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이동성 ‘난장판’ 이대로 좋은가
번호이동성 제도 시행 현재, SK텔레콤의 시장 지배력이 크게 훼손되지 않는 가운데 2위 사업자인 KTF가 가장 큰 수혜를 입는 방향으로 초반 전세가 흐르고 있다. “제도 시행 초기인 1월중에 승패가 갈릴 것”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지금의 판세가 대세로 굳어질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은 늘 작은 변수 하나에도 언제든 역전되기 마련. 이통 3사들은 고삐를 늦추지 않은 채 온 전력을 쏟아 부으며 서로를 향해 무차별적인 공세를 펴고 있다.

후끈 달아오른 전장
휴대폰 매장이 수백 개 밀집해 있다는 서울 용산전자상가. SK텔레콤, KTF, LG텔레콤 등 이동통신 3사의 본사가 번호이동성 전쟁의 헤드쿼터라면 이곳 용산전자상가는 사활을 가늠할 수 있는 일선 전장이다. 이곳의 분위기만 잘 살피면 전세가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는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번호이동성 실시후 전장에는 이미 열기가 후끈하다. 이통 3사의 직영 대리점은 물론이고 3사 제품을 모두 취급하는 2차 판매점들 역시 모처럼 잡은 호기에 한 몫을 챙기려는 듯 호객 행위에 열심이다. 매장 마다 최소 2~3명의 고객이 상담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번호이동성이 이통 시장에 대단한 호재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뜻밖에도 실제 번호 이동 고객을 찾아 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기변(기기 변경) 하시려고요?” 매장 직원들의 첫 마디는 열이면 여덟, 아홉 이렇다. 심지어 번호 이동을 하려고 한다는 얘기에 생뚱하다는 듯 머뭇거리는 점원까지 있을 정도다. 설명은 이랬다. “일정 기간 사용을 약정하면 요금 할인 혜택을 주는 약정할인제는 이통 3사가 거의 대동소이 해요. 기변을 하면 현재 사용하고 있는 휴대폰을 고가에 보상받을 수 있지만 번호이동을 하면 보상이 안 되는 것은 물론 가입비도 별도로 내야 하죠.” 휴대폰을 분실했거나 아예 처음 가입하는 것이 아니라면 번호 이동의 실익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번호 이동 고객 그 자체보다는 기존 고객을 지키기 위한 이통 3사의 할인 경쟁을 틈 타 휴대폰 단말기를 교체하려는 수요가 호황의 원인인 셈이다.

승패는 돈에서 갈린다
여기서 한 꺼풀을 벗겨내면 장사꾼들의 상술이 깔려 있다. 본사 제품만 판매하는 직영 대리점과 달리 2차 판매점들은 이왕이면 마진이 더 많은 제품을 판매하기 마련이다. KTF나 LG텔레콤 대리점에 번호 이동을 하겠다고 찾아간다면야 허리를 180도 숙이며 “어서 오십쇼” 하겠지만, 판매점들은 사정이 다르다. K매장의 한 직원은 “솔직히 말해 3사 제품을 정확히 비교해 고객들에게 설명해주기 보다는 이윤이 많이 남는 제품을 우선 소개해준다”며 “만약 점원들이 추천을 많이 하는 제품이라면 그 회사가 가장 많은 돈을 쏟아 붓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LG텔레콤 보다는 KTF가, 또 이 보다는 고객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SK텔레콤이 대리점이나 판매점측에 더 많은 판매 수수료를 보장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는 SK텔레콤의 기기 보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기존 모델에 따라, 또 새로 구입하려는 기기에 따라 보상 가격은 천차만별이지만 최고 20만원까지 보상이 가능하다. 한 점원은 “50만원 짜리 최신형 단말기도 기기 보상액을 감안하면 30만원 정도면 구입할 수 있는 셈”이라며 “여기에 약정할인까지 받게 되면 월 부담액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했다. 통신위가 기기 보상액 최고 한도를 5만원으로 책정해놓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사실상 불법 보조금 지급이 횡행하고 있는 셈이다.
일부 대리점이나 판매점에서는 기기 보상이나 번호 이동 고객들에게 진짜 보조금을 제시하기도 한다. 최근 이통 3사에서 제시하는 수수료가 대폭 높아진 만큼 이 중 일부를 떼서 보조금 형태로 고객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서울 구의동 테크노마트 한 매장 직원은 “계약서에는 일단 50만원을 기재해 놓고 계산을 마친 뒤 추후에 10만~20만원을 통장으로 송금해주는 방식이 보통”이라며 “단속을 피해 보조금을 지급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다”고 말했다.

SKT-LGT 공동전선 구축

현재 SK텔레콤에서 KTF와 LG텔레콤으로 옮겨 간 가입자는 10만여명이 넘어선 상태다. 이중 6만여명은 KTF로, 4만여명은 LG텔레콤으로 이동했다. 시행 초기 3~4일은 LG텔레콤이 우위를 보이더니 금세 상황은 역전돼 갈수록 양사의 격차는 벌어지는 양상이다.
제도 시행 이전까지만 해도 가장 으르렁거리며 싸우던 SK텔레콤과 LG텔레콤이 공동 전선을 구축한 것 자체가 흥미롭다. SK텔레콤은 제도가 당초의 취지와 달리 이미 경쟁력을 갖춘 KTF에만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는 등 그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며 KTF도 약관인가대상사업자(지배적 사업자)로 지정할 것을 정보통신부에 건의하겠다고 나섰다. 번호 이동 대상이 KTF까지 넘어가는 7월 이전까지만 선전한다면 성공이라고 판단하는 SK텔레콤이 2위 사업자 KTF를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번호이동성에 사활을 걸다시피 했던 LG텔레콤도 거들고 나섰다. “KTF의 가입자 급증은 무선재판매사업(별정이동통신)권을 갖고 있는 KT가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LG텔레콤측의 공세의 골자다. LG텔레콤 관계자는 “KTF의 번호이동 실적의 90% 가량은 KT의 무선재판매 분이라고 보면 된다”며 “특히 이 과정에서 불법 보조금을 20만~30만원씩 지급하는 물량 공세를 펴고 있다”고 주장했다. 양사의 공격에 대해 KTF측은 “심증만으로 헐뜯기에 나서고 있다”며 “일일이 대응하지 않겠다”고만 밝히고 있을 뿐이다.

혼탁한 경쟁 끝은 어디?

혼탁한 마케팅 전쟁은 점입가경이다. SK텔레콤은 새해부터 전화를 걸면 통화 대기음에 앞서 ‘SK텔레콤 네트워크’라는 음성이 1~2초간 나오게 하는 인트로 서비스를 도입했다. “통화품질 실명제”라는 SK텔레콤측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고객의 사전 동의 없이 통화 대기음을 자사의 광고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빗발치자 지난달10일부터 전면 중단했다.
약정할인제를 활용한 과장 광고도 여전하다. KTF 일부 대리점은 ‘011,017 번호는 그대로, 요금의 40%를 할인받아 최신 휴대폰을 무료로’ 등의 스팸메일을 무작위로 고객들에게 발송해 물의를 빚었고, 3사의 대리점이나 판매점들은 앞뒤 설명 없이 ‘최고 40만원 할인’ ‘휴대폰 공짜’ 등의 광고판이 어지럽게 내붙여 놓고 있다. 약정할인이라는 것이 단말기 구입과 관계 없이 일정 기간(18~24개월) 사용을 약정하면 사용 실적에 따라 요금 할인을 받을 수 있는 제도라는 것을 이제는 상당수 소비자들이 인식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정보가 없는 사람들은 이같은 광고에 현혹되기 십상이다. KTF는 무료로 단말기를 이용한 뒤 1년 뒤부터 할부로 단말기 가격을 지불하도록 하는 ‘거치 할부제’라는 것을 도입했다가 통신위원회로부터 제재를 받기도 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신규 가입 고객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고객을 빼앗고 빼앗기는 제로섬경쟁은 결국 3사 모두에게 상처만 남길 것”이라고 지적했다.

번호이동성 이대로 좋은가
공정경쟁의 틀 마련 시급

번호이동성 제도가 이동통신 사업자간 경쟁을 유도해 결과적으로 소비자 편익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실제로 이통 3사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찾아가는 엔젤 서비스’ ‘레인보우 프로그램’ ‘24시간 고객응대’등 번호이동성제에 대비한 고객 서비스를 크게 강화하며 소비자들의 기대감을 한껏 높였다.
▶번호이동 취지 살려야 = 그러나 막상 지난달 1일부터 제도가 시행되자 서비스 품질 향상노력은 과열혼탁 경쟁으로 변질된 것이 사실이다. 이는 결국 번호이동에 대한 소비자 외면과 이통사의 수익성 악화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통사들이 공정한 경쟁을 해야 고객과 업체가 모두 ‘윈-윈’`할수 있는 결과를 얻게 된다.
각 사업자들은 대외적으로는 자체적인 시장정화 노력을 보여주며 번호이동의 ‘제길 찾기`’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SK텔레콤은 불법 마케팅 논란을 빚은 ‘통화품질 실명제`를 중단했고 KTF와 LG텔레콤도 ‘클린 마케팅’` 선언이나 ‘시장 감시단`’ 강화 등의 조치를 내놓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논란거리와 불공정 시비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처럼 잠복해 있는 실정이다. KT의 재판매와 보조금, 계열사 동원과 강제할당, SK텔레콤의 방어전략 등에 대한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통사들은 상대편이 ‘일단 저지른 다음 논란이 일면 그만둬도 된다’`는 식의 판촉전을 언제 다시 벌일 지 모른다며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과당경쟁과 전산장애 등 과정상의 문제 때문에 ‘번호이동성은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제도’`라는 인식이 자리잡아서는 곤란하다”고 우려하며 “번호이동성이 제대로 정착되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쪾통신위 역할 중요 = 번호이동 시장에서 KTF가 독주하는 양상을 보이면서 SK텔레콤과 LG텔레콤의 견제도 점차 강도를 더해갈 전망이다. 번호이동성제라는 제도적 틀 내에서 소비자가 자유선택을 한 결과라면 현재의 추세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그 과정에서 탈법·편법은 없는지 철저한 감시가 필요하다는 게 이통 3사의 공통된 논리다.
이 때문에 규제당국인 정보통신부와 통신위원회가 어느 때보다 시장상황을 정확히 읽어나가며 시의적절하고 공정한 심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정통부는 민감한 문제에서 한발을 빼고 모든 판단을 통신위로만 넘기려는 무책임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일부에선 “정통부가 죽고살기식 경쟁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판을 만들어놓고 뒤로 쏙 빠져있다”는 비난까지 나온다.
통신위의 경우도 조사인력 부족 등 열악한 조건 속에 연일 계속되는 사업자간 비방전에 오히려 휘둘리고 있다는 지적까지 받는 형편이다.
▶KTF 수혜론 부각..
“KT가 번호이동 1위?”
가입자 이동 수치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 업체들의 분석이 제각각이지만, 업계내에는 KTF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이 때문에 SK텔레콤이나 LG텔레콤은 “번호이동 시차도입의 열매를 KTF가 다 가져간다”고 문제제기 하고 있다. 이는 KTF가 이동가입자의 3분의 2를 흡수한 것도 있지만, 이같은 KTF로의 쏠림현상이 가속화되면서 고착화될 경우 SK텔레콤뿐 아니라 LG텔레콤도 어려움을 겪을 것이란 우려때문에 어떻게든 분위기를 차단해야 한다는 전략적인 고려가 반영됐다.
특히, SK텔레콤과 LG텔레콤은 KTF 이동전화를 재판매하는 KT효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3만~4만명의 KT 직원이 적극적인 마케팅에 나설 경우 생각보다 영향이 클 수 있다는 우려때문이다.
KTF에 따르면 KTF가 그동안 유치한 가입자의 50%가량이 KT실적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SK텔레콤은 “이동전화 번호이동의 실적은 1위 KT, 2위 KTF, 3위 LG텔레콤, 4위 SK텔레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KT와 KTF 실적에 대한 평가는 사업자마다 또 다르다.
SK텔레콤과 LG텔레콤은 KT가 초반 실적이 두드러진 것이 인해전술과 함께 다소 원칙에 어긋나는 영업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LG텔레콤 관계자는 “직원에게 가입자유치를 할당하고 보조금금지 규정을 피할 수 있는 대리점 리베이트 제공 등의 방법을 동원한 것이 주요한 요인”이라고 주장했다.
SK텔레콤과 LG텔레콤은 이같은 분석하에 통신위원회 등에 영업감시를 강화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LG텔레콤 관계자는 “통신위원회가 KT가 비정상적인 영업을 할 경우 재판매조직을 KT에서 분리하도록 하겠다”고까지 해놓고선 막상 일이 벌어지자 “좋게 넘어가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통신위원회는 아직까지 “사업자들은 되도록 강하게 얘기해야 얻는게 있기 때문에 모든 사업자들의 주장이 모두 맞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KTF 관계자는 “KT가 실적의 50%를 차지하는 것은 맞지만 이는 SK텔레콤의 브랜드 거품이 줄어들면서 KTF의 요금, 단말기 등의 경쟁력이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어찌됐든 이동전화 번호이동시장에 유선사업자인 KT가 주요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1월 이후 감소세 전망속
KT·비용투입 주요변수
통신 담당 애널리스트들은 대체로 초기에 수요가 몰린 뒤 향후 감소추세를 나타낼 것으로 전망했다. 또한 지금까지 번호이동 결과는 예측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시장에 주는 영향은 크지 않다고 보고 있다. 다만 KTF의 선전은 주목할만하다는 지적이다.
이통업계와 통신담당 애널리스트들은 향후 KT의 마케팅강도와 추가적인 요금할인 등이 주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KT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평가가 쉽지 않겠지만 3만~4만명에 달하는 KT 조직을 무시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다.
또한 아직까지 이통사들이 적극적으로 마케팅비용을 퍼붓고 있지는 않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추가적인 요금할인을 치고 나오거나 자금을 투입해서 치고나올 가능성도 변수로 지적되고 있다. 생각보다 이동이 없거나, 반대로 이탈이 많을 경우 충격요법을 들고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각 업체별 1월 실적도 민감하다. 비록 KTF와 LG텔레콤이 SK텔레콤 가입자를 유치한다해도 해지고객이 얼마나 되는지에 따라 실질적인 성과를 판가름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벌고 뒤로 밑지는` 장사가 될 경우 번호이동 효과가 크게 반감될 가능성이 있다.
글: 배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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