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를 통해서 교통의 혁명을 일으킨 기업
100년의 역사를 가진 미래 지향적인 기업으로 손꼽혀 온 포드자동차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든다는 말처럼 작은 시각의 차이가 역사를 변화 시킨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헨리 포드다. 20세기 초, 자동차는 부자들만의 전유물로만 생각되던 대다수의 사업가들과는 달리 보통 사람들을 위한 교통수단으로 생각한 헨리포드의 그 작은 시각의 차이는 ‘모델T’의 발명과 함께 자동차 대중화, 대량생산 시스템의 개발로 이어지며 20세기를 ‘현대(現代, Modern)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전달되어져온 ‘헨리포드’라는 이름은 노동조합에 반대하는 악덕CEO, 유대인을 싫어하는 반유대주의자로 인식되어지기도 했다. 이런 그의 이력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부각되어졌고 자동차의 대중화와 대량생산에 의한 원가절감을 실현한 그의 성공에 대해서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
세계적인 자동차 제작회사 포드의 창설자로 자동차 왕으로 불린다. 근대적 대량 생산방식을 통해 자동차를 대중화시켰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헨리 포드는 소년시절부터 기계에 큰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17세 때 학업을 중단하고 기계공이 되었다. 1899년까지 디트로이트에 있는 에디슨 회사에서 기술책임자로 근무했으며, 1903년 동업자와 함께 포드 자동차회사를 설립한다. 1908년 세계 최초의 대중차 ‘모델T’ 제작을 시작하고, 1913년 조립 라인 방식에 의한 양산체제인 포드 시스템을 확립했다. 그 밖에도 계획 ? 조직 ? 관리에 있어서 수많은 신기술과 합리적 경영방식을 도입했다. 다른 자동차 회사의 차량 가격이 2000달러 수준일 때 825달러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내놓으면서 일약 자동차의 대중화 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모델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포드는 당시 부품의 규격이 일정하지 않고 모델이 자주 바뀌는 불편을 없애기 위해 획기적인 경영기법을 도입했다. 값싼 차를 만들기 위해 대량생산이 절실히 필요했고, 결국 1913년 컨베이어식 조립라인에 의한 양산체제인 포드 시스템을 확립했으며, 이후에도 비약적인 기술 발전과 합리적 경영방식을 도입했다. 이로 인해 T형 포드는 1927년 단종될 때까지 무려 1500만대라는 천문학적인 생산량을 기록했다. 1922년에는 고급차 메이커 링컨을 인수하는 등 외형적으로 비약적인 성장도 일궈냈다. 1924년까지 미국 자동차 시장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회사를 키웠으나, 독선적인 그의 개성 탓에 경영 위기에 직면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심지어 1920년대 말에는 경쟁사인 제너럴모터스(GM)에 수위를 빼앗기고 노동조합운동에 반대하면서 침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새로운 변혁을 꿈꾸는 에드셀 포드
그 뒤를 이은 에드셀 포드는 포드자동차회사의 설립자인 헨리 포드의 외아들로 태어나 아주 어릴 적부터 회사에서 편지 배달부터 경영 전반에 관한 훈련을 받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는 곧 미시간 공장에 자신의 사무실을 갖게 된다. 그의 나이 25세 때인 1919년 사장으로 임명받고 자동차 제작에 뛰어들었다. 이때부터 그의 화려한 자동차 인생이 시작된다. 재임기간 그는 오랜 염원이던 고급 자동차 제작을 위해 링컨 자동차회사를 매입했다. 그러고는 V8 모델을 발표하면서 성능이나 스타일 면에서 동시에 만족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낸다. 링컨은 에드셀 포드가 경영을 맡으면서 미국의 최고급 차와 대통령 전용차 제조업체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그의 활약도 잠시였다. 아버지인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실용적인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은 반면, 에드셀은 자동차에 예술적인 가치와 미를 부여하길 원하면서 부자간의 갈등이 깊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그는 갑작스러운 건강악화로 1943년 유명을 달리했다. 그 후 포드 자동차회사는 다시 아버지인 헨리 포드가 경영권을 맡았고 2년 후인 1945년 에드셀 포드의 아들인 헨리 포드 2세가 경영권을 승계하기에 이른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역사
헨리 포드의 손자인 헨리 포드 2세(Henry Ford II)는 1945년부터 1960년까지 포드 자동차 회사의 사장으로 재임하고 1960년부터 1980년까지 회장과 최고 경영자(CEO) 자리에 있었다. 1956년에 포드는 기업을 공개하게 되지만, 포드 일가는 주식의 40퍼센트(%)를 소유하고 있었다. 1946년 포드 자동차 회사에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가 재무기획 관리자로 합류한다. 그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 끝에 존 F. 케네디가 당선된 다음 날인 1960년 11월 9일 포드 자동차 회사의 대표직에까지 오른다. 포드가(家) 출신이 아닌 최초의 회사 대표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포드 자동차 회사가 성공적으로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한 로버트 맥나마라는 포드 일가로부터 큰 신뢰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대표직을 맡은 지 5주도 채 안되어서 존 F. 케네디의 권유로 미국의 국방장관이 된다.
1950년대에 포드 자동차 회사는 1955년 포드 선더버드(Thunderbird)를 발표하고, 1958년에는 엣셀(Edsel) 브랜드를 발표한다. 그러나 엣셀 브랜드는 27개월 만에 실패하였다. 이 때문에 타격을 입었던 포드 자동차 회사는 1960년 포드 팰콘과 1964년 포드 머스탱(Mustang)을 발표하면서 다시 재기에 성공하였고, 그 여세로 1967년 자회사인 포드 유럽까지 설립한다. 리 아이아코카(Lee Iacocca)도 포드 머스탱이나 포드 핀토와 같이 시장에서 성공한 몇몇 유명한 자동차 설계에 참여하면서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포드 자동차 회사의 대표가 되었지만, 헨리 포드 2세와 사사건건 대립하였고 결국은 헨리 포드 2세가 1978년 그를 해고했다. 그 당시 포드 자동차 회사는 회계상 20억 달러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해롤드 폴링(Harold Poling)이 1990년부터 1993년까지 회장과 최고 경영자로 재임했다. 알렉스 트로트만(Alex Trotman)이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잭스 내써(Jacques Nasser)가 1999년부터 2001년까지 포드 자동차 회사의 최고 경영자였다.


포드 자동차의 브랜드 역사
오늘날 포드 자동차 회사는 포드라는 브랜드 이외에 링컨과 머큐리 브랜드로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다. 1958년 포드는 엣셀이라는 브랜드를 발표했지만, 판매 부진으로 1960년부터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1985년 머큐르(Merkur)란 브랜드를 또 발표했으나 1989년 엣셀과 같은 운명을 맞았다. 포드는 캐나다, 멕시코, 영국, 독일, 브라질, 아르헨티나, 오스트레일리아, 중국, 그리고 몇몇 국가에서 주요 자동차 제조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인종차별 정책을 시행하고 있던 기간에는 철수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정상적으로 자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포드는 러시아 자동차 제조 회사인 GAZ(Gorkovsky Avtomobilny Zavod)와 협력 관계에 있기도 하다. 포드는 1989년에 영국의 애스턴 마틴, 재규어 자동차, 다임러(재규어 자동차 사업부), 그리고 랜드 로버를 사들였고, 스웨덴의 볼보도 인수했다. 또한 일본 마쓰다의 지분 33.4퍼센트를 확보하고 마쓰다와 미국 미시간 주 플랫 록(Flat Rock)에 오토 얼라이언스 인터내셔널(Auto Alliance International)이라는 조인트 벤처 공장을 설립한다. 오토 얼라이언스 인터내셔널의 부품 사업부는 이후 비스티온(Visteon)으로 분사한다.

시대를 바꾼 걸출한 기업가였던 포드
1863년 미시간 주 디어본에 있는 농장에서 태어난 포드는 말 없는 마차에 대한 꿈을 가졌던 어린 시절부터 포드 자동차회사를 설립해 성공 시켰다. 12세 때 석탄으로 작동되는 증기엔진 자동차를 목격하고 자동차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한 포드는 결국 17세 때 학업을 중단한 뒤 기계공으로 취직한다. 그리고 1903년 석탄상인 알렉산더 말콤슨과 12명의 투자자를 모아서 포드 자동차 회사를 설립한다. 포드는 당시 자동차를 경주용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던 경쟁사들과 달리 대중의 필수품으로 정의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던 ‘자동차의 대중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자동차의 대중화에 대한 포드의 꿈은 결국 대량생산에 의한 원가절감과 자동차를 살 수 있을 정도의 임금 지불로 이어져, 미국의 산업 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 산업을 새롭게 개편했다.

새로운 CEO 빌 포드의 위기 극복
그러나 창립 100주년이 다가오면서 미국 자동차 산업의 주역인 포드 자동차의 입지가 그 근본부터 흔들리는 일도 있었다. 그때 포드의 CEO 자리에 오른 포드가의 일원 빌 포드. 포드의 저력과 뛰어난 CEO 빌 포드가 만나 100년 만에 찾아온 위기에 맞선다.
빌 포드는 CEO가 되자마자 포드 자동차의 수익성을 회복하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자동차 산업에서 혁신의 선도자 그리고 모범 기업으로서의 명예를 되찾아야 했다. 당시 세계최고의 자동차 시장인 북미시장에서 Big 3의 시정점유율이 일본 및 유럽메이커의 약진으로 98년 70%에서 2003년 61.8%까지 하락하고, 과도한 인센티브 경쟁 등으로 자동차사업부문의 수익성이 악화되는 시점에서 미국 자동차 산업의 운명을 고비용, 저효율 구조의 철강산업에 비유하며 마지막 보루인 소형 상횽차 시장마저 일본메이커에 잠식당하면서 미국을 대표하는 포드자동차의 쇠락이 현실화 될 수도 있다는 비관적인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포드는 1999년말 23.64달러였던 주가가 2000년 3월 한때 6.38달러까지 추락하며 신용등급 또한 A+에서 BBB-까지 급락하였다. 20세기 초 인류가 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생활혁명으로 여겨지는 자동차 대중화(motorization) 시대를 이끌었던 포드가 창립 1백 주년을 맞아 생존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빌 포드 회장은 지난 8일 ‘2006년 북미국제모터쇼(NAIAS)’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포드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지난 10년 동안 잃었던 미국 시장을 되찾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2005년 포드의 미국시장 내 점유율은 17.4%이며 10년 전(25.7%)보다 8.3%나 줄었다. 포드가 왜 이렇게 추락했을까? 기름을 많이 잡아먹는 포드차를 소비자가 외면하고, 품질 대비 가격이 좋은 일본·한국산 승용차의 판매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또 근로자에게 지급하는 차량 1대당 약 1500달러(약 150만원)에 이르는 복지비용이 회사 경영을 압박했다.
그 결과 포드는 지난해 9월까지 14억 달러의 순손실(세전)을 기록하는 등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말하는 빌 포드 회장은 2005년 150만 달러의 봉급을 회사에 반환했으며 회사가 수익을 낼 때까진 어떤 보수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무려 3만 명의 현장 노동자를 감원하고, 북미지역 공장 10군데를 폐쇄하는 극약 처방을 발표하며 뼈를 깎는 구조조정에 들어갔었다.


도약을 위해 한걸음 물러설 줄 아는 포드
이렇게 빌 포드가 지휘한 비용 절감 노력은 2002년 포드 자동차의 수익을 개선하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일부 다른 분야에서는 이에 따른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빌 포드는 지구 온난화와 가솔린 연소 기관의 종언을 주장하는 미국 자동차 업계의 이단아였지만, 당분간은 공개적으로 활발한 환경보호 캠페인을 주창하던 종래의 입장에서 한 발짝 물러서야 했다. 무엇보다 사업을 정상화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한때 빌 포드를 따뜻이 환영했던 환경 단체들은 포드 자동차가 당장 겪고 있는 곤란에 대해 그 어떤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으며, 빌 포드의 장기적 비전도 고려하지 않았다. 이제 일부 어떤 이들은 빌 포드를 미국 기업인들을 통틀어 환경을 해치는 제1의 공공의 적이라 묘사했다. 언젠가 포드 자동차를 소비자들이 원하는 환경 친화적인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자신의 가장 큰 희망을 정면으로 공격한 환경 단체의 비방 때문에 빌 포드는 큰 상처를 입었다.
경영위기를 겪고 있는 미국 포드자동차가 지난 2005년 이후 2년 반 만에 흑자로 전환됐다.
포드자동차는 지난 26일 발표한 올 2.4분기 결산에서 전년 동기의 3억1천700만 달러 적자에서 7억5천만 달러(약 6천840억 원) 흑자로 전환됐다고 밝혔다. 포드자동차가의 흑자전환은 지난 2005년 이후 2년반 만이다. 포드는 부진이 계속되는 북미부문 자동차사업의 적자폭을 정리해고 등으로 축소시키고 해외사업의 채산성을 대폭 대선 시켰다. 포드는 현재 영국 고급차사업부문인 재규어. 랜드로버 매각작업도 진행 중이다. 포드는 올 초 또다른 영국 고급차브랜드인 애스턴 마틴 매각으로 특별이익이 발생했지만 이를 제외한 순수 사업부문에서만 2억5천800만달러의 흑자를 달성했다. 이 기간동안 매출액은 유럽과 남미등지에서의 호조로 442억달러를 기록, 전년대비 5.5%가 증가했다. 반면, 북미사업은 세전이익이 2억7천900만달러 적자(전년동기 7억8천900만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또, 판매댓수는 11.0%가 줄었지만, 악성채권 정리와 정리해고 효과로 수익성이 개선된 것이다.

헨리 포드는 기업가로서 항상 기업을 더욱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개선과 혁신에 대한 견해, 삶을 바라보는 인생관, 일을 대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사업의 성공을 노동자들과 나누려 했던 인물이다. 그의 경영철학은 퍼주기 식의 자선이 아닌 자립을 돕고자 했던 인생철학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포드의 자조(自助) 정신과, 사업과 인간에 대한 통찰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충분한 의미를 가져다준다. 한 인간이 자신이 가진 생각을 현실에 적용시키기 위해 어떤 비전과 꿈, 그리고 습관을 가졌는가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과 기업을 경영하는 CEO들이 본받아야할 것이다. 또 사회적 정의는 경제적 정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자유시장경제체제하에서는 초기적 부의 분배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므로 경제적 정의의 실현은 노력해서 이루어야만 하는 것이다. 회사와 기관투자자들은 자유 시장에서 부를 창출하고 분배하는 데 이제 가장 중요한 조직이 되었다. 그러나 이 조직들은 조직에 대한 자본 공급자들의 부를 증대시키려는 한정된 목표에 의해 움직이며, 그 결과 전 세계적으로 이미 부유한 자들의 부는 증가하고 그들을 위한 부의 극대화 비용은 외부화 되어 그렇지 못한 자들의 부담이 되기에 이르렀다.
각국 경제의 세계화가 가속화되고 특히 서구 산업 국가들이 미국과 유럽의 기관투자자들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을 뿐 아니라 동유럽과 아시아의 신흥 산업 국가들이 미국식 시스템을 지향하게 됨에 따라 자유 시장에서의 회사제도는 이제 세계적으로 지배적인 현상이 되었다. 또한 경제성장과 부의 창출은 그 자체 정당한 목표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투자자들과 기업의 경영자들에게 거의 유일한 목표로 설정되어 온 감이 있다. 공공정책의 입안자들은 전통적으로 소득의 재분배와 사회적 정의에 큰 관심을 두어 왔으나, 이들은 점차 재계나 시장에 그 영향력을 양보하고 있다. 세계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기업정책, 경제정책의 수립에 있어서 시장을 중요한 도구로 받아들이고 있다. 오코너 교수가 적절히 지적하였듯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촉진할 수 있는 개별 주권국가의 능력은 국경이 없는 세계에서 법제도간의 차이를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다국적기업들에 의해 큰 제약을 받고 있다. 국경이 없는 세계라 함은 다국적 기관투자자들이 지배하는 자본시장과 상품시장으로 구성되며, 이 시장들은 이제 회사의 행동을 통제하는 진정한 지배자들이다. 현대사회에서 회사와 자유시장이 가지는 역할을 재고하고 평가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글로벌 경제정의의 실현은 지금보다도 더 멀어지게 될 것이다. 글로벌 기업지배구조 연구의 목적은 그러한 문제들을 점검하고 해답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환경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또, 인간생활의 무수한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결정자가 된 경제계의 인사들에게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하게 하고, 그로부터 균형 잡힌 정책이 도출되도록 도움으로써 회사의 사회적 책임 실현을 위한 개혁이 촉진되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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