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외교정책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입지적 인물로 활약
여성의 사회적 참여율이 늘어나면서 세계 각국 정계 여성의원이 차지하는 비율은 다소 큰 상승폭을 보였다. IPU와 유엔 여성지위향상국(UNDAW)이 공동 조사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월을 기준으로 여성의원 비율은 17.7%로 2005년 15.7%에 비해 2%포인트 상승했다. 하지만 아직도 여성의원 수가 현저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 세계적인 여성 지도자의 육성에 대한 국가적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유연성, 책임성, 도덕성 등을 겸비한 21세기 창조적 여성 지도자의 출현은 해당 국가는 물론 세계적으로 선진사회를 이끌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라 전망되고 있다.


최근 미 대선과 관련해 공화당 내에서 버락 오바마와 박빙의 대결을 벌이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과 함께 애초부터 심심찮게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조지 부시 행정부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부 장관이다. 그녀는 흑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 속에서도 정확한 분석력과 판단력을 바탕으로 미국 역사상 최초로 흑인 여성 안보 보좌관이 된 입지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대통령의 외교정책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로 활약하며 관심을 끌어 온 콘돌리자 라이스는, 9.11테러 이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더욱 매스컴에 얼굴을 내 비치면서 세간의 관심을 한층 고조시켰다. 라이스는 미국 최초 여성 안보보좌관이자 흑인으로서는 콜린 파월 장관을 이어 두 번째로 외교정책부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편견과 차별을 넘은 꿈을 향한 질주
1954년 특히 인종차별이 심했던 앨라배마주 버밍험에서 교육자였던 부모 사이의 무남독녀로 태어난 콘돌리자 라이스는 극우단체인 KKK단의 폭발사고로 유치원 급우를 잃는 등 흑인 민권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했다. 라이스는 교육열이 높았던 부모님 밑에서 강력한 지원과 보호 아래 유복하게 성장했다.
1950~1960년대 가장 가혹하게 인종분리 정책이 시행되던 앨라배마였지만, 케네디 암살 이후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린든 존슨의 유색인종 시민권 확장을 위한 여러 가지 복지정책 혜택을 받은 것은 콘돌리자 라이스의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이러한 혜택으로 인해 열세 살 때는 흑백 통합반에서 공부하게 되는 변화를 겪기도 하면서, 그녀가 흑인으로서 훗날 정치 무대로 나가기 위해 준비할 수 있는 중요한 변화의 시기로 작용했다.
그녀의 이름인 ‘콘돌리자’는 이탈리아 음악용어로 ‘달콤하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만큼이나 음악에 대한 탁월한 재능을 지녀 피아노를 공부했다. 그러나 덴버대학 2학년 여름, 그녀는 아스펜 음악제에 다녀 온 후 오랜 꿈을 접게 된다. 라이스는 “11살짜리 소려가 그때까지 제가 배운 모든 것을 연주하는 거였어요. 문득 ‘카네기홀엔 가보지도 못하고 피아노 바에서 인생을 마치거나, 아이들 피아노 레슨을 하면서 베토벤이나 욕보이고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라며 음악을 포기한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대학 시절, 조지프 코벨 교수의 ‘스탈린’에 대한 국제정치학 강의를 들으며 그녀는 점점 러시아에 빠져 들어갔다. 이렇게 덴버대학에서 정치학에 대해 인연을 맺은 라이스는 토트르담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과정과 덴버대학에서 ‘국제학’ 박사과정을 이수하며 본격적으로 소련 전문가로 거듭났다.
1960년 냉전 이데올로기가 고조된 시기에 영향을 받으며 자랐던 라이스가 국제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졸업 후 타고 난 재능과 노력으로 스탠퍼드대에 자리를 잡은 그녀는 스타 교수이자 최고의 러시아 전문가로 발돋움했다. 1987년 합참의장의 전략핵정책 고문 자격으로 소련과의 핵무기 감축 협상에 참여하여 활약하기도 했다. 여성편견 그리고 인종차별의 벽을 넘어 라이스는 자신의 꿈과 희망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해 나갔다.

부시 정부의 외교정책 핵심인물로
콘돌리자 라이스는 성장하면서 민주당의 복지정책과 흑인 시민권 확대의 혜택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배경의 영향으로 인해 라이스는 처음 민주당원으로서 지미 카터 대통령을 지지했다. 하지만 카터가 소련이 체코를 침공하는 것에 대해 경악하는 것을 보며 그의 국제정치 감각에 실망을 느끼고 공화당원으로 이적하게 된다.
34세에 조지 H 부시 행정부 당시 소련 자문역을 맡아 정계에 입문하게 된 라이스는 탄탄한 지식과 반대파를 끌어들이는 설득력으로 큰 일을 처리하는 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일례로 1989년 몰타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에서 부시 전 대통령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에게 라이스를 가리키며 “내가 소련에 대해 아는 것은 전부 이 사람이 들려준 것”이라며 그녀를 소개할 정도로 소련 정세에 정통했다. 또한 라이스를 만난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도 훗날 “그녀는 내가 아는 소련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라이스는 2001년 현 부시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흑인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국가안보보좌관을 맡았으며, 정확한 분석력과 빠른 판단력을 겸비하여 주요 현안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을 받았다. 부시 전 대통령은 “콘돌리자 라이스는 큰 사건을 해결하는 요령과 방법을 알고 있다. 그녀가 설명하면 모두가 이해하게 된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녀의 타고난 능력과 판단력을 신뢰했으며, 워싱턴 주재의 유럽대사는 “다양한 문제가 함축된 현상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하는 특이한 능력의 소유자” 라고 평했다.
부시 대통령이 2004년 말 재선에 성공하면서, 라이스는 2005년 부시 2기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맡게 됐다. 정부 안보보좌관으로 일하는 동안 주말에도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 목장에서 부시 부부와 지낼 정도로 대통령의 측근으로 인식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그녀를 ‘콘디’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강한 인간적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라크 전쟁 시 이를 공개적으로 옹호해 주전론자 및 강경파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 그녀는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를 중재하며 실리를 중시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 부자와 모두 깊은 인연을 맺게 된 라이스는 국제정치에 현실주의 시각으로 보며 문제에 접근했다. 즉, 강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하는 국력을 중시하고 국익을 우선으로 하는 외교정책을 펼쳐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녀의 정치적 관점은 조지 W 부시 선거전의 ‘How to Pursue the National Interest’란 글에서 잘 피력하고 있다. 라이스는 냉전종식 이후 클린턴의 군비 축소는 군대가 나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국익을 우선하지 않은 국제사회에 대한 미군의 무분별한 군사 개입을 비난했다. 또한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정부의 이러한 실책을 수정하는 과제를 안고 있으며, 대통령의 임무는 내일의 가능성과 오늘의 현실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자유와 번영, 평화를 위해 미국정치는 국제적이어야 하지만 이는 환상적인 국제사회의 이익이 아니라 국익의 확고한 바탕 위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라이스의 이에 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가 바로 2001년 전 세계를 경악케 만들었던 9.11테러 때였다. 세상은 이 엄청난 사태에 대해 미국이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 주목하고 있었다. 초강대국인 미국의 외교향방에 중요한 영향을 주고 있는 콘돌리자 라이스에게 시선이 몰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라이스는 테러와의 전쟁을 대처하기 위한 입장을 ‘A Balance of Power That Favors Freedom’ 세 가지 원칙을 통해 밝혔다. 이것은 테러리스트와 법을 무시하는 정권의 폭력을 반대하고 예방함으로써 평화를 수호하고, 세계 강대국 간의 친선을 도모함으로써 평화를 보존하며, 전 세계에 걸쳐 평화와 번영의 혜택 확장을 추구함으로써 평화를 확장하는 것이다. 자유를 선호하지만 현재까지도 그녀가 무엇보다 일관되게 주장해 오는 것이 ‘힘의 균형’인 것이다.

끊임없는 노력과 강한 의지, 실천력을 겸비한 인물
미국의 국무장관으로서 세계를 무대로 맹활약하고 있는 강한 여성의 상징 콘돌리자 라이스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흑인 여성’으로 꼽히고 있다. 그녀가 무엇보다 크게 인정받는 부분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간결하고 명확하게 해 낸다는 점이다. 라이스는 스탠포드 대학에서 행정업무를 함께 보며 예산을 삭감해야 할 때도 몇 년 동안 대대적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해고문제는 어렵고 곤혹스런 일이었지만 정확한 관점에서 문제를 파악하고 접근하는 것이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9.11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 먼저 보고할 내용을 분류하여 잘못된 정보부터 선별했다. 라이스는 잘못되고 무시할 수 있는 문제들은 먼저 가지치기를 하고 문제의 핵심을 파악해 나간다. 단순 명료하고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이러한 일 처리 방식 또한 그녀의 오랜 습관에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유추된다.
인종차별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어린 라이스는 백악관 앞에서 부모들에게 다짐했다. “밖에서 백악관을 구경해야 하는 건 피부색 때문이에요. 두고 보세요, 전 반드시 저 안에 들어갈 거예요”라고 말했던 그녀는 25년 뒤에 그 꿈을 현실로 만들었고, 40년 뒤에는 그 꿈을 넘어 세계를 상대로 하는 미국 외교의 수장에 올랐다.
‘강한 자유의 수호자’로 여겨지며 강한 카리스마를 가졌지만, 라이스는 개인적으로는 피아니스트와 미식축구리그(NFL) 최고책임자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할 정도로 낭만적인 부분도 많다. 피아노 교사였던 외할머니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재능을 가지고 피아노를 연주했던 그녀는, 2002년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와 협연 연주했을 정도로 수준급의 피아노 연주 실력을 가지고 있다. ‘교육’과 ‘종교’라는 집안 환경의 영향으로 라이스는 발레,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폭넓은 교육을 받았다.
특히 ‘책벌레’라 불릴 정도로 많은 책을 읽었던 것은 차후 그녀가 한층 더 성숙해 질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사회적으로 차별을 당하는 흑인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라이스는 ‘백인보다 두 배는 더 열심히’라는 인생관을 가지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전한다. 라이스가 초강대국인 미국의 외교정책을 좌지우지하는 핵심인물인 점을 차지하고서라도 자신의 꿈에 대한 목표의식과 의지, 추진력 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놀라운 부분들이다.

워싱턴의 흑진주, 성공한 여성의 인생설계 전략
‘워싱턴의 흑진주’라 불리는 라이스가 누구보다 촉망받는 인물이 된 것은 그녀만의 탁월한 인생 비즈니스 전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스는 자신의 전문 분야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적절한 시기에 그 전문성을 전개해 나갔다. 무엇보다 자신이 가진 전문성을 남에게 잘 피력할 줄 아는 점이 큰 강점이었다. 예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시절에 비해 수려하고 단아해진 모습으로 한층 낮은 목소리로 눈에 띄지 않게 활동해 오고 있는 라이스는, 여성각료로서 실력은 물론 공인으로서의 대외적 시선에 대한 부분과 남다른 패션 감각 등으로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녀는 패션잡지 ‘Vogue’ ‘Glamour’ 등에서도 특집기사로 다룰 만큼 뛰어난 감각을 소유하고 있으며, 타고난 각선미 때문에 심지어 어떤 정치인은 다리를 쳐다보느라 회의에 집중할 수 없었다는 웃스갯소리를 할 정도다. 또한 그녀의 의상과 함께 화제가 되고 있는 구두에 대한 애착은 여러 언론에 기사가 될 정도였다고 전한다.
라이스는 무엇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의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생겨나는 희생과정을 단지 ‘희생’ 자체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는 교수 시절 학생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면 일단 열정부터 발산시켜라. 그런 다음 자신이 선호하는 과목의 교수를 지도 교수로 모셔라”라고 조언했다. ‘지혜에 대한 사랑이 당신의 인생을 인도하리라’는 라이스 가의 교훈처럼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상황에 최선을 다하며 인생을 살아왔다.
그녀에 대한 내용이 실린 ‘The Condolezza Rice Story’ 의 저자 펠릭스는 “그녀는 최고를 지향했으며, 그 정상에 올라섰다. 그녀의 인생을 소나타 형식의 악보로 그린다면 지금은 절정을 향해 상향곡선을 그리며 각기 다른 주제를 표현하는 발전부에 해당할 것”이라고 평했다.
세계 강대국인 미국에서 그 어떤 전임 국무장관보다 확고한 색깔과 스타일을 구사하는 그녀의 끊임없는 성공을 향한 질주가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 주목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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