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현실화 된 제품을 내놓으며, 소비자를 사로잡는 남다른 기술 선보여

   
▲ ‘최소, 최경량, 고성능, 세계최고’의 제품개발을 모토로 진행되던 각 상품의 제조과정과 그 상품을 최적의 방법을 이용하여 어떻게 마케팅과 연결시키는 가에 중점을 둔 소니의 기업전략은 소니의 성공비결이 되었다.

세계는 지금 세계화라는 큰 변화의 물결에 휩싸여 있다. 그 누구도 이 변화의 물결을 완전히 회피할 수가 없으며, 변화의 물결을 이기기 위해서는 능동적으로 세계화의 파도타기를 해내는 것만이 최선의 선택이다. 기업 경영의 세계 역시 그 파고를 넘기는 쉽지 않다. 급변하고 있는 세계 속에서 하나의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세계화의 파도에 기업의 이념과 기업운영방식을 실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세계화에 성공한 기업들에 대하여 연구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사업영역, 기업의 강점과 약점, 나아가야 할 방향 등 글로벌 기업으로서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는 선진기업을 벤치마킹함으로써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해 심도 깊은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전자재품의 명품으로 인식되고 있는 ‘SONY’는 우리에게 친숙해져 있다. 워크맨을 비롯하여 CDP, MD, VIAO 노트북, 디지털 카메라, 플레이스테이션에 이르기까지 SONY라는 브랜드는 우리에게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제품을 전해주는 기업으로 다가왔으며, 소비자들로부터 가지고 싶은 욕구를 자극해 오고 있다.

전쟁 폐허 속에서 일권 낸 신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폐허 속에서 세계적인 전자 업체인 ‘소니’는 탄생했다. 당시 폐전을 맞이한 일본에서 소니의 설립자인 이부카 마사루는 군수공장이었던 일본측정기회사를 정리하고, 자신의 기술을 평화로운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도쿄 니혼바시에 있었던 백화점 시로키야의 한쪽 구석에 ‘도쿄통신연구소’라는 소규모 작업소를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소니의 전신이다.
창업자 이부카 마사루는 회사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우수한 인재를 모으기 시작하면서 모교인 와세다 대학을 방문해 도쿄통신공업사에 근무할 인재모집 광고를 냈다. 그것을 보고 찾아온 와세다 대학 후배가 기하라 노부토시(木原信敏)다.
기하라 노부토시는 기계과 출신이었지만 전기 분야 지식에 상당히 밝아 모리타 아키오와 함께 일본 최초의 테이프 리코더를 개발한 인물이다. 도쿄통신공업이 회사로서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계기 역시 기하라 노부토시가 만든 테이프 리코더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도쿄통신공업’의 이름이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에 알려진 시기는1954년 세계 최초로 실용화에 성공한 트랜지스터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이듬해인 1955년에는 일본 최초의 트랜지스터라디오를 개발하고, 1959년에는 세계 최초의 트랜지스터텔레비전을 개발해 해외로 수출하기 시작하면서 ‘소니’의 전신인 ‘도쿄통신공업’은 글로벌 기업으로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 소니는 처음으로 외국인 CEO인 하워드 스트링거 회장 겸 CEO를 영입하여 신경영방침을 표명하고 있다. 소니는 최근 전기와 엔터테인먼트 부문에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 금융 부문이나, 기타 비핵심 부문의 지분을 대거 낮출 것을 검토 중이다.
실험용 쥐를 자처한 도전과 창조정신
‘Sony’라는 이름은 두 개의 단어로 만들어졌다. 하나는 ‘Sound’ 그리고 ‘Sonic’과 같은 단어들의 기원인 라틴어 ‘Sonus’와 ‘Little son’이라는 의미를 지닌 ‘Sonny’가 합쳐져 ‘끊임없는 창조를 위해 힘과 열정을 지닌 젊은 소그룹의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창업 당시 ‘회사 규모는 작지만 패기 있는 젊은이들의 집단’이라는 역동적인 의미를 포함한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던 창업자 이부카 마사루는 알파벳 문자를 기본으로 하는 다수의 언어 가운데 그 어떤 언어로 읽더라도 ‘소니’ 라는 한가지 발음으로만 읽혀질 수 있는 ‘Sony’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고, ‘소니의 제품에는 일관된 생각이 들어있어야만 한다’라는 창업정신을 가지고 이부카 마사루와 모리타 아키오 두 명의 창업자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전자제품의 개발에 매진하였다.
끊임없는 탐구심과 열정으로 이 세상에 없는 독창적이고 유용한 제품을 내놓은 것을 두고 1960년 초 일본의 평론가 오야 소이치는 주간 아사히에서 “소니는 결과적으로 다른 큰 전기회사들을 위한 모르모트(실험용 쥐)적인 역할을 한 것이 된다”라고 평했다.
당시 회장이였던 이부카 회장은 이를 역발상으로 전환, 오히려 사원들로부터 받은 모르모트 형상을 항상 책장위에 두어 새로운 지식 창출과 변화·개척의 상징으로 삼았다. 이 일화는 소니의 ‘없어도 되지만, 있어서 즐겁다’라는 이념의 기초가 되었고, 새로운 제품을 출시할 때에도 적용되었다.
또 ‘최소, 최경량, 고성능, 세계최고’의 제품개발을 모토로 진행되던 각 상품의 제조과정과 그 상품을 최적의 방법을 이용하여 어떻게 마케팅과 연결시키는 가에 중점을 둔 소니의 기업전략은 소니의 성공비결이 되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고정식 텔레비전 같은 전에 없는 새로운 제품을 시장에 내 놓기 시작하면서 기존에 생각하지도 못한 WALKMAN, DVD PLAYER, MEMORY STICK과 같은 새로운 상품들을 만들어 내었다.
한손에 쏙 들어오는 캠코더(핸디캠), 엔터테인먼트 노트북(바오이), 필름이 필요 없는 카메라(사이버샷), 새로운 저장매체(메모리스틱), 엔터테인먼트 로봇(아이보), 게임기의 개념을 파괴한 게임기(플레이스테이션)에서 세계최고 수준의 방송장비에 이르기지 소니는 ‘Do you dream in sony?’라는 기업모토대로 꿈과 희망을 담아내는 기업정신을 이어갔다. 꿈이 현실화 된 제품을 내놓으며,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남다른 기술,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있어서 소비자에게 즐거움을 주고 멋진 라이프를 꿈꾸게 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해온 것은 바로 소니의 독보적인 힘이라 할 수 있다.

소니’는 단순한 회사의 이름이 아니다
미국에 최초로 일제 소형 트랜지스터를 판매하러 진출한 사람도 모리타였다. 그것도 아랫사람을 시키지 않고 본인이 직접 상대 회사의 최고 경영자를 만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당시 소니의 생산능력을 크게 벗어난 10만대 이상의 주문을 타진 받아왔다. 하지만 ‘소니’ 상표가 아닌 주문자 브랜드를 사용해야 하는 OEM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했다. 이처럼 모리타는 계속해서 ‘SONY’ 라는 브랜드를 고집했다.
1960년 2월에는 뉴욕에 SONY Corporation of America를 설립하면서 미국인을 경영진에 포함시키며 경영의 현지화를 적극 추진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61년 2월에는 미국예탁증권(ADR)을 발행하기로 결심했다. 미국 증권시장으로부터 직접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새로운 길을 개척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소니를 미국기업이라고 믿는 사람도 적지 않게 생겨나게 되었다.
소니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기업인만큼 세계 유수의 매체나 책을 통해 너무도 많이 알려져 있거니와 누구나 한번쯤 소니 제품을 실제로 사용해 봤을 만큼 보통명사로 굳어져 있을 정도다. 한때 ‘SONY’로고가 새겨진 워크맨을 소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제품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걸으면서도 얼마든지 고품질의 스테레오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차별화 된 문화적 상징으로 통했던 것이다. 얼마전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주관하는 ‘슈퍼 브랜드’ 조사에서 일본 소니 제품이 무려 7개 분야를 석권했던 것을 보면 소니의 위력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소니’는 단순한 회사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독특한 색깔을 가진 하나의 이미지다. 늘 새롭게 변신하기 위해 투자와 개발을 아끼지 않는 남다른 경영전략 구사를 통해 이룩된 성과다. 속도감 있는 경영과 꿈을 현실화하는 소니만의 추진력은 많은 기업인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 줄 것이다.

   
▲ 최소, 최경량, 고성능, 세계최고’의 제품개발을 모토로 진행되던 각 상품의 제조과정과 그 상품을 최적의 방법을 이용하여 어떻게 마케팅과 연결시키는 가에 중점을 둔 소니의 기업전략은 소니의 성공비결이 되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고정식 텔레비전 같은 전에 없는 새로운 제품을 시장에 내 놓기 시작하면서 기존에 생각하지도 못한 워크맨, 핸디캠, 아이보 등 새로운 상품들을 만들어 내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
소니의 과감한 선택은 전 회장인 이데이 노부유키를 사장으로 전격 발탁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소니는 1995년 제2 창업기의 초대 사장(창업 후 6번째 사장)으로 이사회 서열 14위였던 이데이를 전격 발탁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 의외의 선택은 탁월한 것이었다.
이데이는 기술을 잘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경영 감각을 탁월하게 발휘할 줄 아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기술동향을 확실히 감지하고 실무 기술 담당자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고루 갖춘 그는 제 2 창업의 적임자였던 셈이다.
또한 제2의 창업 명제였던 디지털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으며, 각종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남다른 비즈니스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전격적 사장 발탁의 한 이유였다. 이데이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소니는 다방면에서 변화하기 시작한다. 소니의 경영관리 개혁은 많은 일본 기업들의 호응을 받았고, 그들은 컴퍼니 제도, 유사 스톡옵션 제도, 이사 인원의 대폭 감소와 사외이사제의 적극 등용, 집행임원 제도, 적극적인 주주 중시의 경영자세로 폐쇄적 일본 산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일본 기업의 성격을 기본으로 깔고 서구적 경영방식을 과감히 도입해 전략결정과 경영감시에 탁월한 효과를 창출했던 것이다.
한편, 사업현장을 통괄하는 집행임원과 장기적 전략을 세우는 이사를 적절히 조화시킨 이사회를 조직해 내부 사정을 바탕으로 활발한 토론과 전략 결정을 보다 용이하게 만든 것이다. 또한 창업 후 50년이 지난 시점에서 기업의 재무구조는 콜레스테롤이 쌓인 혈관처럼 탄력성과 유동성을 잃고 있었다. 기업의 생명력을 책임지는 재무구조를 혁신하고 건전화함으로써 또 한번의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던 것이다.

   
▲ 이데이 노부유키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소니는 다방면에서 변화하기 시작한다. 경영관리 개혁은 많은 일본 기업들의 호응을 받았고, 컴퍼니 제도, 유사 스톡옵션 제도, 이사 인원의 대폭 감소와 사외이사제의 적극 등용 등 적극적인 주주 중시의 경영자세로 폐쇄적 일본 산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경쟁사를 앞지르는 아이디어와 기술력
소니가 추구하는 경쟁력의 첫 번째는 제품력 (Product)이다. 소니가 갖는 가장 강력한 힘은 신제품 시장 초기에 발표하는데 있어 첨단 기술의 최고급 기기를 시장이 확대될 때에 맞추어 최저가 기기로 공급하는 다양한 제품군으로 풀어내는 고도의 솔루션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저가 기기임에도 최고급 기기가 갖는 기능을 모두 갖으면서 퍼포먼스 또한 그에 근접한 모델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소니의 전략은 명확했다. 업계의 리더이자 기술개발의 리더로써 항상 최고급, 최신의 제품을 발표하여 경쟁사와 후발업체들과의 거리격차를 벌여놓았다. 그리고 그들이 뒤따라 올 때에 맞추어, 최고급 모델의 기능과 퍼포먼스를 그대로 갖는 초저가와 중저가 제품들로 경쟁자들은 악전고투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힘든 가격경쟁에 빠진 그들을 뒤로하고 소니는 다음 기술, 다음 시장의 준비를 했다. 경쟁사들이 기나긴 경쟁의 터널을 벗어날 때쯤, 이미 터널 앞에는 소니가 만들어 놓고 지나간 또 다른 터널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소비자들에게는 그러한 소니의 모습이 세계 일류의 제품이라는 이미지로 당연스럽게 받아 들여졌다. 두 번째는 플레이스테이션(Playstation)이다. 소니사는 영화를 비롯한 멀티미디어사업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자 비디오 게임같은 산업을 재검토하며, 컨텐츠 사업의 확장과 전자제품 부문의 축소를 시도했다. 이런 변화의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플레이스테이션(Playstation)’이다. 비디오게임기 시장에서 소니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획기적인 마케팅전략과 혁명적인 하드웨어개발, 그리고 다양한 게임 소프트웨어의 개발과 유통시스템 개혁 등을 효율적으로 조합시켰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소니는 일관되게 제품을 개발했고 게임 소프트웨어를 다양화하여 고가의 차세대 비디오게임기를 구입할 실수요자층을 확보했다. 또한 자체적인 CD공장을 갖추고 CD제작의 노하우가 많은 소니는 유통망을 정리하고 유통과정에서 중간도매상을 배제함으로써 재고부담을 덜고 가격을 유지했다. 이것은 소니가 성공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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