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달러화 ‘달러제국이 무너지고 있다’
금융시장 불안 등으로 글로벌 달러 약세 올해도 지속될 듯

미국 경제침체 여파로 달러화 가치가 역사상 최저 수준에 근접할 정도로 추락하고 있다. 중국, 인도 등 아시아 신흥시장의 고성장과 고유가 지속으로 아시아 국가와 중동 산유국은 경상수지 흑자가 크게 늘고 있는 반면, 미국은 연일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를 내고 있다. 지난 2006년 경상수지 적자는 미국 국내총생산의 6%에 달하는 연간 8,000억 원에 이른다. 다른 국가라면 당장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해야 할 정도다. 이를 두고 ‘달러제국이 무너지고 있다’거나 ‘팍스 달러리움(Pax Dollarium/달러화가 주도하는 세계경제 질서가 저물고 있다)’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최근 달러화 약세가 지속되면서 국제적으로도 차츰 달러화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캄보디아는 태국과 캄보디아 간 육로 이동시 캄보디아 이민국이 부과하는 비자비를 달러화로 받지 않겠다고 밝혔고 인도문화부도 그간 달러화로 받아오던 관광지 입장료나 기념품 판매대금을 앞으로는 자국통화인 루피화로만 받기로 결정했다.
인도문화부는 “달러 환율 하락으로 관광소득이 크게 줄어들고 있다. 만일 지금 5달러를 받는다면 루피화로 계산할 경우 200루피밖에 되지 않는다. 기존의 250루피에 비하면 1인당 50루피나 손해를 보는 셈”이라며 “결국 정부차원에서 외국인들에 대한 입장료를 모두 루피화로만 징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캐나다 빅토리아의 한 주유소도 주유기에 미국 달러를 받지 않겠다는 안내문을 붙여놓는가 하면 미국의 세계적 톱모델은 “계약료를 달러로 안 받겠다. 유로화로 달라”고 요구하는 등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달러는 2002년 이후 주요 통화에 대해 20%이상 하락한 상태다.



美 달러화 앞으로 3년간 하락 추세 이어질 듯
세계 경제를 움직이고 있는 미국의 경제력과 금융 네트워크 지배를 기반으로 한 기축통화 달러는 1995년 이후 7년에 걸친 ‘강한 딜러’ 시대를 끝내고 2002년 초부터 약세로 돌아섰다. 1990년대 신경제 붐을 타고 10여 년간의 장기 호황을 누린 미국 경제가 2001년 이후 경기후퇴로 달러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서 달러 약세가 장기화 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스탠다드차타드뱅크(SCB)는 지난해 12월 18일 제출한 ‘FX Views and forecasts through 2011’ 제하의 중기(2008~2011) 환율전망 보고서를 통해 달러/원 환율이 금년 4/4분기 870원까지 하락할 것이란 예상을 내놓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달러/원은 금년 1/4분기 925원, 2/4분기 910원, 3/4분기 890원으로 점진적인 하락세를 보일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 보고서는 미국 달러화가 1990년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3년간 하락 추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하며 앞으로 미국 달러화의 약세는 2002년부터 2004년 기간처럼 대다수 주요국 통화가 1990년대 말 저평가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보다 훨씬 더 불안한 양상을 보일 것이라는 점은 유의해야 할 것이라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메릴린치 역시 2008년 세계경제 전망을 통해 미국의 달러화는 내년 1분기 유로화에 대비 1.57달러까지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상품투자의 왕’으로 불리는 짐 로저스는 미국의 경제가 이미 침체 국면에 들어간 데다 금융시장 불안 등으로 달러화는 약세를 보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고, 한국금융연구원도 지난 10월 21일 “미국이 지속적인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를 감안할 때 글로벌 달러 약세는 2008년 중에도 계속될 전망이 우세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2008년 상반기 중 달러화는 강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 연준의 금리인하 주기와 달러화의 상관관계를 보면 금리인하 예상 및 실제 인하 기간 동안 달러 약세가 진행되지만 금리인하 기조에서 벗어나고 경기가 회복되면 다시 강세로 돌아서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통화전문가는 달러가치가 언젠가 회복되겠지만 내년 하반기까지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이와 관련, 미국 경기 둔화 양상은 과거처럼 급격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장기적인 달러 약세, ‘달러제국이 무너지고 있다’
장기적인 달러 약세의 원인으로는 미국의 막대한 쌍둥이 적자(경상수지 적자 및 재정적자), 미국 경제 펀더멘털의 약화, 세계 경제에서 미국 경제의 비중 축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등을 들 수 있다.
미국은 현재 쌍둥이 적자를 줄이기 위해 일부러 달러화 약세를 방치하는 측면도 있다. 당장 수출이 늘면 무역적자가 줄어들고 대외 부채가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 말 기준으로 미국의 무역 적자는 전달보다 2.4%나 줄어들었다. 경상수지 적자는 해외로 유출된 달러가 미국 채권과 주식 매입을 위해 다시 미국으로 유입되는 ‘달러 리사이클링’ 구조를 이루고 있다. 지난 2006년에 미국으로 유입된 국제자본은 8,800억 달러에 이른다. 이런 달러 리사이클링 구조로 지속적인 달러화 약세에도 불구하고 달러화 약세가 억제되고 달러가치 고평가 상태가 유지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시아와 중동 경제의 고성장으로 미국 경제의 비중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경상수지 적자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못하면 이 구조가 깨질 가능성도 크다. 특히 미국 경제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충분한 해외 자금이 미국으로 유입되지 않을 경우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는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다.
사실 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미국 채권 투자를 줄이고 대신 상대적으로 투자수익률이 높은 신흥시장 투자를 늘리고 있다. 달러화 위주였던 외환보유액 통화를 유로화,엔화,위안화 등으로 다변화하는 시도가 확산되고 있는 것. 이에 미국은 겉으로는 강한 달러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달러 약세를 용인하고 있다. 달러화가 약세를 보여야 해외 시장에서 미국 수출상품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져 수출이 늘고 경상수지 적자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은 “중국이 의도적으로 위안화 가치를 낮게 유지해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미국 시장을 공략하면서 무역수지 적자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달러화가 약세를 나타내 무역적자를 줄여주는데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분석하며 “미국이 겉으로는 강한 달러 정책을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약달러를 즐기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권순우 수석연구원은 “달러는 기축통화이면서 동시에 미국 국내에서도 통용되는 통화다. 달러가 국제유동성 공급을 위해 미국 바깥으로 빠져나간다는 건 곧 경상수지 적자를 의미한다”며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미국 경제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그동안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를 감당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미국 경제 비중이 줄어들면서 경상수지 적자가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미국이 쌍둥이 적자 문제를 해소하려면 금리를 인상해 소비를 억제하고 정부 지출을 삭감하고 증세를 통해 세수를 확대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정책금리의 미세 조정을 통해 상황을 호전시키려 해왔다. 미국은 달러가 기축통화이기 때문에 경기 침체 속에서도 달러를 찍어내 국내 소비를 뒷받침 해왔다. 또한 서브프라임 사태가 기폭제가 되어 기존에 불안했던 각종 경제지표들이 예상치를 하회하는 저조함을 보이며 달러화 약세를 불러왔다.
삼성경제연구소 권순우 수석연구원은 “최근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이후 미국 경제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면서 달러화 가치가 추가로 하락할 것이란 전망이 빠르게 확산됐다”며 “미국의 고금리와 높은 성장률에 가려져 있던 대규모 무역수지 적자와 재정수지 적자가 다시 전면에 부각됐다”고 말했다.
스티븐 로치 모건스탠리아시아 회장은 “서브프라임 문제는 당분간 회복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여 미국 소비는 감소할 수밖에 없고 결국 미국 경기의 침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전망했다.
FRB의 잇단 금리 인하 역시 지난 몇 년 간 달러화가 급락한 원인 중 하나다. FRB가 금리를 낮추면 다른 통화의 금리 프리미엄이 부각되는 반면 달러화의 매력은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지난해 12월 11일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4.5%에서 4.25%로 인하했다. 월가의 전문가들도 연준이 향후 금리를 추가로 더 내릴 수밖에 없다고 내다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세계 최대 채권펀드인 핌코의 빌 그로스 최고투자책임자는 미국 경기 침체를 피하려면 금리를 3%대로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로스는 최근 투자자들에게 보내는 경제전망보고서를 통해 “침체 수준의 미국 경제에 활기를 불어 넣기 위해서는 4.5%인 금리를 3% 이하로 낮춰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최대 증권사인 메릴린치도 미국이 고유가와, 고용둔화, 부동산경기 침체, 신용위기 등으로 인해 경기 침체 위기에 놓여 있다면서 FRB가 경기 회복을 위해서 2009년까지 금리를 2%로 낮춰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씨티그룹도 미국 금리가 내년 6월까지 현재보다 1%포인트 낮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금리인하 기조에 동참, 달러 약세 기조 벗어날 수 있을 것
한편, 미국 경제 침체 여파로 인한 달러 약세가 일시적으로 완화되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지는 지난 12월 17일 달러가 유로화나 영국 파운드에 비해 뚜렷한 상승 움직임을 보였다고 보도, 이에 따르면 14일 달러는 유로에 비해 1.4% 올랐다. 투자자들이 미국 경제 상황에 대한 인식을 바꾸면서 다른 시장이 계속해서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달러는 지난해 11월 이후 꾸준히 달러가치가 상승하고 있다. 여기엔 유가, 곡물가 급등 등 인플레이션 우려가 확산되면서 FRB가 기준 금리를 추가로 인하할 가능성이 낮아진 것도 달러화 상승에 한 몫하고 있다. 금리 추가인하 가능성이 낮아지면 달러화를 보유할 때 벌어들이는 수입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또한 캐나다와 영국 중앙은행(BOE) 등이 신용경색을 극복하기 위해 미 FRB와 국제공조체제를 구축한 것도 달러화 가치 상승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런 일시적인 미국달러화 강세는 아시아 환율에도 영향을 미쳤다. 홍콩에서는 지난해 12월 17일 미국달러가 7.8017 홍콩달러로 거래되어 지난해 12월 14일 7.7980달러에 거래된 수치보다 소폭 상승했다. 중국에서도 14일 7.3715위안에 거래되었던 미국달러는 17일 7.3873위안으로 거래됐다.
최근 각국 중앙은행이 금리인하 기조를 보인 가운데 FRB가 금리인하 외의 다른 수단으로 경기둔화에 대응할 것이라는 시장의 전망이 나오자 달러화의 매력이 상대적으로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가 퍼지며 달러화는 주요 통화 대비 강세를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인플레 압력이 고조돼 각국 중앙은행이 이 같은 금리인하 기조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실제로 ECB나 일본 중앙은행(BOJ)은 인플레 우려로 금리인하를 단행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신용경색 우려에 따른 경기 둔화 예상에 따라 FRB의 추가 금리인하 가능성은 여전히 크다. 따라서 시장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글로벌달러 약세 기조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고 있다. 향후 FRB가 추가 금리인하를 단행하고 여타 중앙은행은 금리를 동결하면서 현재의 달러화 강세 현상은 조만간 종결되고 달러화의 가치는 다시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이들의 분석이다.
전승지 삼성선물 연구원은 “전 세계적으로 인플레 압력이 높아지고 있어 각국 중앙은행들이 금리를 인하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를 감안하면 FRB의 추가 금리인하 가능성은 여전히 크다”고 설명하며 “ECB와 BOJ는 당분간 금리를 동결하는 반면 FRB의 금리인하 기조는 유지되면서 글로벌 달러 약세기조는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투자자들과 경제학자들은 최근의 달러의 움직임을 단순한 일시적인 현상으로 볼지 더 긴 추세로 볼지 판단하기는 너무 이르다고 지적한다. 미국경제는 현재 해결해야 할 여러 가지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실 달러화 문제는 미국이 경상수지 적자를 어느 정도 개선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최근 미국의 경기회복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미국 재정적자의 경우 2006년 2,500억 달러에서 올해는 1,600억 달러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미국 경기가 조금 좋아져 세수가 증대됐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경기회복세가 되살아날 경우 달러화가 다시 강세를 띨 것이라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신민영 연구위원은 “약한 달러 정책으로 미국 수출기업들의 가격경쟁력이 점차 강화되어 경상수지 적자 증가율이 둔화되는 효과가 지난 3분기부터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며 “내년 상반기까지는 달러 약세가 완만하게 지속될 가능성이 크지만 ‘달러 패권의 몰락’은 지나친 우려”라고 말했다.
권순우 연구원은 “달러가 유일한 기축통화 노릇을 하는 건 이제 한계에 직면했다. 중국, 인도, 중동, 아프리카 경제가 고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미국 경제의 비중이 계속 줄어들고 있는데 이에 따라 달러화의 위상도 약화가 불가피하다”며 “달러 독점 시대가 끝나고 유로화· 엔화· 위안화 등이 달러와 함께 기축통화로서 점차 세계 경제의 한 축을 분담하는 체제가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로화는 달러 약세 속에서 이미 위상이 한껏 강화되고 있고, 엔화는 엔캐리 트레이드를 통해 세계 금융시장에서 파워를 확대하고 있다. 위안화 역시 중국의 경제규모가 급속히 커지면서 아시아 지역에서 영향력이 날로 확장되고 있다.

달러화 약세, 불균형 해소되는 과정 ‘나쁘지만은 않아’
실제로 달러화 대비 환율은 떨어졌지만 원화 환율은 멕시코와 대만을 제외하고 대부분 올랐다. 특히 호주나 뉴질랜드, 유럽, 캐나다, 인도, 태국, 브라질 등은 많게는 15% 이상 환율이 올라 수출 경쟁력이 높아졌다.
조선일보는 톰마소 파도아스키오파 이탈리아 재무장관의 말을 인용, “만약 6년 전 환율이었다면 우리는 지금 배럴당 90달러가 넘는 원유 수입에 훨씬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면서 “강한 유로가 유가 상승의 충격을 흡수해준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달러화 약세는 지난 수십 년 간 이어온 불균형이 해소되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미국의 경제주간지 포천은 지난해 10월 16일 “미국의 소비 축제는 끝났다”고 단연하며 “앞으로 미국인들은 과거처럼 마음껏 돈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한편, 달러화 약세로 미국의 물가가 상대적으로 싸지면서 쇼핑 관광객들이 크게 늘어나 유통 업체들은 이들을 유치하기 위한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달러화 약세로 뉴욕에서 싸게 물건을 구입하려는 관광객이 늘어나고 있다면 여름휴가철인 지난 8월에 뉴욕을 방문한 영국인이 작년 같은 달보다 22%나 늘어난 것을 소개하며 유럽의 근로자 계층도 미국 여행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달러화 가치가 떨어졌다고 전했다.
저작권자 © 시사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