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민주화운동 주도, 강한 여성의 상징
총선 앞두고 정치재개, 반정부운동 벌이다 피살

작년 12월 27일, 반목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나라 파키스탄에서 이슬람국가 최초의 여성 지도자이자 파키스탄 정부 총리직을 두 번이나 수행했던 베나지르 부토가 자살테러리스트에 의해 암살당하는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 이슬람국가인 파키스탄에서 강한 여성 리더십의 상징이기도 했던 부토는 지난 10월 8년간의 긴 해외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후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으로 재개한 상황이었다. 야당 파키스탄 인민당(PPP)을 이끌고 있는 부토가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며 대정부 투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사태라 암살 배후를 두고 여러 가지 추측이 거론되고 있다.

끝없는 피의 분쟁, 파키스탄
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국가 파키스탄은 전세계에서 6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자 많은 이슬람교도가 분포한 곳이다. 비극의 국가로 불리는 파키스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분쟁의 원인이 종교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파키스탄과 인도의 끝이 보이지 않는 분쟁은 우선 이슬람과 힌두교의 갈등으로 시작됐다. 북인도에 이슬람세력이 침입하면서 당시 힌두교의 카스트 하층민들부터 서서히 개종이 이루어졌다. 이슬람의 무굴제국이 성립되면서 인도 무슬림은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무굴제국의 몰락과 함께 영국의 인도식민지화로 이어지면서, 영국은 통치의 용이성을 위해 힌두교와 무슬림의 갈등을 조장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뱅골주에 대한 힌두교와 무슬림의 우세지역으로 동서 분할하려는 분쟁이었다.
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의 독립으로 두 종교 간에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독립한 인도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힌두교를 중심으로 새로운 인도가 탄생하려고 하자 자국 내 무슬림들이 반발하며 내전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자 간디가 나서 해결하려고 하다가 암살당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도는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되었는데, 이때 무슬림과 힌두교들의 대량 이주 사태가 일어나고 국가영역 확장을 두고 전쟁이 일어난다. 전쟁의 계기가 된 것이 카슈미르 분쟁인데 이는 대표적인 종교 갈등으로서, 1947년 양국 분리 독립 시 3개 토후국(土侯國:영국 보호 아래 있을 때 인도제국을 형성하던 작은 전제왕국)의 귀속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전쟁이었다. 전쟁이 심화되자 국제중재에 따라 카슈미를 분할하기로 결정이 나지만, 그 후로도 분쟁은 끊이지 않았다. 파키스탄은 성립 당시 서파키스탄, 동파키스탄(지금의 방글라데시) 두 개의 지역으로 나뉘었는데, 서파키스탄이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차별이 되자 동파키스탄도 인도로부터 원조를 통해 방글라데시로 독립하기 이른다. 이러한 파키스탄 내의 문제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2차 전쟁이 발생했다. 이후 인도가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여 무장하자 파키스탄은 위협을 느끼고 중국으로부터 핵기술을 전수받아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인도, 파키스탄의 관계는 언제 다시 전쟁이 발생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현재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력 차이와 파키스탄 쿠데타 정부 수립 이후 양국 협력의 필요성이 대두돼 표면적인 평화는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무샤라프 군부독재로 반목.갈등 심화
1947년 인도로부터 분리 독립한 후에도 파키스탄은 군사정권과 민선정부를 오가면서 단 한번도 안정적인 시기를 보낸 적이 없었다. 1999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무샤라프 치하 8년 동안 파키스탄은 어느 정도 성장세를 보였다. 지난 8년에 거쳐 연평균 최고수준인 8%를 기록했고, 카라치 증시지수는 1999년 이후 1,000% 넘게 올랐다. 외환보유고는 1999년 당시 17억 달러에 불과했지만, 2006년에는 130억 달러로 증가했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 3분의 1에 달하는 인구들은 여전히 빈곤층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파키스탄의 성장에 대해 전문가들은 무샤라프의 위대한 영도력 때문이 아니라, 우연한 행운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2001년 9.11 테러 후 미국의 대테러전쟁에 적극 협조한 후 파키스탄은 막대한 원조를 받을 수 있었다. 무샤라프가 아프가니스탄 접경지대 탈레반 반군 지원을 중단하고 이를 소탕하는데 협력하는 조건으로 미국은 그간 100억 달러가 넘는 군사원조를 했으며, IMG 등 국제기관을 통해 외채 탕감 및 상환연장을 주선해 줬다.
상대적으로 나아진 조건 속에서도 파키스탄은 끊임없는 정치혼란이 반복되고 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금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재선을 추구하고 군사통수권까지 계속 유지하길 바랐지만, 이는 당장 군복을 벗거나 차기 대선에 입후보해야 한다는 파키스탄 헌법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초드리 대법원장이 헌법 해석에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버티자 무샤라프 대통령을 2007년 3월 그를 해임해 버렸다. 초드리 대법원장은 이에 굴하지 않고 법질서 수호를 명분으로 여론에 호소해 대중의 지지를 얻어 지난 7월 다시 대법원장 재임용 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정부와 정면대결에 나섰다. 무샤라프 대통령의 행동은 파키스탄 내 온건 정치세력을 자신의 적으로 만들었으며 민심을 더욱 격앙시켰다. 이러한 정치권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아프가니스탄 접경지역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자살폭탄 과 테러공격이 대도시로까지 빈번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무샤라프 대통령은 지난 11월 3일 국가 비상상황을 선포하고 야당 정치인, 변호사, 인권운동가들을 잡아들이고 언론통제까지 가하기 시작했다. 또한 작년 말이나 올해 초에 실시할 예정이던 총선을 무기한 연기하고, 제1야당인 파키스탄 인민당(PPP)의 지도자이자 8년간의 망명 끝에 귀국한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까지 가택연금시켜 버렸다. 이러한 무샤라프 대통령의 행동이 파키스탄 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원성을 사게 되자, 비상상황 선포 며칠 만에 미국의 회유와 원조 중단 위협 끝에 올해 2월 중순에 총선을 치르고 부토의 가택연금을 해제하는 유화적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장기집권을 위해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독재를 강화하기 위한 무샤라프 군부의 야욕이, 이번 부토 전 총리 암살의 배후라는 혹자들의 견해가 흰소리만은 않은 듯 보이고 있다.

파키스탄 민주화운동 선봉에 선 강한 여성, 부토
카라치에서 정치가 줄피카르 알리 부토의 딸로 출생한 베나지르 부토는 이슬람국가 최초의 여성 지도자로서 민주화운동의 선봉에서 강한 리더십을 발휘해 왔다. 그녀는 미국 하버드대학과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후, 당시 총리로 있던 부친이 육군참모총장이었던 모하마드 지아 울 하크의 군사쿠데타로 실각되고 1979년 처형되자 부친이 창당했던 파키스탄인민당(PPP)의 중앙위원이 되었다. 부토는 야당연합체인 민주주의회복운동(MRD)의 일원으로 반정부운동을 벌여, 1981년 하크 정권에 의해 체포되어 약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1984년 유럽으로 망명했다. 망명 후에도 그녀는 망명지에서 PPP를 원격조정하면서 민주주의회복운동(MRD)를 앞세워 계엄령 철폐와 하크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했다.
이후 대통령 하크가 계엄령을 해제하자, 1986년 4월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전국을 돌면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1988년 8월 하크 대통령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자, 11월 선거에서 PPP는 여당을 누르고 최다의석을 획득했고, 그녀는 무소속의원을 영입하여 35세에 이슬람권 최초의 여성총리로 취임했다. 부토는 총리로 취임 후 11년에 걸친 군부독재의 유산을 청산하기 위해 민주화개혁을 시도했지만, 군부와 야당의 견제로 좌절되었고 그녀 또한 1991년 총선에서 패배하고 총리직에서 해임됐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1992년 재기를 노리며 현 정권 퇴진, 조기총선을 요구하며 반정부시위를 주도해 1993년 10월 재집권했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이었던 파루크 레가리의 부패 스캔들로 3년 만에 중도하차하게 되고 나와즈 샤리프 총리의 등장과 함께 1999년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된 후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자신이 주도한 정부들이 부패혐의를 받으면서 부토는 망명 후에도 불법자금 세탁, 전투기 구매비리 등 끊임없는 증거들이 제시되면서 오명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부토의 남편인 아시프 알리 자다리가 투자부 장관을 지내면서 무수하게 공여 받은 뇌물은, 그녀 이후 총리를 지낸 나와즈 샤리프와 합쳐 엄청난 금액에 이른다고 하니 그 부패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부분임을 실감케 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부토는 결국 2006년 1월 인터폴의 적백수배 대상자 명단에 올랐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 일각에서는 부토가 고등교육을 받았음에도 워낙 대대로 물려받은 방대한 토지를 소유한 신드州 대지주 출신에 과거 총리를 지낸 부친까지 둔 집안이라 그런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슬람국가 파키스탄에서 여성파워의 상징이기도 했던 부토가 파키스탄의 여권신장과 여성복지 향상에 앞장섰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정치역정으로 인해 실제로 이뤄놓은 성과가 폄하되었다. 특히 집권 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에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해 탈레반 정권이 들어서는데 영향력을 행사한 부분은 그녀의 업적에 오점으로 남아있다.
부토는 2007년 10월 귀국해 무샤라프 대통령과 권력분점 협상을 계기로 다시 정치로 복귀하게 됐다. 대법원장 해임 이후 거센 퇴진운동으로 궁지에 몰린 무샤라프가 PPP의 당수인 부토와의 권력분점을 통해 정권연장의 시나리오를 택한 것이다. 총선에서 부토의 PPP가 승리할 경우 권력을 부토와 분점한다는 계획을 짜 놓은 무샤라프는 부패혐의로 고발된 부토를 사면하여 귀국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2007년 10월 18일 지지자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부토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8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하지만 그런 감격도 잠시, 부친의 친미 성향에 반발한 탈레반은 이날 그녀를 태운 차량에 폭발테러를 일으켜 100명 이상이 사망하는 피의 귀국길을 만들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부토는 정부의 불허에도 불구구하고 대규모 집회를 강행하다가 가택연금을 당했다. 과거 정치적 숙적이었던 나와즈 샤리프 전 총리와의 연대 의사를 밝히면서 부토는 반(反) 무샤라프 투쟁을 밀고 나갔다. 부토는 올해 1월에 총선에 참가하기로 입장을 정하고 샤리프 전 총리와 총선 공동대응체제를 구축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러한 적극적인 반정부 공세는 자신의 생명을 위협받을 정도에 이르렀으며, 결국 2007년 12월 27일 라왈핀디 집회 후 정체가 확인되지 않은 괴한에 의해 자살폭탄 테러로 피살되고 말았다.

경악과 충격, 부토 전 총리 폭탄테러로 피살
부토 전 총리의 피살 사건은 파키스탄은 물론 전세계인들을 충격과 경악에 휩싸이게 했다. 자베드 치마 파키스탄 내무부 대변인은 “인민당(PPP) 총재인 부토 전 총리가 라왈핀디에서 수천 명의 군중에게 다음달 8일 총선에서의 지지를 촉구하는 유세를 가진 직후 자살 폭탄공격을 받아 사망했다”거 밝히면서 부토 전 총리를 겨냥한 여러 차례의 총격도 있었음을 전했다. 부토는 자살폭탄 공격을 받은 후 라왈핀디 종합병원으로 긴급 후송돼 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부토의 대변인인 바버 아완 상원의원도 “의사들이 부토 여사의 순교를 확인했다”고 말했으며, 이날 폭탄 공격으로 최소 20명이 사망한 것으로 전했다. 라왈핀디 병원으로 몰려든 부토의 지지자들은 이슬람 극단세력과 페르페즈 무샤라프 대통령 등을 비난하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흥분한 일부 군중들은 눈물을 흘리며 병원 정문 유리창을 부수기도 했다. 1988~1996년 사이 두 번이나 파키스탄 총리를 역임한 부토는 8년간의 긴 해외망명을 마치고 귀국해 총선에서의 정치적 재기를 노려왔지만, 끝내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부토에 대한 생명위협적인 테러의 시도가 비단 이번 뿐만은 아니었다. 귀국길에서도 140여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던 폭탄테러를 가까스로 면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녀도 죽음을 비켜가지 못했다. 부토의 죽음 후에 자신의 암살인물에 대해 거론한 이메일이 발견되어 그 배후에 대해 논란이 거세졌다. 부토는 지난 9월 데이비드 밀리반드 영국 외무장관에게 비밀 이메일을 보냈는데, 귀국 시 세 사람이 자신을 암살하려고 한다며 그들을 제지하기 위해 파키스탄 정부에 압력을 가해 줄 것을 요청한 적 있다. 특히 3인 중 1명이 공식적으로 부토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정보기관 고위 간부로 파악돼 충격을 안겨줬다. 지목된 인물은 파키스탄 정보부에서 일한 퇴역 군장교로, 탈레반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마약 밀매, 정치인 암살에도 연루된 인물이다. 그는 “무샤라프 정권에 위협을 가하는 사람은 누구든 암살하기 위해 돈을 주고 청부 살인범을 고용할 수 있다”고 주장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두 번째 인물은 수십 년 동안 부토 가문과 정적관계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마지막으로 부토 전 총리를 계속 비난해 온 파키스탄 주(州)총리다. 그는 부토가 내달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정치적인 타격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며, 부토가 암살되기 몇 시간 전까지도 노골적으로 부토를 비난했던 인물이다.

혼란의 도가니가 된 파키스탄
일각에서는 부토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던 무샤라프 정권의 소행으로 단정짓고 강하게 항의하며 부토의 죽음에 대한 명확한 해명을 요구했다.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도 부토의 테러공격 상황을 보고받고 “이번 공격은 파키스탄의 화해와 민주 발전을 저해하려는 세력이 아직도 존재함을 보여 준 것”이라며 “총선 지지를 촉구하는 유세를 마친 부토 전 총리에게 폭탄테러를 가한데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 규탄했다. 한편 PPP는 부토의 고향인 파키스탄 신드주 나우데로에서 중앙집행 위원회를 열고, 부토 전 총리의 유언장에 따라 정치적 후계자 겸 PPP 새 지도자로 19세 아들 빌라왈을 지명했다.
부토의 피살 소식으로 인해 파키스탄 국내.외적으로 극도의 정정불안에 시달리며 혼란이 가중됐다. 뉴욕 증시는 하락하고 국제유가 및 금값이 상승하는 등 증시와 상품시장이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날 증시는 개장 전 부토 전 총리의 암살 소식이 전해진 후, 파키스탄 지역의 정정불안과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로 하락세로 출발해 부진한 경제지표와 함께 증시 하락요인으로 작용했다. 부토의 죽음으로 극도의 혼란과 정정불안에 휩싸인 파키스탄에서 무샤라프가 다시 재집권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인물이 출현하게 될 것인지가 미수인 상황이지만 그와 무관하게 부패와 테러, 핵무기의 위협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파키스탄의 대표적인 여성 정치가로 많은 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베나지르 부토. 그녀는 비록 정치적 재개라는 꿈을 미처 다 완성해 내지 못했지만, 자국의 민주화를 위한 열정과 강한 리더십은 오래토록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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