하는 당황스러운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투표함을 불에 태우는 등 웃지 못 할 방법으로 감표 작업을 벌여 이기붕을 79.2%로 당선시킨다.

정부는 3.15부정선거 규탄을 무마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에 나서지만,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귀가하는 도중 정치 깡패들에게 학생 2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으며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발견된 김주열 열사의 주검은 온 국민을 분노케 하고 4.19혁명을 촉발시킨다. 

4월 25일 교수시위가 터지는 등 국민의 저항이 거세어지자 이기붕은 24일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은 매카나기 주한 미국 대사와 매그루터 유엔사령관을 만난 후 26일 오전 11시 하야성명을 발표했다.

4월 28일, 온 국민의 저항을 피해 경무대에 숨어있던 이기붕과 그의 가족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승만에게 83세 선물이라며 양자로 바쳤던 장남(당시 육군소위)의 손에 의해 최후를 맞게 되고, 이승만은 이화장으로 옮겨간 뒤 하와이로 망명하여 91세에 생을 마친다.

이승만과 이기붕. 3.15부정선거의 중심에 있는 이기붕 부통령후보는 한국전쟁사에 일어난 가장 참혹한 사건 중에 하나인 ‘국민방위군 사건’ 때 이승만에 의해 국방부장관에 임명된 자로 자신의 아들을 이승만의 양자로 보낼 만큼 이승만에게 충성을 바친다.

 

제4대 대통령 선거
3.15부정선거로 인해 선거결과가 무효화 되자 8월 12일 개정된 선거법에 따라 국회에서 민의원과 참의원들의 간접선거로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이 선거에는 12명이 후보로 나서나 윤보선 후보가 208표를 얻어 무난히 당선되었다. 윤보선 후보의 압도적인 당선은 민주당 내의 합의에 따른 결과였다. 

민주당 신파의 안은 대통령은 윤보선, 국무총리는 장면을 밀었고, 국회 내에 다수 의석을 점한 구파는 애초에는 대통령은 김도연, 국무총리로 윤보선을 주장하다가 선거 10시간 전에 대통령에 윤보선, 국무총리에 김도연을 확정하였고 윤보선이 무난히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그런데 총리로 지명한 김도연에 대한 투표는 찬성 111표, 반대 112표, 기권 1표로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부결되었다. 윤보선 대통령은 자신의 최측근 참모인 유진산과 김도연의 최측근 참모인 소선규 카드를 고려하기도 하였으나 정치 도의상 구파와 함께 자신을 지지해 준 신파의 장면을 총리 후보로 지명한다.

신파인 장면 후보에 대해 구파는 전력을 다해 부결시키고자 하였으나 총 유효득표수 225표 중, 찬성 117, 반대 107, 기권 1로 정족수를 채우고 총리에 선출된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나타난 민주당 신·구파 간 갈등은 분열로 이어져 민주당 구파는 자체적으로 신민당을 창당하고, 집권자들의 정치력은 허공을 휘젓는 혼란과 갈등 상황이 이어진다.

급작스런 해방과 황무지와 같은 상황, 이어진 전쟁을 겪으며 도입되고 개정된 선거제도는 제1공화국 시절 참담한 실패의 역사를 남겼다면, 권력의 폭압에 맞서 피 흘리며 국민이 집권시킨 민주당은 1년도 채 못가 군사 정변에 의해 무너지고 말아, 이래저래 제2공화국도 슬픈 역사로 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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