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 그냥 서 있으면 땅이지만 걸으면 길이 된다”

지휘자 여자경 ©구본숙 작가 

[시사매거진=강창호 기자] 요즘 인기 드라마들이 많지만 모 드라마에서의 대사가 매우 인상적이다.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으면 땅이지만 걸으면 길이 된다” 바로 JTBC 드라마 ‘나의 나라’ 중 이성계의 대사이다. 드라마 중엔 더 멋있는 말들이 많았지만 유독 이 대사만큼은 귓전에 머문다.

이처럼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어서 길을 만드는 음악인이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여성 지휘자들이 활동을 펼쳐 왔지만, 꾸준한 성장을 이루며 많은 곳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사례는 좀처럼 보기 드물다. 그렇다고 그가 지금 아주 유명한 스타가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활동량만큼은 그 누구보다 스타 이상이다. 특히 요즘 들어 더 바쁜 계절을 보내고 있다. 이것은 분명 그만이 가진 독특한 재능 때문이리라.

바로 여자경 지휘자의 이야기이다. 그의 손길이 지나가는 오케스트라는 소리가 잘 정리정돈 된다는 후문이 있다. 이 말은 수십 명 내지 백 여 명 가량 되는 개성 강한 연주자들이 모인 오케스트라를 하나의 하모니로 정리한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오케스트라를 하나의 악기로 봤을 때 피아노처럼 소리를 잘 조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저음역과 중음역 그리고 고음역대의 비율과 소리의 톤 컬러 등 이처럼 안정된 이퀄라이징을 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지휘자의 능력이기에 그렇다. 좋은 귀와 스코어에 대한 분석능력 그리고 단원들을 화합시키는 리더십까지 마치 오케스트라는 하나의 나라와도 같다. 그러기에 지휘자의 능력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순간 그 오케스트라는 통제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다. 이런저런 상황을 두고 여자경 지휘자를 생각해 보면 그의 음악적 재능과 리더십이 남다르다는 것쯤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참 흥미로운 것은 그는 그 흔한 음악 조기교육조차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의 집안에는 음악과 관련된 사람이 전무하다. 홀로 그 혼자만이 유일하게 음악과 관계가 있다. 비록 음악가 집안은 아니었지만 단지 음악이 좋았다는 것, 그래서 늘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는 음악이 유일한 친구였다고 한다. 학교에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그리고 교회에서 오르간과 피아노 반주자 활동을 통해 항상 음악 안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갈증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가족들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입시를 준비하며 음악에 대한 열정과 꿈을 키워 갔다고 한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부모님의 반대로 음악가의 길을 일찍 시작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지금 제일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으니 너무나 감사하죠, 다시 태어나도 똑같은 결정을 할 것 같아요”라며 미소를 지었다.

지휘자 여자경 ©구본숙 작가

메이저인가 마이너인가? 나의 길 “My Way”

숨가쁘게 달려온 2019년 한 해 동안 그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연주를 소화해내는 지휘자 여자경의 연주 이력이 흥미롭다. 그는 과거 빈국립음대 시절 이후 유럽에서 빈 라디오심포니오케스트라, 프랑스 부장송 시립오케스트라, 파리리옹 국립오케스트라 등을 지휘하였고, 국내에서는 2009년, 14년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에서 KBS교향악단, 프라임필과 참여하여 큰 호평을 받았다. 이 외에도 서울시향, 코리안심포니, 울산시향, 대구시향, 제주도향, 수원시향, 광주시향, 충남교향악단, 한경필하모닉오케스트라, 디토오케스트라 등의 정기연주회와 특별음악회를 객원지휘 하였고 예술의전당에서 기획하는 공연들과 언론사가 주최하는 공연에도 정기적으로 초대받고 있으며 2014년도부터는 매해 IBK기업은행이 주최하는 '참 좋은 음악회'에 KBS교향악단과 함께 참여하였다. 2017년 10월에는 25년 만에 한국을 국빈 방문한 미국 대통령의 초대 공연을 KBS교향악단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연주하여 언론으로부터 이슈가 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언론에서 함께 연주하고 싶은 지휘자로 소개되고 있으며 유럽과 아시아를 비롯하여 국내 여러 오케스트라로부터 꾸준히 초청받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성 지휘자로서 많은 인정을 받고 있다. 이렇듯 여자경의 연주 활동에 대한 스펙은 가히 메이저급이라 할 수 있다.

“일에 욕심이 많아 예전에는 많은 연주를 하는 데에 치중했던 것 같아요. 좋은 오케스트라와 함께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연주하고 싶어 했지요. 그러면서 너무 많은 연주와 일들로 몸을 혹사하다 보니 한동안 건강 상태가 안 좋아져서 고생을 좀 했지요. 몇 달을 치료받고 건강을 회복하면서 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어요. 앞으로 제가 나아갈 길에 대해 되짚어 보게 되었죠. 화려한 스타성 지휘자의 길과 비록 평범할 수는 있지만 내가 좋아하고 보다 많은 사람과 음악을 공유할 수 있는 소박한 꿈(?)이라는 두 갈래 길에서 신이 제게 부여해주신 재능을 어떻게 하면 기쁨 가운데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여러 번민이 있었어요. 결국 여러 고민 끝에 내 가슴이 향하는 길, 내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My Way’라고 하는가 봐요”

지휘자 여자경 ©구본숙 작가

“시그니처 음악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후 수많은 오케스트라와 함께 많은 연주가 있었지요. 그들과 함께 공연을 준비하며 무대에 올리기까지 여러 연습 과정들을 통해 수준을 끌어올려야 하는 일들이 많았어요. 제게는 힘든 리허설 과정들이었지만 연주 날까지 오케스트라와 합을 맞추는 시간 속에서 뭔가 새로운 에너지와 희열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오케스트라는 결국 지휘자에 의해 더 발전하고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경험도 그때 많이 하게 되었죠”

“그래서 저에게 찾아오는 연주, 오케스트라 그 안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의 교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요. 포디엄 위에 서 있는 지휘자는 아무래도 많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니까요”

그는 노래가 좋고 오페라가 좋아서 지휘자를 꿈꾸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오페라를 지휘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그래서인지 가장 최근엔 순천문화예술회관에서 10여 일간 오페라 <카르멘>을 성황리에 마쳤다. 좋아하는 작곡가로는 베토벤, 브람스,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라벨, 드뷔시, 스트라빈스키,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꼽았다. 그들의 음악을 좋아하고 연주하기를 선호한다고 한다. 내년 2020년은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어서 세계적으로도 베토벤 축제의 해이다. 여자경 지휘자의 베토벤 연주도 기대가 된다. 마지막으로 그는 “여러 장르의 음악들이 있지만, 오페라를 연주하던, 대규모의 심포니를 연주하던 결국 오케스트라 안에서 깔끔하고 적합한 앙상블을 끌어내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 일을 하는 데에는 확실히 자신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라며 그는 환한 미소와 함께 자신감을 내비쳤다.

포디엄 위에선 포효하는 사자처럼 지휘자로서 리더십을 발휘하지만, 일상에선 평범한 삶을 추구한다. 태풍이 대기를 정화하듯 한때 그에게도 힘든 일과 한국 클래식계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상처도 많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그에게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오케스트라를 마주했을 때이다.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 새로움을 향한 창조는 그가 멈춰있을 때가 아닌, 두려움을 걷어내고 목표를 향해 조용히 한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그리고 그의 걸음은 마침내 하나의 길이 되었다.

지휘자 여자경 ©구본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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