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간의 콜라전쟁’에서 만년 2위 펩시를 1위로 등극 시킨 인드라 누이

보수적인 힌두교 집안 인도여성이 펩시 CEO가 되기까지

   
▲ 인드라 누이는 격이 없는 커뮤니케이션을 하며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만약 여러분(주주)이 원하는 유일한 것이 회사의 두 자릿수 성장이라면 나는 여러분이 원하는 CEO가 아닙니다”고 말한 바 있다.
인드라 누이는 전형적인 인도인이다. 인도 남부 첸나이(옛 마드라스)의 보수적인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명문 마드라스대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인도경영대(IIM)에서 경영학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인도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1978년 훌쩍 미국으로 건너와 예일대 경영대학원에서 다시 경영학석사(MBA)를 받고 보스턴컨설팅그룹(BCG), 모토로라(Motorola) 등에서 전략기획 분야를 담당하며 명성을 쌓았다. 그 결과, 1994년 펩시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고, 인드라 누이의 능력을 인정한 제너럴일렉트릭(GE)의 당시 회장인 잭 웰치도 ‘모셔’ 가려 해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그러나 당시 펩시 최고경영자(CEO)였던 웨인 칼로웨이 는 인드라 누이를 만나 이렇게 설득했다. “GE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회사일 겁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펩시를 당신을 위한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겠습니다.” 펩시에서는 CEO 급 여성이 없었으며, 다른 나라 문화와 인종을 가진 인재가 없어서 인드라 누이와 같은 다른 문화 경험을 지닌 사람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그녀는 1994년 펩시를 선택하고 펩시의 운명을 바꿀만한 변혁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를 선택한 펩시의 선택 또한 옳았다. 100년 동안 만년 2등이었던 펩시가 코카콜라를 따돌리고 업계 1위에 올라서게 된 데는 시장 변화를 읽고 발 빠르게 대처한 인드라 누이의 능력이 큰 몫을 담당했다. “여자로, 외국인으로 태어났다면 그 누구보다도 더 영리해져야 합니다.” 부사장, 최고재무관리자(CFO)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여성 최초로 펩시 CEO가 된 데 이어, 회장직까지 겸하게 된다.

펩시, 기존의 틀 깨고 웰빙 음료로 대변신에 성공하다

   

▲ 인도 일부 주에서 ‘농약 콜라’ 파동으로 두 회사가 이미지에 타격을 입고 있는 가운데 펩시는 인도 여성을 대표로 내세우며 한발 빨리 대응하고 있다.


펩시는 ‘콜라’로서는 도저히 코카콜라를 누를 수 없다는 사실과 사람들의 입맛이 점점 웰빙화 되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해 발빠르게 제품 다각화를 추진했다. 1990년대 후반 당시는 세계적으로 ‘웰빙(well-being)’바람이 불었고, 그는 탄산음료 시장의 한계를 예측했다. 당시 전략기획과 구조조정 업무를 도맡아 온 인드라 누이는 ‘건강음료’와 ‘식품’으로 사업 분야를 넓히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KFC, 피자헛, 타코벨의 분할 매각에도 앞장섰다. 결국 이들 외식업체를 찾는 소비자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던 펩시콜라를 마시게 됐고, 어느덧 그 맛에 익숙해졌다. 펩시는 여기서 머물지 않고 주스 생산업체 트로피카나(Tropicana) 인수를 주도했다. 펩시는 아침에 마실 수 있는 음료를 개발하기 위해 당시 최고의 주스 브랜드였던 트로피카나를 1998년에 인수했다. “사실 콜라를 아침에 마시긴 그렇잖아요. 그래서 아침에 마실 수 있는 음료가 필요했어요. 당시 트로피카나가 최고의 주스 브랜드였어요” 그는 말했다. 이후에도 펩시가 코카콜라를 제치게 된 또 한번의 결정적인 일은 2001년 이온음료 ‘게토레이’ 생산업체인 퀘이커오츠(Quaker oats) 인수였다. 그녀는 2001년 퀘이커 오츠를 인수하기 위해 절에 다녀가기도 했다. “펩시코로서는 회사의 운명을 바꿀 만한 것이였죠. 그래서 신께도 도움을 받아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절에 갔습니다.” 그녀의 말처럼 회사의 운명은 바뀌었다.
당시 스포츠음료 시장에서 83%의 점유율을 보이던 퀘이커오츠를 눈독들이긴 코카콜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157억 달러(약 14조 3,812억 원)를 제시한 코카콜라가 인수하는 듯했으나, 당시 코카콜라 이사였던 ‘투자의 귀재’ 워런버핏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 너무 비싸고, 독점금지법에 걸릴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코카콜라가 주춤하는 사이, 당시 펩시 CEO 로저 엔리코는 인드라 누이가 써 준 134억 달러(약 12조 2,744억 원)를 그대로 제시해 퀘이커오츠를 손에 넣었다. 그녀의 주장으로 134억 달러를 써내 스낵업체 퀘이커오츠를 인수한 건을 두고 당시 대표였던 로저 엔리코는 “펩시콜라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결정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제품 다각화 결과 펩시의 사업 부문에서 탄산음료 이외 스포츠음료·과일주스·스낵·유통 등이 전체 매출의 80%를 차지하게 됐다.
급기야 2005년 12월에는 기업 가치로도 펩시가 코카콜라를 앞서는 이변이 일어났다. 당시 펩시는 시가총액 984억 달러로 965억 달러에 머무른 코카콜라를 보란 듯 제쳤다. 코카콜라 주가는 네빌 아이스델이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18개월 동안 무려 17%나 떨어졌다. 그 사이 펩시 주가는 꾸준히 상승했다. 코카콜라가 100년 넘게 쌓은 아성은 만년 2위일 줄로만 알았던 펩시에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코카콜라를 가치투자의 대표 종목으로 꼽았던 전설의 투자자 워런 버핏이 울고 갈 일이었다.

코카콜라를 제치고 펩시(PepsiCo, Inc.)를 1위로 만들다

   
▲ 업계 후발주자란 약점을 오히려 마케팅에 적극 활용한 펩시는 코카콜라는 ‘낡은 것’, 펩시는 ‘새로운 세대’란 이미지를 심는 데 주력했다.
몇 년 전까지 사람들은 코카콜라와 펩시는 전통의 라이벌이지만 그래도 코카콜라가 한 수 위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1886년 창립돼 120년째가 된 코카콜라가 12년 뒤인 1898년 태어난 펩시보다 전통에서 앞섰기 때문이다. 인드라 누이는 만년 2등이던 펩시를 업계 1등으로 만드는 데 가장 크게 공헌한 인물로 꼽힌다. 콜라 판매 증가세가 다소 둔화됐을 당시, 건강 신드롬이 일 때마다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으로 넘길 수도 있었다. 적어도 코카콜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1982년 이른바 ‘다이어트 콜라’를 출시한 이후로 코카콜라는 이렇다 할 대응책을 찾지 않았다. 역시 콜라가 비난의 표적이 됐다고 주력 상품인 콜라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콜라뿐이 아니다. 매출과 영업이익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프리토레이 스낵 생산을 중단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프리토레이는 소금이 함유된 과자 시장의 60%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펩시는 코카콜라처럼 남의 일로 방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웰빙 열풍이 몰고 온 위기를 기회로 삼아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건강음료 시장에서 새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세를 편 것이다. 제품 구성을 지방과 설탕, 나트륨 함유율이 낮고 칼슘처럼 몸에 좋은 성분 함유율이 높은 과자와 음료로 재조정했다. 이 때문에 제조원가가 올라 제품 가격 인상이 불가피했지만 충분히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건강에 좋으면 비싸도 좋다는 사람이 점차 늘고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펩시는 건강에 좋은 성분을 보강해 기존 제품을 개선했다. 콜레스테롤·심장병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지방산을 제거한 새로운 도리토스·치토스·토스티토스 제품을 시장에 내놓았다. 여기에 과일 주스, 이온 음료, 생수 등 건강에 좋다는 음료를 잇따라 출시했다. 그 결과 펩시의 탄산음료 비중은 20%대로 줄어들었다. 펩시는 더 이상 콜라 브랜드가 아니었다. 반면 그때까지도 코카콜라의 탄산음료 비중은 80%에 육박했다. 펩시의 이런 변신이 처음부터 호응을 얻은 것은 아니다. 새로 출시한 식품이 건강에 해롭지 않다는 펩시의 광고를 100% 믿어줄 소비자도 없었지만, 펩시가 쏟아내는 새 음료와 과자가 정말로 건강에 해롭지 않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었겠는가.
펩시는 자체적으로 제품이 건강에 유해한지 검사해 합격하면 ‘스마트 스폿(Smart Spot)’이란 스티커를 붙여 소비자에게 믿어달라고 호소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적어도 펩시의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바뀐것 만큼은 분명했다.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은 코카콜라와 비교하면 확실히 그랬다. 코카콜라는 변화에 두려움이 있었거나 아니면 변화하지 않고도 오랫동안 누려 온 영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다. 펩시가 발 빠르게 사업을 다각화하는 것을 뻔히 지켜보면서도 이렇다 할 사업 아이템을 내놓지 못했다. 다른 식품이나 소비재 쪽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할 충분한 자금(적어도 50억 달러)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96년 펩시가 사업 다각화 전략을 내놓자 당시 코카콜라의 회장은 “더 이상 펩시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다”고 선언했다.

‘펩시 세대’ 캠페인으로 이미지 전쟁에서도 승리한 펩시

   
▲ 펩시가 코카콜라를 이긴 비결은 ‘확실한 2등’ 전략에서도 찾을 수 있다. 펩시는 코카콜라와 양강 구도를 만들기 위한 전략을 구사했다. 2위 자리를 뺏거나 노리는 만만찮은 경쟁사들을 확실하게 따돌리기 위해 가격을 파격적으로 인하한 것이다.

펩시가 웰빙브랜드이미지를 강화하는 동안 코카콜라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이 속출했다. 미국에서 회계부정 스캔들에 휘말리는가 하면, 유럽에선 독점 관련 소송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콜롬비아 공장에서는 노동자를 탄압했다는 비난을 받고, 인도 공장에서는 환경을 오염시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콜라 원액 가격을 인상하려는 남미 협력업체들과의 갈등도 끊이질 않았다. 모든 것이 변화보다는 기존의 관행을 고수하려는 경영 마인드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면, 인도 일부 주에서 ‘농약 콜라’ 파동으로 두 회사가 이미지에 타격을 입고 있는 가운데 펩시는 인도 여성을 대표로 내세우며 한발 빨리 대응하고 있다. 한번은 코카콜라 임원 여비서가 “코카콜라 맛의 비밀을 팔겠다”는 제의를 해오자, 오히려 펩시가 코카콜라 측에 이 사실을 통보해 줌으로써 이젠 여유 있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다.
마케팅면에서도 1960년대부터 시작한 ‘펩시 세대’ 캠페인은 큰 효과를 봤다. 자신이 형이 아니라 동생이라는 위치를 마케팅에 적극 활용, 코카콜라를 낡고 보수적인 것으로 몰아붙이고 자신은 영원한 새로운 세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펩시는 코카콜라와 나이 차가 고작 7년밖에 안 나는데도 엄청난 세대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10대의 반항적 이미지를 담기 위해 젊은 시절의 마이클 잭슨·라이오넬 리치·마돈나 등을 광고에 등장시켰다. 이와 같은 ‘브랜드 포지셔닝(brand positioning)’을 통해 미래에 주고객층을 형성할 청소년에게 자사제품을 집중적으로 홍보했다. 
1970년대 중반 TV를 통해 내보낸 광고도 코카콜라를 추격하는데 주효했다. 눈을 가리고 콜라를 마시던 사람이 눈가리개를 벗으며 “어~ 펩시잖아!”를 외치게 하는 장면이었다. 입소문이나 이벤트로 인지도를 높이는 ‘버즈(buzz) 마케팅’을 사용해 8년 만에 30%포인트 나던 시장점유율 차이를 10%포인트까지 좁히는 데 성공했다. 펩시가 코카콜라를 이긴 비결은 ‘확실한 2등’ 전략에서도 찾을 수 있다. 펩시는 코카콜라와 양강 구도를 만들기 위한 전략을 구사했다. 2위 자리를 뺏거나 노리는 만만찮은 경쟁사들을 확실하게 따돌리기 위해 가격을 파격적으로 인하한 것이다. 심지어 절반으로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이는 두 가지 효과를 가져왔다. 닥터페퍼나 로열 크라운 같은 경쟁업체들은 펩시와 경쟁하려면 어쩔 수 없이 가격을 내려야 했고, 그 과정에서 경쟁력을 잃어갔다. 이들 업체가 체력이 소진한 것을 확인한 후, 펩시는 다시 가격을 정상화했다. 아주 짧은 기간에 3위 이하 업체들을 저만치 따돌리고, 펩시는 코카콜라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전통의상 입은 채 최신가요 열창하는 CEO, 인드라 누이
   
▲ 3억 인구의 절반 이상이 여성인 미국에서 여성 임원의 비율은 15%에 불과하다. 가장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보장한다는 미국에서도 이민 2세도 아닌, 대학까지 인도에서 마친 외국인 여성이 110년 전통을 자랑하는 펩시 최초의 여성 CEO에 오른 것은 유리 천장도 보통 유리가 아닌 ‘방탄 유리 천장’을 뚫은 사건으로 주목받았다.
인드라 누이는 결단력 있으면서도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공식석상에서도 ‘사리’를 즐겨 입고 회사행사에 나타나 인기가요를 열창하며, 투자자 회의 때 단상에 걸터앉아 직원들과 격의 없는 커뮤니케이션을 나누는 등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자신만의 경영 노하우를 정립해가고 있다. 인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점에서 다양성 존중이 기업 경쟁력으로 존중받는 현재의 경영 환경에 맞다는 평가다.
인드라 누이는 동료직원들에게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온전히 쏟아 부으라. 일을 끝냈을 때 여유가 남아 있다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항상 ‘일과 가정의 조화’를 강조한다. 누이가 펩시 CEO가 되던 날, 그의 어머니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집에 들어올 때는 네가 밖에서 썼던 왕관을 벗어 놓고 와야 한다. 집에서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내이자 엄마라는 자리란다.” 누이 스스로도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은 훌륭한 CEO가 되어야지. 하지만 2시간은 좋은 엄마가 되고, 30분 동안은 좋은 아내가 되어야지’ 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안드라 누이는 격의 없는 커뮤니케이션을 하며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만약 여러분(주주)이 원하는 유일한 것이 회사의 두 자릿수 성장이라면 나는 여러분이 원하는 CEO가 아닙니다”고 말한 바 있다. 단기성과를 바라는 주주에게 “아니요(No)”라고 외치는 CEO라는 것이다. 그러나 펩시는 매출이 12% 오른 395억 달러로 두 자릿수 성장을 기록했다.
사회적 문제에도 관심을 보이는 누이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의 공동의장을 맡고 다보스포럼에서 “밀 가격이 지난 3년간 거의 두 배나 올라 밀을 원료로 하는 스낵과 청량음료 비즈니스에도 타격이 불가피하다”며 “식품 가격 상승은 앞으로 2~3년 동안 더 지속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놨다. 그는 특히 “식품 가격 인플레이션이 단순한 가격 문제가 아닌 정부와 에탄올 지원금이 만들어 낸 문제”라면서 “바이오 연료가 친환경 연료로 각광받자 각국 정부가 에탄올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이 같은 추세가 악화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펩시에서의 임기가 끝나면 정계로 진출 할 것이라는 일각의 소문에 대해서는 “워싱턴 정계로 진출하고 싶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 단지 이 나라에 보은하고 싶다는 뜻이였다” 라는 말로 일축했다.
3억 인구의 절반 이상이 여성인 미국에서 여성 임원의 비율은 15%에 불과하다. 한 단계 더 눈을 높여 최고경영자(CEO) 군(群)을 살펴보면 여성의 생존율은 더욱 희박해 진다. 가장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보장한다는 미국에서도 이민 2세도 아닌, 대학까지 인도에서 마친 외국인 여성이 110년 전통을 자랑하는 펩시 최초의 여성 CEO에 오른 것은 유리 천장도 보통 유리가 아닌 ‘방탄 유리 천장’을 뚫은 사건으로 주목받았다.
인드라 누이 펩시 CEO 겸 회장이 지난해 CEO에 임명됐을 때 화제를 모은 것은 아무래도 이 같은 현실을 넘어섰기 때문이란 측면이 강했다. 인드라 누이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발표한 ‘투자자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CEO’ 10위에 이름을 올리며 높은 수익성으로 투자자들에게 매력 있는 유일한 동양인 여성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저작권자 © 시사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