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의 영상과 그래픽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최첨단 제품과 서비스 제공

   
▲ 1870년경 당시 사진사들은 튼튼한 어깨를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암실을 등에 지고 다니는 수고로움을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코닥의 설립자 조지 이스트먼은 이 문제를 개선하여 대중화된 소형카메라를 개발했다.

이스트먼 코닥은 세계 이미지 시장의 선두주자이며 영상 및 그래픽 커뮤니케이션 사업부문에서 최첨단의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코닥의 2006년 매출은 약 133억 달러 규모이며, 특히 소비자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의미 있는 사진과 정보를 좀 더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디지털 영상 사업 부문에 초점을 둔 성장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코닥은 일반 소비자들이 언제 어디서든지 쉽고 편리하게 사진을 찍고, 인화하여 공유할 수 있도록 디지털 및 필름 사진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업에게도 코닥의 효율적인 디지털 솔루션을 제공하여 전 세계의 소비자들과 효과적으로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당신이 셔터만 누르면 나머지는 우리가 합니다”라는 문구는 카메라 연관 산업 중에 코닥이 손대지 않는 사업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정도로 코닥이 참여하는 산업이 넓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코닥이 연관 산업에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은 필름시장에서의 선두를 지키고 있었다는 점과 필름이 고부가가치 산업이란 점 때문이다. 화학적 약품의 가격이나 얇은 필름의 원재료가격은 그렇게 비싸지 않다. 오히려 코닥의 공정을 거침으로써 몇 배의 가치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코닥의 설립배경과 영향력

   
▲ 필름카메라에서 디지털 카메라로 소비자의 관심이 변하면서 코닥은 1991년 194억 달러였던 매출액이 2001에는 130억 달러로 격감했고, 94달러에 달하던 주가는 2002년 2월 27달러 선을 겨우 지킬 정도로 급격히 감소했다.

1854년에 뉴욕에서 태어난 조지 이스트먼은 5살 때 아버지가 로체스트에 이스트먼 상업 대학을 설립하면서 옮겨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시작되었고, 어린 나이에 홀어머니와 심각한 장애를 가진 여동생을 부양해야 했다. 이스트먼은 14살에 주급 3달러의 보험회사 심부름꾼으로 처음 일을 시작하였다. 노력과 능력을 인정받은 이스트먼은 1년 뒤 또 다른 보험회사에서 주급 5달러의 사무원으로 취직하였으나, 더 나은 직업을 얻기 위해 회계를 공부하여, 5년 뒤 스무살의 나이로 로체스터은행에 주급 15달러의 상급 서기로 고용된다. 
이스트먼은 24살 되던 해 동료와 함께 산토도밍고로 휴가를 가기로 계획했는데, 그의 동료는 이스트먼에게 여행 기록을 남기자는 제안을 했다. 결국 이스트먼의 산토도밍고 여행은 무산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이스트먼은 사진촬영에 심취하게 되었고 복잡한 사진촬영 과정을 단순히 하는 방법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1870년경 당시 사진사들은 튼튼한 어깨를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암실을 등에 지고 다니는 수고로움을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코닥의 설립자인 조지 이스트먼이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았더라면 사진 찍기의 고통스러움은 여전했을지도 모른다.
코닥의 설립자인 이스트먼은 영국 매거진을 통해 사진작가들이 젤라틴 감광제를 사용하는 것을 본 뒤 젤라틴 감광제는 건조 된 뒤에도 빛에 예민하게 반응해 야외활동에 적합하다는 것을 깨닫고 젤라틴 감광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낮에는 은행에서 일하고 밤에는 실험을 계속하며, 3년간의 실험 끝에 마침내 방법을 발견해냈다. 이후 1879년에는 건판 방식을 발명했을 뿐 아니라 대량의 감광판을 생산해 내는 방법도 특허를 받았다. 이로써 사진작가들에게 판매할 수 있는 건판 제작이 가능해진 것이다. 1880년에는 로체스터 스테이트가에 위치한 빌딩의 3층을 임대하여 판매용 건판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이스트먼코닥을 설립한다.
당시의 카메라 가격은 25달러였다. 필름을 다시 끼워 넣어 주는 데에도 10달러를 지불해야만 했던 매우 비싼 가격이었다. 양복 한 벌을 15달러에 살 수 있었던 상황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가격이 아닐 수 없다. 고가의 사진장비를 저렴한 비용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이스트먼은 사진 촬영 방식을 혁신한 단돈 1달러짜리 브라우니 카메라를 선보였다. 사진 찍는 것을 꿈도 꾸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 카메라를 살 수 있었고, 대중을 위한 사진이라는 이스트먼의 오랜 꿈이 실현된 것이었다. 이후로 사진사들은, 필름이 장착된 코닥 카메라의 필름을 다 사용한 뒤 이스트먼 사로 보내기만 하면 현상과 인화, 재충전된 필름을 되돌려 받게 되었다. 또한 이스트먼의 탄력 있고 강한 롤필름은 영화의 시초가 되는 토머스 에디슨의 활동사진 발명을 가능하게 해주는 등 여러 가지 현대 매스 미디어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1888년 ‘코닥’이라는 상표가 등록 된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이 브랜드네임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에 대한 상상과 추론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코닥이라는 이름은 조지 이스트먼이 별 뜻 없이 고안해 낸 것이다. 당시 코닥의 이스트먼 회장은 알파벳 ‘K’를 가장 선호했는데, 이는 ‘K’가 소비자나 사용자 모두에게 쉽고 강력하게 기억되는 힘을 가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파벳 ‘K’를 앞뒤 두 번 반복 사용해 고안한 이름이 바로 코닥(KODAK)이다. 단어 자체의 특별한 뜻은 없지만 이스트먼 회장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신념에서 탄생된 이름이기에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 양복 한 벌을 15달러에 살 수 있었던 상황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가격이 아닐 수 없다. 고가의 사진장비를 저렴한 비용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이스트먼은 사진 촬영 방식을 혁신한 단돈 1달러짜리 소형 카메라를 선보였다.

디지털시대, 코닥의 위기극복
코닥의 급격한 발전은 제품주기설상의 마케팅활동인 신제품의 도입기의 시장선점전략, 성장기의 시장 확장전략, 그리고 성숙기의 시장점유율 유지전략의 효과적인 이용과 필름 산업의 특징인 고부가가치 산업이 만들어 낸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코닥이 행한 카메라산업 한 방향에 대한 집중마케팅은 코닥의 발목을 잡게 된다. 언제나 새로운 사고로 변화와 혁신을 시도하던 코닥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1980년 필름에서 디지털카메라로 시장이 변화할 때 디지털보다 필름사업에 더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그러나 100년 이상의 역사를 유지해 온 기업에게 한 두 차례의 실수나 위기는 더 나은 기업으로 성장해 나가는 데 있어 어쩌면 당연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대 초반의 급격한 변화는 사진관련 산업의 근간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1998년 미국에서 판매된 카메라 중 단지 4%가 디지털 카메라였지만, 2000년 후반에는 그 규모가 30%에 이르렀다. 일본에서는 이미 디지털 카메라가 기존 광학 카메라 시장을 제압했다. 이런 성향은 점점 두드러지면서, 필름카메라는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시장의 변화는 코닥과 후지 그리고 아그파, 코니카 등 세계 시장을 분점하고 호령하던 필름 공룡들은 날로 격감하는 매출로 휘청 이기 시작했다. 니콘과 캐논 등 전통의 카메라 업체들도 수세에 몰렸다. 특히 세계 사진 산업을 이끌고 있는 코닥의 경우 1991년 194억 달러였던 매출액이 2001에는 130억 달러로 격감했다. 1997년 94달러에 달하던 주가는 2002년 2월 27달러 선을 겨우 지킬 정도로 급격히 감소했다.
코닥이 쇠태의 길을 가고 있던 지난 2003년 HP에서 25년간 몸담으며 HP의 프린터 사업부를 세계 1위로 끌어올린 안토니오 페레즈를 CEO로 영입하면서 디지털 이미징 사업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여주었다. 이후 디지털카메라, 잉크젯 프린터, CMOS 센서, 인화전문점을 위한 드라이랩과 키오스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디지털 기술에 기반한 제품을 선보이고 있으며, 현재 코닥 수입의 70%가 이들 디지털 제품으로부터 양산되고 있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2004년부터 단계적으로 진행되어 온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했다. 헬스케어와 같이 디지털이미징 분야와 무관한 사업부를 매각하면서 코닥은 진정한 의미의 토탈이미징 그룹으로 거듭나기 위해 대내외적으로 뼈를 깎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이스트먼코닥이 필름 비즈니스를 접고 디지털영상 비즈니스로 무게중심을 옮기기 위해 1만 5,000명의 직원들을 해고한다. 재래식 필름의 수요가 급격하게 감소함에 따라 코닥은 디지털영상 부문으로 전환을 가속화시키기 위해 전체 직원의 20%가 넘는 1만 5,000명을 전세계적으로 감원함으로써 재래식필름부문의 투입비용을 절감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러한 조치가 발표되자 코닥의 주식은 12.7%나 급등해 30.95달러에 거래되었으며, 인원감축은 향후 3년 동안 계속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17억 달러에 달하는 구조조정자금을 수혈하며 코닥은 위기극복의 돌파구를 만들게 된다. 하지만 영상시장이 디지털영상으로 급격하게 옮겨감에 따라 코닥은 83%의 수익감소를 겪었다. 재래식 필름시장의 강자이던 코닥이 필름시장에서 물러나면서 디지털카메라를 비롯한 디지털영상시장의 성장은 급물살을 탈 수 있었으며, 카메라뿐 아니라 인쇄, 영상편집 SW, 디지털영상장치 및 주변기기 부문에서 발군의 능력을 보이며 예전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소규모 주문형 맞춤 인쇄가 가능해 차세대 블루오션이라 불리우는 디지털 인쇄 시장에도 진출하여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며, 디지털 상업 인쇄 시장을 선도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코닥의 급격한 발전은 제품주기설상의 마케팅활동인 신제품의 도입기의 시장선점전략, 성장기의 시장 확장전략, 그리고 성숙기의 시장점유율 유지전략의 효과적인 이용과 필름 산업의 특징인 고부가가치 산업이 만들어 낸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코닥이 행한 카메라산업 한 방향에 대한 집중마케팅은 코닥의 발목을 잡게 된다. 언제나 새로운 사고로 변화와 혁신을 시도하던 코닥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1980년 필름에서 디지털카메라로 시장이 변화할 때 디지털보다 필름사업에 더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그러나 100년 이상의 역사를 유지해 온 기업에게 한 두 차례의 실수나 위기는 더 나은 기업으로 성장해 나가는 데 있어 어쩌면 당연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대 초반의 급격한 변화는 사진관련 산업의 근간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1998년 미국에서 판매된 카메라 중 단지 4%가 디지털 카메라였지만, 2000년 후반에는 그 규모가 30%에 이르렀다. 일본에서는 이미 디지털 카메라가 기존 광학 카메라 시장을 제압했다. 이런 성향은 점점 두드러지면서, 필름카메라는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했다.이와 같은 시장의 변화는 코닥과 후지 그리고 아그파, 코니카 등 세계 시장을 분점하고 호령하던 필름 공룡들은 날로 격감하는 매출로 휘청 이기 시작했다. 니콘과 캐논 등 전통의 카메라 업체들도 수세에 몰렸다. 특히 세계 사진 산업을 이끌고 있는 코닥의 경우 1991년 194억 달러였던 매출액이 2001에는 130억 달러로 격감했다. 1997년 94달러에 달하던 주가는 2002년 2월 27달러 선을 겨우 지킬 정도로 급격히 감소했다.코닥이 쇠태의 길을 가고 있던 지난 2003년 HP에서 25년간 몸담으며 HP의 프린터 사업부를 세계 1위로 끌어올린 안토니오 페레즈를 CEO로 영입하면서 디지털 이미징 사업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여주었다. 이후 디지털카메라, 잉크젯 프린터, CMOS 센서, 인화전문점을 위한 드라이랩과 키오스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디지털 기술에 기반한 제품을 선보이고 있으며, 현재 코닥 수입의 70%가 이들 디지털 제품으로부터 양산되고 있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2004년부터 단계적으로 진행되어 온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했다. 헬스케어와 같이 디지털이미징 분야와 무관한 사업부를 매각하면서 코닥은 진정한 의미의 토탈이미징 그룹으로 거듭나기 위해 대내외적으로 뼈를 깎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이스트먼코닥이 필름 비즈니스를 접고 디지털영상 비즈니스로 무게중심을 옮기기 위해 1만 5,000명의 직원들을 해고한다. 재래식 필름의 수요가 급격하게 감소함에 따라 코닥은 디지털영상 부문으로 전환을 가속화시키기 위해 전체 직원의 20%가 넘는 1만 5,000명을 전세계적으로 감원함으로써 재래식필름부문의 투입비용을 절감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러한 조치가 발표되자 코닥의 주식은 12.7%나 급등해 30.95달러에 거래되었으며, 인원감축은 향후 3년 동안 계속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17억 달러에 달하는 구조조정자금을 수혈하며 코닥은 위기극복의 돌파구를 만들게 된다. 하지만 영상시장이 디지털영상으로 급격하게 옮겨감에 따라 코닥은 83%의 수익감소를 겪었다. 재래식 필름시장의 강자이던 코닥이 필름시장에서 물러나면서 디지털카메라를 비롯한 디지털영상시장의 성장은 급물살을 탈 수 있었으며, 카메라뿐 아니라 인쇄, 영상편집 SW, 디지털영상장치 및 주변기기 부문에서 발군의 능력을 보이며 예전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소규모 주문형 맞춤 인쇄가 가능해 차세대 블루오션이라 불리우는 디지털 인쇄 시장에도 진출하여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며, 디지털 상업 인쇄 시장을 선도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다양성과 포용 정책을 강조한 CEO

   
▲ 코닥은 현재에도 올림픽, 모터스포츠 등 다양한 행사와 학교 및 지역단체를 후원하며 모든 지역사회로부터 친근하고 신뢰받는 기업으로서 모범이 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친환경적인 제품 사용과 재활용 정책을 통해 지구 환경문제에도 앞장서고 있다.
“다양성과 포용은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비즈니스 원칙이다”라고 말하는 안토니오 페레즈(Antonio M. Perez)는 “다양성이란 교육 환경, 근무 경험, 작업 스타일 및 지역, 가족 생각 등 다양한 렌즈를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며, 포용은 성별, 나이, 문화 등 우리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함을 뜻하는 모든 방식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코닥은 직원, 고객, 공급자, 시장 등 모든 분야에서 다양성과 포용 정책을 실천해 오고 있다.
코닥은 고객이 기뻐하며 만족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 내는 데에 다양한 방면의 각기 다른 구성원들에서 비롯된 통찰력을 십분 활용한다. 구성원들의 각자 다른 생각의 다양성이 혁신과 팀워크를 불러일으킨다는 믿음으로, 건전한 토론으로 아이디어를 통해 견해를 교환하며, 코닥의 포용적인 근무환경은 다양한 관점에서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코닥의 문화는 구성원 개개인에게 다양성을 전파하는 전파자가 되기를 요구하며, 이러한 역할을 통해 코닥의 구성원들은 상호작용하며 서로의 다양성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각기 다른 고객과 직원들의 다양한 통찰력에서 얻어진 다양성은 코닥이 매번 시장이 변화할 때마다 그들도 스스로 변화를 꾀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다양한 사고를 바탕으로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으로 코닥은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뛰어난 제품을 계속 개발해 오고 있다. 다양성에 대한 코닥의 고집은 고객으로 하여금 코닥이라는 기업을 신뢰할 수 있게 하며 전세계적으로 코닥이라는 기업의 명성을 드높이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중요시하는 코닥
코닥은 세계 이미지 시장의 선두주자로서 영상 및 그래픽 커뮤니케이션 사업부문에서 최첨단의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며, 현재 전 세계적으로 60여 개국에 진출해 133억 달러 규모의 연매출을 올리고 있다. 그런 만큼 사회에 대한 환원사업에도 적극적이다.
설립자인 조지 이스트먼은 주급이 60달러 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비영리 교육기관에 기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린이들이 어린 시절 중요한 시기에 적절한 치과 치료를 받는다면 더 나은 모습으로 인생에서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로체스터에 치과 진료소를 설립하고 어린이들을 위한 진료 활동을 지원했다. 또한 이스트먼은 모든 사람들이 음악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기를 바라며 이스트먼 음악학교, 극장, 오케스트라를 설립하고 지원했으며, 아메리칸 흑인 교육에도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로체스터에 있는 대학에 3,000만 달러를 기부했다.
창립자 조지 이스트먼의 철학을 이어가고 있는 코닥은 현재에도 올림픽, 모터스포츠 등 다양한 행사와 학교 및 지역단체를 후원하며 모든 지역사회로부터 친근하고 신뢰받는 기업으로서 모범이 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친환경적인 제품 사용과 재활용 정책을 통해 지구 환경문제에도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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