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쇼의 프리마돈나/오프라 윈프리(Oprah Gail Winfrey)_흑인, 사생아, 가난, 성폭력 등 절망 속의 인생역전 원동력은 ‘꿈’

   

▲ 흑인, 사생아, 가난, 성폭력 등 수 많은 절망을 딛고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가 된 ‘살아있는 신화의 여인’ 오프라 윈프리의 사회적 영향력과 브랜드 가치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 사람들을 열광케 하고 있다.

미국을 움직이는 또 하나의 힘이자 막강한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는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는 많은 여성들에게 에너지를 주는 신화적인 인물이다. 개런티가 가장 비싼 인물, ‘보그’지 패션모델, 영화배우, 세계적인 갑부, 영화·출판·TV·인터넷 사업을 총망라한 ‘하포 엔터테인먼트 그룹’의 대표 등 그녀를 지칭하는 용어들은 수 없이 많다. 오프라 윈프리는 시사주간 타임 ‘20세기의 인물’ 중 하나로 선정됐으며, 1998년 포춘지 선정 미국 최고 비즈니스 우면 2위, 인콰이어러지 선정 ‘세계 10대 여성’ 선두 선정, 1997년 월스트리트저널 조사 미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3위로 뽑히기도 했다. 그녀는 명성과 돈, 존경을 모두 거머쥔 거물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화려함보다 미천한 출신 성분, 지독한 가난, 어린 소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성적 학대, 미혼모, 마약 복용 등 지금의 모습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불행한 과거를 극복했기에 지금의 자리에 선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존경심을 머금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당당하게 일어설 수 있었던 그녀의 에너지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반복되는 절망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 오프라는 방송을 통해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를 고백하고 이를 통해 게스트의 상처를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기적을 행하고 있다. 자신의 그러한 치부를 솔직하고 당당하게 드러내고 참회하는 시간으로 만드는 그녀의 방송은 여러 사람들에게 신선함과 함께 새로운 충격이라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인생의 절망 속에서 휘청대다
인종차별이 심하고 가난한 미국 남부지방의 미시시피 주에 있는 시골마을에서 미혼모의 딸로 태어난 오프라는 궁핍하고 평탄하지 못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녀는 3살 때부터 뛰어난 말재주와 암기력을 보여 동네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기도 했다. 6년 동안 외가 생활을 했던 그녀는 돈벌이로 인해 떨어져 지냈던 어머니와 살게 되었지만, 4학년이 되어서는 다시 새어머니와 살고 있는 친부 버논 윈프리와 함께 살게 됐다. 그 와중에 오프라는 9살 때 삼촌에게 처음으로 성폭행을 당한 뒤에도 몇 명의 친척들과 주변인들에게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당했다. 그에 이어 열세 살 때 아버지의 형제인 트렌트로부터도 성폭행을 당했고, 이러한 성적 학대에 견디지 못한 오프라는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렸지만 믿어주지 않았다. 그녀가 어렵게 꺼낸 고통스런 현실을 아버지마저도 싸늘하게 외면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오프라는 그러한 고통스런 현실에서 도망치듯 그녀는 14살에 돈을 훔쳐 집에서 가출해 버리게 된다. 집을 나간 오프라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 아이들과 무절제한 성관계를 맺는 타락된 생활을 하다가 밀워키 청소년 감호소에 맡겨졌다. 하지만 만원이었던 감호소 사정으로 인해 어머니를 거쳐 다시 아버지에게로 맡겨진 오프라는, 아버지의 엄격한 도덕적 잣대에 맞춰 다시 엄격한 생활을 해야 했다.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 내쉬빌에 돌아 온 오프라는 열네 살에 아들을 낳았지만, 이내 곧 죽고 말았다. 아버지의 엄격한 훈육 속에서 오프라는 교회의 순회설교 때마다 노련한 설교자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뒤에 오프라가 자신의 이미지와 인격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됐다.

방송, 영화로의 화려한 진출
어떤 자리에서든 자신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쏠리도록 하고, 자신의 상황을 명쾌히 정리하는 오프라의 화술은 전설적이다. 노련한 설교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1975년 오프라는 21살의 나이에 내쉬빌 WTVF-TV 리포터 겸 앵커를 맡게 된다. 1976년 22살에는 발티모어의 WJZ-TV로 옮겨 6시 뉴스 공동 진행자 활동을 했으며, 1978년 토크진행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WJZ-TV ‘People are talking’이라는 프로그램을 Richard Sher 씨와 공동 진행자로 맡게 된다. 30대로 접어든 1984년에 오프라는 시카고로 이사 가서 새롭게 눈에 띄게 되어 시카고 소재 WLS-TV의 아침 토크쇼 ‘AM Chicago’라는 지역방송을 맡게 된다. 시청률이 바닥을 헤매던 이 프로그램은 오프라가 프로그램을 맡은 지 한 달 만에, 당시 가장 유명한 토크 쇼였던 ‘도나휴’의 인기를 추월해 버렸다. 이후 방송 프로의 구성을 1시간 연장되는 쇼로 바뀌고, 1985년 9월에는 쇼의 이름이 ‘The Oprah Winfrey Show’라는 명칭으로 다시 시작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처음으로 영화 ‘컬러 퍼플’의 소피아 역을 맡게 된다. 오프라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고, 오스카와 골든글로버 시상식에서 최고 조연 여우주연상을 받게 된다. 이렇게 방송·영화로 화려한 진출한 오프라는 1986년 HARPO Productions을 설립하게 된다. 억만장자로 영화와 TV 제작 및 인터넷사업까지 총망라한 그룹의 대표로 그녀는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다. 미국이 아무리 ‘기회의 나라’ ‘평등의 나라’라고 하지만, 유색 인종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는 가운데서 흑인인 그녀는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당당하게 성공을 이룩해 나간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 열광하는 이유

   

▲ 오프라 윈프리 쇼’의 제작, 잡지 ‘0 매거진’, 디즈니 등을 통한 영화 제작, 유통 등을 주로 하는 ‘Harpo 프로덕션’을 소유하고 있는 오프라 윈프리의 회사들은 모두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나른함과 무료함으로 자칫 쳐져있기 쉬운 오후 4시에 방송되는 ‘오프라 윈프리 쇼’는 이러한 시간들을 활력으로 채워주는 프로그램이다. 솔직함과 편안함, 상처받은 사람을 치유해주는 따뜻한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오프라 윈프리는 세계 각층의 팬으로부터 ‘처치 오브 오프라(The church of Oprah)’의 주교라고 표현할 정도로 두터운 신뢰와 존경을 받아오고 있다. 2006년 11월 대중문화와 정신세계의 연관성에 대한 설문 조사에서 설문자 33%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성직자보다 오프라 윈프리로부터 정신세계에 더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고 답해 그녀의 위력을 다시금 입증해 보였다. 기독교 신자이지만 특정한 교파보다는 모든 정신세계와 영적인 생활과 교류에 오픈되어 있는 그녀에 대해, 팬들은 물론 미디어 역시 현대인의 도덕적인 삶의 주축이 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오프라 윈프리 쇼’가 사람들에게 이 같이 열화와 같은 각광을 받는 이유는 늘 솔직하고, 훈계가 아닌 친구의 입장에서 조언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뛰어난 외모와 말솜씨가 좋은 사람들이 판치는 연예계에서 오프라는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방송을 진행해 갔다. 초창기 초대 손님이 어려운 일이나 슬픈 일을 이야기할 때면 손을 잡아주고, 같이 울어주는 것으로 아줌마 팬들을 사로잡았다. 인터뷰를 꺼려하던 게스트들도 전국 방송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방송을 통해 은밀한 비밀을 털어놓기도 했다. 게다가 오프라는 방송을 통해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를 고백하고 이를 통해 게스트의 상처를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기적을 행하고 있다. 단지 ‘10대 때 성폭행을 당한 불행한 흑인여성’ 이 미국 최고의 갑부가 되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그러한 치부를 솔직하고 당당하게 드러내고 참회하는 시간으로 만드는 그녀의 방송은 여러 사람들에게 신선함과 함께 새로운 충격이라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특히 오프라는 방송 시작 때 끊임없이 가정에서 흔들리는 ‘여성’들을 토크쇼의 게스트로 내세웠는데, 가정폭력, 성폭행과 근친상간 등 민감한 소재들이 게스트로 초빙된 ‘위기의 주부들’에 의해 TV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프로그램은 시사 프로그램보다는 다소 가벼웠지만 정치·사회적 이슈를 즐겨 다루던 ‘필 도나휴’ 같은 기존 인기프로그램보다 훨씬 사적이고 자극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여졌다. 방송 초창기 ‘뉴스위크’는 그러한 소재의 방송에 대해 “거리에서 주워들은 지식이나 늘어놓는 여자”라며 혹평을 했지만, ‘오프라 윈프리 쇼’는 그런 소재들을 자극적인 구경거리로 만드는 대신 토크 쇼의 주 시청자층인 여성들이 자신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고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게 했다. 예를 들어 성형중독자가 출연하면 그의 기괴한 얼굴을 부각시키는 대신, 그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하고 행동에 정신적 원인이 있음을 밝혀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결 나은 상태로 변화하도록 돕는 식이다. 일전에 마이클 잭슨의 전 부인이었던 리사 마리 프레슬리에게 잭슨과의 결혼생활을 물어보면서도, 그것을 단지 사적인 가십거리가 아니라 남성에게 상처받은 여성의 이야기로 확대시켰다.

또한 인기 미국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 배우들이 출연했을 때도 그들의 사생활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드라마 내용과 비슷한 사례를 겪는 주부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이러한 배경에는 오프라의 성폭행 사실 고백과 뚱보였던 그녀가 체중감량을 위해 노력했던 이력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그것들을 단순히 센세이셔널한 이슈가 아니라, 한 여성이 상처를 딛고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 줌으로써 시청자들에게 자신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는 한 명의 여성이고 그만큼 그들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불어넣었다. 이후 이러한 국한된 범위에서 벗어나 오프라는 인터뷰 이외에도 여성들의 건강이나 사회적 당면과제, 패션, 자아발전 등을 주제로 프로그램의 질을 높여나갔다. 이제 그녀의 방송은 미국은 물론 아프리카, 중동 등의 자연재해, 민족학살, 전쟁 폐해 등 다양한 내용을 다루며 다양한 계층의 팬들을 확보해 가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성공의 비결
초기 시절, 선배인 바바라 월터스는 “인종 차별이 심한 남부 지방에서 흑인으로서 성장하던 시절은 어땠는가? 상당한 고통을 안겨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질문했다. 오프라는 “나는 아주 어렸을 때 깨달았다. 노력하는 사람의 우수함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이라며 단호히 말했다.

오프라 윈프리는 ‘포브스’가 2006년 세계 부호 순위 242위에 선정한 대부호다. 토크쇼 진행자뿐만 아니라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영역으로 진출하여 사업가로 이룬 성공은 전대미문의 일이기도 하다. ‘오프라 윈프리 쇼’의 제작, 잡지 ‘0 매거진’, 디즈니 등을 통한 영화 제작, 유통 등을 주로 하는 ‘Harpo 프로덕션’을 소유하고 있는 오프라 윈프리의 회사들은 모두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업방향은 일관되게, 하지만 영역을 다양하게 구축함으로써 성공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성공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법칙 중 하나는 강력한 지지자그룹이다. “똑같은 패턴의 답장은 하지 않겠다”며 일부 편지에 직접 답장을 하는 그녀는, 시청자의 집에 갑자기 찾아가 그들이 자신의 프로그램을 시청하는지 보기도 하고,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직접 초청해 함께 식사하면서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기도 한다. 또한 자신의 쇼에 출연한 출연자들과의 포옹 등을 통해 정서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창출하는데도 능하다. 이러한 부분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오프라 윈프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따뜻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오프라는 자신의 약점은 타인과의 공통점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현재 더 이상 가난한 흑인 여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종종 토크쇼를 통해 자신이 ‘뚱뚱한 흑인 여성’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예전 에르메스 매장에서 자신을 몰라 본 직원에 의해 문전박대 당한 것을 흑인 여성에 대한 인종 차별의 문제로 이슈화시킨 것이나, 자신의 체중 문제를 통해 뚱뚱한 여성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를 통해 그녀는 자신을 ‘평범한 미국 여성’으로 다른 이들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 오프라는 매년 한 번씩 토크 쇼 방청객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신상품을 나눠주고 있다. 지난 2004년에는 방청객 276명에게 폰티악 신형 G6 세단을 한 대씩 나눠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그 모든 고통의 시간들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성공 여성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지적 탐구’에의 열정 때문이다. 오프라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꼭 일주일에 책 한 권을 읽게 할 정도로 독서를 중요시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오늘날 ‘출판업계의 마이다스’가 된 그녀가 괜찮다고 추천하는 책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된다. 수년 전부터 자신의 쇼에 ‘오프라의 북클럽’을 진행하며 책을 소개해 오고 있는데, ‘오프라 현상’이라고 할 정도로 북클럽을 통해 그동안 연속적으로 수십 권의 베스트셀러가 탄생했으며 출판업자들에게 안겨준 매출만 하더라도 수억 달러에 달한다. 오프라가 소개하는 책들은 대부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으며, 로맨스 대신 여성의 상처와 자기 치유의 과정이 담겨 있다. 이 코너를 통해 오프라는 어떤 창작활동을 하지 않고도 자신이 얼마나 교양 있는 사람인지 자연스럽게 보여줬다. 시청자들은 그녀가 가진 권위가 아니라 그가 제시하는 여성의 삶에 대한 자기 발전에 대한 가르침을 믿고 책을 구입하는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이 거부인 것을 숨기지 않지만, 부유함을 표현하는 방식이 남과 다르다. “부유해져서 좋아진 것이 뭐냐”는 질문에 “고민하던 두 개의 5달러짜리 물건을 모두 살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할 만큼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늘 잊지 않고 있다. 특히 어렵고 힘든 생활을 했던 과거만 가지고 푸념하는 것이 아니라, 행활 속에서 자신과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에게 행하는 오프라 윈프리의 사회사업은 유명하다. ‘오프라 윈프리 쇼’를 통해 가정폭력 등을 사회적으로 이슈화시킨 것은 물론, 여성과 아동, 흑인 등을 위한 복지사업을 해 오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정치색을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인도주의, 평등과 같은 관점에서만 움직이고 있다. 대통령 출마 권유에 굉장한 화를 낸 것으로 알려진 오프라는 흑인 민권운동에는 적극적이지만 정치세력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이러한 철저한 법칙과 관리를 해 오며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있는 오프라 윈프리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면서도 가장 눈에 띄게 활동하는 여성으로 꼽히고 있다. 자신의 약점인 피부색과 남부 출신의 가난함, 불행했던 10대 시절을 떨치고 일어나 ‘오프라 윈프리 쇼’의 프리마돈나로 발전해 가고 있는 오프라가 배우로서,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자로서, 사업가로서 언제나 우리 곁에 남아 있는 ‘살아있는 신화’로 기억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 오프라 윈프리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자선활동은 그녀의 특이한 스타일로 인해 유독 다른 사람보다 눈에 띄며 확실한 파급효과를 전파하고 있다.
오프라 윈프리의 삶이 아름다운 이유
오프라 윈프리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자선활동은 그녀의 특이한 스타일로 인해 유독 다른 사람보다 눈에 띄며 확실한 파급효과를 전파하고 있다. 오프라는 매년 한 번씩 토크 쇼 방청객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신상품을 나눠주고 있다. 지난 2004년에는 방청객 276명에게 폰티악 신형 G6 세단을 한 대씩 나눠주기도 했다. 또한 어려운 여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모금활동은 미 전국에서 끊임없이 들어오는 손길로 100만 달러를 달성했으며, 오프라가 같은 액수로 맞추어 총 200만 달러를 전달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오프라는 어려운 가정을 직접 방문해 선물을 전달하기도 한다. 한 번은 어린이 5~6명이 방 두 칸에서 생활하는 홀어머니 가정을 방문해 자녀들에게 장난감과 컴퓨터, 필기도구 등을 모두 사줬다. 하지만 비단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욱 나가는 것이 오프라의 방식이다. 오프라는 방청객들에게 “집이 너무 작아서 아이들에게 사 준 물건이 다 들어가지 않을 것 같죠?”라고 물어본 뒤, 이 가족에게 집 한 채를 선사했다. 또 어릴 적부터 환경보호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는 한인 대니 서에게 자신의 쇼에 출연하는 조건으로 빈민가정을 위한 주택마련을 할 수 있는 액수를 모금하면 흔쾌히 승낙하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많은 자선활동을 주최해 봤던 대니 서는 물론 모금액 달성에 성공했고, 오프라는 그와의 약속을 지켜 손쉽게 환경보호는 물론 자선활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기도 했다.

오프라는 슈퍼모델 같은 몸매도, 패리스 힐튼의 부도 가지지 못한, 하루하루를 체중감량과 크리스피 도넛 사이에서의 갈등 속에 사는 여성들에게 언제나 지혜를 알려주는 영적 지도자 같은 인물이다. 사회와 TV 주류의 관심 바깥에 있던 여성의 이야기와 여성의 자기 발전이 사회적 테마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큰 사례적인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 쇼’가 미국뿐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그 여성들의 이야기가 전 세계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방송계 진출을 꿈꾸는 사람에게서 한 번쯤은 누구나 “한국의 오프라 윈프리처럼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일수록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들이 있다. 단지 그녀가 뛰어난 말솜씨와 술수로 토크 쇼의 프리마돈나로 오늘날 성공을 거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애정과 그와 함께 파생되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해결 노력, 자신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진심으로 함께 아파하고 공감해 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점이다.

자신에 과거에 대한 솔직한 고백과 공감을 통해 언제나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그녀의 노력들은, 상처받은 영혼들을 치유하고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에너지를 전파하고 있다. “어린 시절 어떤 목회 프로그램에서 제시 잭슨 목사가 말한 것을 들었다. 남보다 뛰어나다는 것이 인종 차별이나 성 차별에 대항하는 가장 큰 무기라고. 그게 내 삶의 좌우명이 됐다. 그리고 이제는 내 인생에서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은 무엇을 하든 다른 사람들에게 최선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나는 ‘오프라 윈프리 쇼’를 통해 내가 바라는 세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나와 함께 높이 들어 올리는 것, 그들을 내가 있는 곳까지 인도하는 것이다”라는 그녀의 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며 앞으로도 많은 기적의 감동을 전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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