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 홀릭’ 변호사에서 4만 2,000명 거느린 CEO로

   
▲ 안젤라 브랠리가 일궈낸 실적 자체가 웰포인트의 성공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5,000만 명이 의료보험 없이 사는 나라 미국에서 의료보험 논쟁에 불을 지폈다는 평가다.
앤젤라 브랠리(Angela Braly) 누구인가
앤젤라 브랠리는 8년 전까지만 해도 잘나가는 변호사였다. 텍사스공대와 서던메소디스트대학원을 졸업하고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로펌 루이스 라이스 앤드 핑거시에서 파트너로 일했다. 퇴근할 때마다 엄청난 양의 문서를 집에 들고 오는 워커홀릭(일 중독자)이었다.
이런 그와 의료보험업계와의 만남은 1999년 우연히 이뤄졌다. 보험업체 라이트초이스와 헬스링크의 합병 과정에서 거액의 세금 분쟁을 맡게 된 것. 비영리 건강관리기금을 설립해 세금 문제를 뛰어넘자는 그의 아이디어는 판결에서 거부당했다. 하지만 상대편을 거듭 만나 설득해나가는 그의 끈기와 논쟁력은 이때부터 빛을 발했다.
당시 그를 지켜본 동료 존 라이플은 “연방정부와 검사 측은 협상 과정에서 오직 브랠리의 이야기에만 귀 기울였다”며 “결국 브랠리는 죽어가던 딜을 살려내며 영웅으로 떠올랐다”고 회상했다. 라이트초이스는 그를 놓치지 않고 전임 법률고문으로 기용했다. 2003년 브랠리는 라이트초이스를 인수한 웰포인트의 미주리 지사장에 올랐다. 2004년 경쟁사인 앤섬과의 합병 과정에서는 전공을 살려 각종 규제를 극복하는데 큰 몫을 했다. 이를 유심히 본 래리 글래스콕(당시 CEO)은 1년 뒤 브랠리를 인디애나폴리스의 웰포인트 본사로 불러들였다. 그는 웰포인트의 법률고문 겸 공보담당자가 됐다. 거기서도 뉴욕의 엠파이어블루크로스 인수 등에 기여하며 웰포인트를 업계 정상에 올려놓는데 공을 세웠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업계 신인에 속했다. 올 초 웰포인트가 차기 CEO 선정 작업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브랠리는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하지만 외부에서 마땅한 인물을 찾지못한 이사회가 내부로 시야를 좁히면서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이사회가 세 아이의 엄마로서 CEO를 맡을 수 있겠느냐고 묻자 브랠리는 “아이들이 어린만큼 쉽지는 않을 것” 이라며 이사회와의 다음 약속을 딸이 출연하는 연극 때문에 한 번 미루기까지 했다. 브랠리는 “내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다”며 오히려 당당하게 임했다.
당시 선정 작업에 참여했던 한 경영진은 브랠리에 대해 “진실성과 신뢰로 어필했을 뿐 아니라 문제를 이해하고 전략을 수립하는 능력도 뛰어났다”며 “무엇보다도 그보다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결국 이사회는 ‘공공 정책에 강하며 사사로움이 없다’는 이유로 그를 선택했다. 애널리스트들은 대이변이라고 토를 달았지만 브랠리는 “그렇게 과민 반응할 게 아니다”며 가볍게 넘겨버렸다.
이렇게 브랠리는 사령탑을 맡아 4만 2,000명의 직원을 이끌며 3,500만 명의 가입자와 연 매출 600억 달러를 달성했다. 웰초이스와 65억 달러에 이르는 합병도 잘 조율했다는 평가다. 안젤라 브랠리가 일궈낸 실적 자체가 웰포인트의 성공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5,000만 명이 의료보험 없이 사는 나라 미국에서 의료보험 논쟁에 불을 지폈다는 평가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의사들과 첨단 장비들이 갖춰진 미국이지만 ‘돈’이 있어야만 기회가 생긴다. 브랠리는 돈 없고 병력이 있는 환자들을 사각지대에 방치했던 의료제도에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함을 느꼈다.

의료보험업계의 ‘터미네이터’
CEO로서 브랠리의 첫해는 쉽지 않았다. 웰포인트를 맡은 지 2주 만에 ‘볼링 포 콜럼바인’과 ‘화씨 9/11’의 마이클 무어 감독의 신작 ‘식코’가 개봉됐다. 미국의 건강보험 제도를 비판하는 다큐멘터리다. ‘식코’는 이윤에 목마른 미국 민영 의료보험체제를 노골적으로 꼬집고 있다. 돈 없고 병력이 있는 환자를 의료제도의 사각지대에 방치해 결국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면서 마이클 무어 감독은 특유의 노골적이고도 직접적인 논리로 이를 비판하고 있다.
‘식코’는 미국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차기정부의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폐지 반대 및 민영 건강보험의 등장을 우려해온 시민단체와 사회보험노조 등이 ‘식코’ 보기 운동 등을 펼쳤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무어 감독은 이 영화에서 환자들에게 보험 적용을 거부하는 사례를 열거하며 브랠리를 ‘공공의 적’으로 꼽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브랠리는 “모든 국민이 비슷한 수준의 건강 보장을 받는 것은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불가능하다”라는 의견을 내세우며 “우리는 비용과 질을 개선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대중의 비판이 이어지겠지만 어쩔 수 없다”라고 말했다. 대신 사용자별로 다양한 유형의 보험 상품을 개발해 더 많은 고객을 소비자로 끌어들일 것을 주장했다.
변호사 출신으로서 대정부 업무와 총괄 상담역을 훌륭히 수행했던 브랠리는 웰포인트의 대표적 건강보험 상품인 ‘블루실드’를 둘러싸고 제기된 법정 소송도 원만히 해결하는 성과를 냈다. 그녀는 바쁜 시간을 쪼개 직접 전 지역의 종업원들과 고객, 병원 관계자들을 만나러 다니는 등 직접 발로 뛰며 홍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인터뷰에서도 “다른 건강보험사와의 차이점을 만들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지난해 월스트리트저널(WSJ)에서도  브랠리를 세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여성 50인 가운데 1위로 꼽으며 “거대한 건강보험사의 새 CEO로서 올해 미국 기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라며 “건강보험 관련 소송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소리”라고 평가한 바 있다.

성공의 열쇠는 소신과 자기 투자
안젤라 브랠리는 자신의 성공의 열쇠를 ‘소신과 자기 투자’로 꼽는다. 변호사 시절 그는 남자들이 대부분인 지역 스포츠클럽에 가입했다. 고객을 찾고 관리하는 데 그보다 좋은 취미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거의 유일한 여성 참가자였던 만큼 매년 올해의 여성선수상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한 발짝 나아가는 데 주저한다”며 여성들에게 성별 구분을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에 도전할 것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더 많은 여성들이 ‘유리천장’(여성에 대한 승진의 벽)을 깨고 여성 리더십의 영역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시대도 이를 받아들일 만큼 달라지고 있다고 낙관한다. “여성들은 이제 모든 지위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 이제 ‘우리가 간다’가 아니라 ‘여기 우리가 왔다’를 외쳐야 할 때다”라고 답했다.
올 초 아놀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건강보험 확대 방안을 발표 했을 때, 다른 보험사들은 적극적인 동의 의사를 밝혔으나 웰포인트는 달랐다. 저소득층 성인과 아동을 위한 건강보험 확대는 찬성하지만 모든 주민들을 상대로 한 건강보험에는 반대하고 나선 것. 성과 없는 건강보험 확대보다는 개개인의 실정에 알맞은 보험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다. 소신을 굽히지 않고 비효율적인 미국의 의료정책에 대한 정치적 역할도 훌륭히 소화해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브랠리는 민간보험의 효율성이 미국인의 건강수준을 높이는 열쇠라고 맞서며 이 문제를 쟁점화하고 있다. 이렇듯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다 보니 적도 많을 수밖에 없다. 특히 이윤 추구가 목적인 사보험 업계를 악당처럼 생각하는 시민단체들에 집중포화를 받고 있기도 하지만 브랠리는 최대 의료보험회사 CEO로서 업계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라고 공언한다.

美기업 끌고가는 ‘부드러운 리더십’

   
▲ 미국 경제전문잡지 포천에 따르면 ‘미국 500대 기업’ 가운데 여성이 CEO인 기업은 웰포인트ㆍ아처 다니엘 미드랜드ㆍ펩시ㆍ제록스 등 12개로 집계됐다.

브랠리는 가족적인 기업문화를 중시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외적으로는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것처럼 완고하지만 사내에서는 부드러운 힘을 발휘한다. 이러한 여성 CEO의 감성적인 경영 마인드는 남성 CEO가 따라 하기 힘든 매력 중 하나다.
그가 고안한 ‘기분 엘리베이터’가 대표적이다. 웰포인트 직원들은 자신의 감정 상태가 ‘우울’ ‘분노’에서부터 ‘감사’ ‘깊은 통찰’에 이르는 각 단계 중 어디에 있는지 수시로 측정한다. 브랠리는 회의 중 참석자의 기분 엘리베이터가 어느 높이에 있는지 묻고 모두 일정 단계에 올랐을 때 논의를 마무리한다. 소비자 중심의 접근법도 그가 강조하는 여성 CEO의 강점이다.
무엇보다 브랠리 회장은 고객에게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는 방법 모색에 관심을 쏟고 있다. 얼마 전 웰 포인트는 권위 있는 평가 가이드북인 ‘자갓(Zagat)’과의 제휴를 통해 고객들이 개개인의 건강 관련 계획을 온라인을 통해 손쉽게 관리하고 의사와의 상담도 가능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 이러한 서비스에 고객들은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브랠리는 “웰 포인트가 가치 있는 회사로 입증되기 위해 우리가 기업으로서 고객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전한다.
또한 “가족의 건강보험을 선택하는 소비자의 70%가 여성”이라며 “의료보험업계를 여성이 이끄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브랠리 역시 가정에 대한 의무를 잊지 않는다. 별도의 취미생활을 포기하고 남는 시간 전부를 가족에 투자하면 된다는 게 그의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해법이다.
아이 셋을 둔 엄마인 브랠리의 뒤에는 남편의 든든한 내조가 있다. 남편 더글러스는 브랠리가 웰포인트 경영을 맡자 회계사 일을 그만두고 양육과 가사를 전담하고 있다. 브랠리는  지난해 딸의 생일파티를 위해 웰포인트 최고의 고객인 한 매니지먼트사 팀과의 저녁 약속에 불참하는 등 가족 기념일을 일보다 우선순위에 두는 것으로 알려졌다.

   
▲ 가치투자로 유명한 벅셔 해서웨이의 워런 버핏은 최근 웰포인트 주식 보유량을 4배인 400만주로 늘렸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위기로 투자가 위축된 상황에서도 브랠리가 이끄는 웰포인트는 성장세를 유지할 것이라는 믿음을 피력했다.
초고속 기업성장의 원동력은 적극적인 시장개척노력
올해 브랠리가 야심차게 시작한 사업은 웰포인트만의 건강지수(MHI) 평가다. 3,500만 가입자를 대상으로 건강 상태를 측정하는 대규모 사업이다. 건강 수준이 개선됐을 경우 해당 보험 매니저에게 보너스가 돌아간다. 정기 건강검진과 예방 치료를 장려해 미국인의 건강관리를 실질적으로 돕겠다는 의도다. 한 달 77달러짜리 저가 보험상품도 주력으로 내놓았다. 브랠리의 적극적인 시장 개척 노력은 웰포인트를 올해 ‘빠르게 성장하는 유망기업’ 2위(포천 선정)에 올려놨다. 캘리포니아, 버지니아, 뉴욕, 조지아 등 14개 주에서 시장점유율 1위에 올랐고 올 들어 3분기까지 15% 이상의 수익증가율을 기록했다.
가치투자로 유명한 벅셔 해서웨이의 워런 버핏은 최근 웰포인트 주식 보유량을 4배인 400만 주로 늘렸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위기로 투자가 위축된 상황에서도 브랠리가 이끄는 웰포인트는 성장세를 유지할 것이라는 믿음을 피력했다. 브랠리의 앞에는 더 큰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다가올 미국 대선에서 의료보험개혁은 가장 민감한 화두가 될 전망이다. 업계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브랠리로서는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표정은 항상 여유롭다. “정치인들은 내가 가는 길에 대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논쟁의 중심에서 충격흡수제 역할을 할 사람도 나다.”
그때마다 브랠리는 경영이란 바로 ‘내 길을 가는 것’이라며 마음을 다잡는다. “매일매일 선택의 연속이다. 우회하지 말고 정직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일에 대한 열정보다 중요한 것은 옳은 일에 대한 신념이다”라며 그는 말한다.
안젤라 브랠리를 비롯하여 이번 포춘지에 선정된 여성CEO들은 선대의 후광을 받은 ‘로열 패밀리’가 아니라 자기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며 한 계단씩 오른 입지적 인물들이다. 경제전문지 포춘은 최근 ‘미국 500대 기업’을 발표하면서 건강관리 분야에서 농업과 음식, 음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눈부시다고 소개했다. 21세기 초만해도 포춘 500대 기업에 속했던 여성 CEO는 칼리 피오리나(HP), 안드레아 정(에이본 프로덕츠), 마리온 샌들러(골드웨스트 파이낸셜), 신다 홀먼(스페리온) 등 4명에 불과했으나 점차 그 수가 증가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여성 CEO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들 여성 CEO는 남성이 갖지 못한 타고난 감성과 섬세하고 냉정한 판단력을 지녔다. 또 다양한 조직 구성원들이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아름다운 화음을 내도록 조율하는 균형감각을 통해 지난해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등으로 어려운 시기를 헤쳐가는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브랠리가 웰포인트 CEO가 된 지 반년, ‘벼락출세’라는 시선은 어느새 사라졌다. 그는 주간지 포천이 선정한 상위 50대 대기업을 이끄는 첫 여성 CEO며 웰포인트는 여성이 운영하는 회사 중 세계 최대 규모다. 친근한 인상 아래 완고한 중재자의 본모습이 숨어 있는 안젤라 브랠리에 대해 많은 이들이 미국에서 가장 논쟁적인 비즈니스를 이끌 만한 인물로서 평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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