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과 진천…‘천년 농다리가 있는 진천’에 서인영수로서 정철의 넋 기리다

[시사매거진259호=오경근 칼럼니스트]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를 논하자면 당연히 송강 정철을 으뜸으로 손꼽는다. 그를 빼놓고서는 당대 국문학과 한문학을 아울러 평론하기 어렵다. 그는 조선중기 인조와 명조, 선조에 이르기까지 3대 임금이 치리하는 동안 왕실의 외척으로서, 정치가로서, 문필가로서 당당히 제 위치를 점유한 인물이다. 또한 국문학사에 빛나는 큰 업적과 더불어 숱한 파란을 남긴 그는 그 시대 자연적, 사회적 환경과 더불어 임억령, 김인후, 송순, 기대승과 같은 호남 사림의 여러 학자 사우(師友)들의 문학적 영향을 답습한 외에 <삼현수간>의 주인공인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의 신망도 두텁게 쌓고 있는 천재적 예술가다. 그런 그가 조상들이 묻힌 경기도 고양과 부친의 정치적 세거지였던 전남 담양을 떠나 이곳 충북 진천에 묻혀 묘소를 남기고 있다. 멀고 먼 길을 돌아 살아서 살기 좋은 생거진천(生居鎭川)’에 죽어서 묻힌 까닭이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가을이 깊어가는 이 계절에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진천의 농다리를 찾아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옮기며 송강 정철의 인생을 되물어본다.

정송강사는 정철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충청북도 기념물 제9호이다.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에 있던 묘를 현종6년(1665년)에 송시열이 이곳 진천군 문백면 송갈로 523으로 옮겨오며 사당을 지었다.(사진_이관우 기자)

 

가을 옷깃을 세우게 만드는 찬바람과 더불어 청명하게 드높아가는 가을하늘을 마주보며 서울에서 출발해 진천으로 향한다. 성남과 수원을 관통하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안성JC에서 새로 뚫린 평택제천고속도로로 접어든다. 거기서 다시 30여분 달려 진천군 광혜원면에 위치한 북진천IC를 만나면 삼족오 발가락 모양의 장양교차로가 나온다.

그곳에서 또 다시 중산대교를 건너면 직진해서 곧은 대로로 진천군청에 가닿는다. 이곳에서 17번 지방도로를 타고 내려가면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문백면 봉죽리에 <정송강사>가 위치해 있다.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의 시혼을 기리며 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현재 충북 기념물 제9호로 지정돼 있는 이곳은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에 있던 묘를 현종 6년인 1665년에 송시열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사당을 지은데 근거한다. 전형적인 사우의 건축 방식을 따라 홍살문을 거쳐 외삼문, 내삼문, 사당이 일곽을 이루고 있다. 특히 홍살문 앞 동남쪽에는 신도비가 있고 박공지붕(맞배지붕) 형의 외삼문인 문청문 앞 서쪽으로는 송강정철선생시비가 있다.

그리고 외삼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송강기념관>이 건립돼 있으며, <정송강사> 입구에 있는 보호수 느티나무도 400년에 이르는 세월의 위상을 자랑한다. 두엄 흙 모양의 흑갈색 토지가 사방으로 기름지게 펼쳐져 있고, 검붉은 낙엽이 발밑에 바스락거리며 밟히는 너른 진천 땅에 평온함과 더불어 안온함이 깃들어 있다.

정송강사 입구에 있는 송강 정철 신도비는 거북받침 위에 비신을 세우고 팔작지붕 모양의 거침석을 올렸다.(사진_이관우 기자)

 

왕실의 외척인 송강 정철의 생애와 가사문학의 태동

송강 정철(15361593)은 서울 장의동(지금의 종로구 청운동)에서 돈령부 판관을 지낸 부친 정유침과 대사간 안팽수의 딸인 죽산안씨 사이에서 3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 큰누나가 인종의 후궁인 귀인으로 간택돼 궁궐에 들어가고, 막내 누이 역시 성종의 셋째 아들인 계성군 이순의 양자인 계림군 이류에게 출가해 왕실의 외척이 된다.

그로인해 어릴 적부터 궁중에 자유롭게 출입하던 송강 정철은 당시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훗날 명종)’과 친분을 쌓으며 매우 두터운 우정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10세 되던 해인 1545(인종 1, 명종 즉위)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왕실 외척인 부친은 함경도 정평으로, 장남인 정자는 광양으로 유배당한다. 이어 부친만 유배가 풀려 돌아온다.

12세 되던 1547(명종 2) 또다시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을사사화의 여파로 부친은 경상북도 영일로 유배되고, 장남은 장형을 받고 유배 가던 중 32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이 시기 송강 정철은 부친을 따라 유배지에 머물며 생계를 이었다. 그리고 1551(명종6) 원자가 탄생되었다는 이유로 특별사면 돼 부친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그의 조부 산소가 있는 전라남도 담양 창평 당지산 아래로 이주하게 된다.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년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또한 호남 사림의 대표적인 석천 임억령에게 시를 배우고, 송순과 김윤제·김인후·양응정·기대승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학자 문인들에게 학문과 더불어 언문 가사도 배우게 된다. 무엇보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 등과도 친분을 나누며 두터운 교유를 쌓게 된다.

1552(명종 7) 17세에 문화유씨 유강항의 딸과 혼인하여 42녀의 자녀를 두였으며 1560 (명종 15)25세 때는 성산별곡을 지었다. 특히 이 노래는 성산(별뫼) 기슭에 김성원이 구축한 서하당과 식영정을 배경으로 사계절의 경물과 서하당 주인의 삶을 그리고 있어 인상적이다.

또한 1561(명종 16) 26세에 진사시에서 1등을 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간다. 어릴 적 친구처럼 지내던 명종의 호혜를 받으며 성균관전적 겸 지제교를 거쳐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다. 이어 좌랑·현감·도사를 지내다가 1566(명종 21) 정랑·직강·헌납을 거쳐 지평이 된다.

이어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 때는 율곡 이이와 함께 젊은 문관 가운데 뽑아 휴가를 주어 학업만을 닦게 하던 호당에 선출되기도 했다. 또한 수찬·좌랑·종사관·교리를 거쳐 전라도암행어사를 지내다가 1570(선조 3) 35세 때 부친상을, 38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리에서 각각 2년여의 시묘살이를 하게 된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송강기념관'이 건립돼 있으며, '정송강사' 입구에 있는 보호수 느티나무도 400년에 이르는 세월의 위상을 자랑한다. 사진은 송강기념관(사진_이관우 기자)

 

파란 많은 정치 인생과 성은이야 가디록 망극하다

송강 정철은 40세인 1575(선조 8) 시묘살이를 끝내고 벼슬길에 나가 직제학성균관사성, 사간 등을 역임한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본격화된 동서분당의 여파로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더욱 이 시절 벼슬을 버리고 담양 창평으로 돌아가 은거하며 선조로부터 몇 차례 벼슬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두문불출한다.

그러다가 43세 때인 1578(선조 11)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으로 승진하여 조정에 나아간다. 그해 11월 사간원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 담양으로 돌아간다. 1580(선조 13)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관동별곡’, ‘훈민가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자질을 발휘하게 된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었더니 / 관동 800리 관찰사를 맞기시니 / 어와 임금님의 은혜야말로 갈수록 그지없다 / 연추문(경복궁 서쪽문) 달려 들어가 경회루 남문(광화문) 바라보며 / 하직하고 물러나니 옥절(임금의 신표)이 앞에 있다 / 평구역(춘천과 원주로 가는 양주) 말을 갈아 흑수(한강 상류 여주)로 도라드니 / 섬강은 어드메오 / 치악()이 여기로다 ... 소양강 내린 물이 어디로 흘러가는가 / 나라(임금)를 떠난 외로운 신하 / 백발이 많기도 많다

- 정철의 관동별곡 중에서 -
 

송강 정철의 문학을 기리기 위한 시비(사진_이관우 기자)

 

그후 전라도 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 관찰사 등을 지낸 송강 정철은 1583(선조 16)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1585)에 사직하고, 다시 고향인 담양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한다. 이때 사미인곡’, ‘속미인곡등의 가사와 시조, 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짓는다.

송강 정철이 54세 되던 1589(선조 22)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을 추방한다. 그리고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고 인성부원군에 봉해졌다. 56세 때에는 왕세자 책립문제인 건저문제가 일어나 동인파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게 된다. 이때 신성군을 책봉하려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평소 과음이 문제인 그의 약점을 들어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논척을 받으며 파직되었다.

그리고 1592(선조 25)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선조를 맞이해 의주까지 호종하게 된다. 이후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에 우거하다가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동인과 서인의 분당으로 피바람이 몰아치던 시대에 변덕스런 임금 선조와 함께한 세월은 송강 정철로 하여금 사랑과 그리움, 배신과 애증으로 가득한 파란의 역사기도 하다.

송강정사 입구를 이루는 충의문(사진_이관우 기자)

 

송강 정철과 서인 영수의 기계를 기리려는, ‘생거진천

고향도 아니고 세거지도 아닌 충청북도 진천에 송강 정철의 묘지와 시비가 있다. 17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보면 문백면 봉죽리(송강로 523)에 그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정송강사>가 바로 그곳이다. 선조 때 임금의 자질이 부족함을 공공연하게 비판하며 급진적인 개혁을 서두르던 동인을 참살하고, 조정의 주도권을 잡은 서인의 영수 송강 정철은 좌의정 신분으로 최고의 권력을 누렸다.

하지만 그의 말년에 해당하는 57세 때 전라감사 권율의 모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온 후 조선에 군사를 파병할 뜻이 없는 명나라 상황을 거짓 보고한 동인의 모함으로 조정에서 자진 사직하고 강화도 송정촌에 거하다가 사망하게 된다. 1594(선조 27) 그의 주검을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에 장사했다.

그리고 그의 사후 72년이 지난 1665(현종 6)에 서인 세력의 거장이며 조선의 유학을 완성시킨 우암 송시열로 인해 정철의 후손인 정포와 상의하여 이전의 묘지를 현재의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어은골(환희산, 고기가 숨어 있는 지형과 흡사하다 하여 송시열이 붙인 지명)로 이장한 후 사당을 지어 그의 업적과 기계, 예술혼을 기리게 된다.

따라서 이곳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7호로 지정된 진천 정철 신도비와 더불어 사미인곡을 새긴 송강시비가 건립돼 있다. 또한 <정송강사> 사당 안 유물전시관에는 정철의 유품인 은배, 옥배, 연행일기 65일분과 친필 편지가 전시돼 있다. 이어 환희산 중턱에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된 진천 정철 묘소가 위치해 있다.

특히 생거진천의 자랑인 천년 농다리10분 거리에 위치해 있어 특별한 감흥을 자아낸다. 이곳은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에 흐르는 세금천에 놓인 농다리로서, 고려시대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돌다리다. 전체 28칸의 교각을 이루는 중간 중간에 돌들을 쌓아 교각을 만든 후 길고 넓적한 돌을 교각 사이에 얹어 튼튼히 방어했다. 과거와 현대의 역사적 숨결을 느끼고자 한다면 <정송강사>와 더불어 진천 농다리를 한번쯤 반드시 건너볼 만하다.
 

송강 정철은 아래쪽으로 아들의 묘와 함께 하고 있다. 현재의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어은골(환희산, 고기가 숨어 있는 지형과 흡사하다 하여 송시열이 붙인 지명)로 이장한 후 사당을 지어 그의 업적과 기계, 예술혼을 기리게 된다.(사진_이관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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