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해녀의 딸로 병마와 싸우며 늦은 나이에 공부를 하고 뜻을 이루다.

고운실 부천자연치유연구소 대표 신지식인 상패 및 시상식 모습(사진_고기봉 기자)

[시사매거진/제주=고기봉 기자] 고운실 부천자연치유연구소 대표는 지난 25일 제주 아스타 호텔에서 열린 '2019 사단법인 한국신지식인회 제주특별자치도신지식인연합회 인증서 수여 및 시상식' 행사에서 신지식인으로 선정돼 기념패를 받았다.

신지식인은 사회 각 분야에서 새로운 지식의 습득 및 창의적 발상으로 일하는 방식 등을 혁신해 사회·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이를 다시 사회적으로 공유한 사람을 말한다.

고운실 부천자연치유연구소 대표는 자연치유 요법을 활용한 미병(未病)상태의 생활건강아카데미, 맞춤형 코스메슈티컬 & 개인 체질 차(茶) 연구개발 및 교육으로 천연소재를 활용한 아토피, 탈모 예방의 코스메슈티컬의 산업화 교육, 치매예방을 위한 운동법으로 자연치유요법과 함께 한국적 라이프스타일의 사회적 영양제를 보급함으로써 양생의 올바른 정보제공을 하고 있다.

그는 중국선양 약학대학 해부학 해부수료, 선문대 통합의학대학원 석사학위, 서경대 경영학 박사학위, 현재 약용작물 교육협회 외래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고운실 대표는 약용작물 산업관리사&지도자, 천연식초 교육 지도사, 중독재활 복지사, 식생활 교육사, 호스피스 수료 등 다양한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으며, 연구논문으로는 괄사요법의 원리와 효능고찰(석사학위 논문), 소비자의 소비성향에 따른 코스메슈티컬 구매결정요인에 관한 연구(박사학위 논문), 한국적 코스메슈티컬 시장개발 방안에 대한 기초연구, 한국형 코스메슈티컬 판매방식에 관한 연구, 요통관리에 대한 추나요법과 카이로프랙틱의 기법에 대한 비교연구 등 학회지 게재되었다.

제주 8명의 신지식인 선정(사진_고기봉 기자)

고운실 대표의 성공 이야기

고운실 대표의 부천자연치유 연구소의 성공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연요법중 하나인 괄사요법을 통한 피부관리실 2곳 가맹개설 및 각 협회 활동을 통한 교육을 통해 국민생활 건강증진에 기여하고 있다.

내 나이 쉰 중반을 넘었다! 제주 해녀의 딸이다. 제주도 그 곳에서 39년을 살았다. 공부는 “안 하고 못 해도” 꿈은 있는 여자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뭔가 하나는 했다. 늘 아프기만 하던 나는 남들이 졸업 할 무렵이 돼서야 관광과를 졸업했고 일본어 강사를 했다.

결혼을 하면서 목재 수입 판매업 사업을 했다. IMF의 타격으로 집도절도 없어졌다. 엎친데 덮쳐 교통사고로 목뼈를 다쳤다. 힘든 상황을 보낸 시절을 뒤로 하고 무조건 서울로 상경했다.

어느 날 우연히 한 사람과의 인연으로 침, 뜸을 접 하면서 온갖 자연요법에 미쳤다. 그 중에 중국민간 요법인 꽈샤(刮砂)의 매력은 나를 통증에서 건져 주었다.

꽈샤(刮砂)로 대한민국 아니 세계최고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내 브랜드로 만들어 사업을 시작 했고 괄사 연구생들을 가르치면서 2016년 상반기 까지 운영했던 “꽈샤愛피부美”가 그렇다.

논문 역시 “괄사 요법의 원리와 효능고찰”이다. 원리에 대한 것이라 괄사에 관한 한 우리나라 1호가 되었다.

고운실 대표의 역경을 이기고 도전하는 모습

어릴 때부터 늘 아토피, 난소수술, 두통으로 시달렸던 나다. 교통사고 후유증은 얼굴 57군데의 유리 파편을 남겼다. 울퉁불퉁 그려진 얼굴의 주름살이 된 그림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고 앞머리를 내리고 다녔던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쭈글쭈글한 이마를 일부러 드러내고 다닌다. 자연요법 공부는 나에게 음식, 생활습관, 그 중에서도 아토피로 고생하던 얼굴에 천연 화장은 날 도와준 구세주였기 때문이다.

연구소를 운영하기 전에 난 외국출장 후 공항 입국장에서 쓰러졌다. 병원 입원과 동시에 직장을 두고, 미친 듯이 자연요법과 관련한 자격증을 한 보따리 취득 하느라 친구도 그 누구도 없이 보냈다.

친구들은 내가 망해서 제주에서 서울로 왔기 때문에, 내가 전화하면 돈 이라도 빌려 달라고 할까봐 내 전화를 받지 않을 것 같은 자격지심도 있었다.

학교를 포기 할 수 없었다. 도서관, 일터, 학교는 놀이터가 되었다. 교통사고 이후 소뇌에 혈전이 있어 기억하는 걸 제대로 못했던 나는 모든 걸 이미지화 시켜서 공부해야 했고, 몇 십 배의 노력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이 한번 읽고 노력할 때, 열 번은 더 해야 내 머리에 기억이 되었다. 대신에 사람들의 발표 사항이나 레포트를 써주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쉰 여덟에 박사학위, 늘 제주를 그리며 살아

그렇게 싫고 못하던 공부가 제일 재미있어 진거다.

대학원 수업은 밤새며 공부하니 가능 했는데, 일은 그러지 못했다. 내가 운영하는 연구소는 여러 가지 자연요법을 응용, 몸과 마음의 힐-링이 필요한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무턱대고 공부만 할 수 없었다. 이런 일과 비슷하게 하면서 마케팅이 필요해 책을 찾거나 지인을 통해 물어보면 시원한 답이 없었다. 그보다 내 경험을 말하면 이야기에 빠져들곤 했다.

왜냐하면 “나는 마케팅이 필요 없는 무 홍보 마케팅”을 했다. 사랑과 정성을 파는 내가 상품이고, “내 존재 자체가 상품”이다.

지인으로 부터 책을 써 보라는 권유를 받은 적 있어 용기를 가지고 노트정리 한 것과 책장의 책들을 보니, 참 많은 시간동안 미치게 살았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일과 공부를 통해 얻어낸 결과는 누구보다 크다. 10평의 기적을 이룬 듯 했다. 그것도 서울이 아니다. 제자들이 가맹점 2곳을 계약하여 운영하고 있는 곳 들은 10평의 사업본부 보다 크고 훌륭하다. 그곳도 여러 가지 자연요법을 알리고 공부하며 사람들과 만나며, 병원을 드나들던 사람들과 소통을 한다.

어느덧 연구소를 운영한지 13년이다. 강산이 변한 시간이다. 이제 내 삶을 통해 누군가는 위안과 희망이 되었으면 한다. 이렇게 도전의 꿈은 차디찬 현실 속에서 하나씩 탑을 쌓아 가고 있다. 정신없이 일하고 공부 했다.

매일 먹던 약 대신 “중독재활 공부”를 했고, 50대가 되면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우문과 우답을 번복한다. 넘어지고 깨지고 몇 번을 하며 체력은 깡다구가 되었고, 의지는 베짱이 되어 박사입학을 앞두고 아침나라 출판사와 “50대 도전하는 이유”란 가제목으로 계약을 하고도 고개가 숙여져 아직도 출판을 미루고 있다.

약용작물 교육협회에선 산업화를 위한 “NCS향장품 가공” 학습모듈 팀의 리더로 6개월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 역시 결실은 미비했으나 남겨준 메시지는 컸다. 이렇게 지치고 바쁜 나를 바라보며 힘이 되는 것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제 대학 강단과 항생제를 먹지 않고도 살아낼 수 있는 이야기를 약초 기능학을 통해서 내 이야기와 내가 경험한 모든 것들을 풀어내고 있다.

쉰여덟의 청춘을 그린다. 누구보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다! 100세 시대!

딱 절반을 넘어 한걸음 갔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어릴 때 어머니가 물질 할 때 내는 숨 비 소리를 들으며, 삶과 죽음을 보았던 제주 해녀의 딸이다.

그 때문이다! 열정의 씨앗을 심고 나눠주는 해녀의 딸이 누군가의 판도라! 희망이고 싶다.

실용학문을 가르치는 대학 강단에서에서 업(業)으로 이끌어갈 일꾼들에게 아쉬운 지식만을 가르치는 현장이 되지 않길 바라며 오늘도 난 강단과 연구실에서 열정을 다 하고 있다.

자연치유적인 치유사례를 통하여 학술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힐링문화컨텐츠” 학과를 대학원개설을 통해 K-헬스케어 분야의 통합적 치유를 목표로 하고 있다.

저작권자 © 시사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