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주 변호사

(시사매거진257=오병주 칼럼위원) 1987년 상주지청에 근무하던 시절 불교신자인 지청장께서 속리산 암자에 있는 어느 도사와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사실 다른 일정도 있고 하여 적절한 핑계를 대고 빠지려 했는데 입회계장이 ‘그 스님은 유명한 도승으로 좀처럼 상주 시내에 나오지 않으며 과거 6개월간이나 단식을 하여 주간지 등에도 기인으로 소개된 분이니 만나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했다.

당시 상주 시내에는 변변한 식당이 없었고 그나마 지역 유지들이 많이 이용하는 ‘금강식당’이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그곳에서 그 도승을 만나 식사를 하는데 도승이 상위에 놓인 불고기를 덥석 집어 먹는 것이 아닌가?

속으로 ‘이 스님이 땡땡이 중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얼른 밥상 위의 소주를 권했는데 이 스님이 내 마음을 읽었는지 자신은 음식은 가리지 않으나 술은 도를 닦는데 지장을 초래하여 이를 사양한다고 답변하며 자신이 중이 된 이유는 거창하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였다며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즉, 자신이 대학에서 전공을 동양철학으로 하여 교수가 되고자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하루는 도서관에서 주역을 공부하다가 자신이 주역에 이론에 의하면 어떠한 운명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았는데, 만 41세에 죽는 것으로 나오더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41세에 죽을 운명이 공부하여 대학교수가 되면 무엇 하겠냐며 이를 포기하고 자신의 생명 연장을 위해 도를 닦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날 스님과 헤어지고 나서 며칠 후 저녁 때 상주 시내의 어느 한의원에 놀러 갔다. 그런데 그곳 한의원장 말이 그 스님이 의학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오랜 기간 한의학을 연구해 온 자신의 처방은 듣지 않고 오히려 스님의 처방이 신통한 효험을 보았단다. 그 환자로 하여금 스님의 처방을 가져오도록 하여 분석했는데 자신이 해준 처방과 똑같았는데 다만 자신의 처방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이 감초를 0.5g 쓸 때 스님은 1g을, 당귀를 1g 쓸 때 그 스님은 0.7g을 쓰는 것처럼 단지 약재의 양적인 차이만이 있더라는 것이었다.

어찌하여 질적으로는 똑같은 처방이 단지 약재의 가감의 차이만으로 자신의 약은 환자에게 별 효험을 보이지 못하고 스님의 처방은 효험을 보게 되었는지 이상하여 그 스님을 찾아가 그 연유를 물으니 스님은 사람마다 인체의 바이오리듬 흐름이 있는데 그 사람의 바이오리듬의 흐름에 맞추어 약재의 가감을 조정해 주어야만 정확한 약효를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더라는 것이다.

그 스님은 좀처럼 속리산 암자에서 나오는 법이 없는데 어느 겨울날 상주 시내에 나와 동네 유지들과 담소를 나누다가 밤 9시가 넘은 시각에 암자로 돌아가겠다고 하여 이미 버스가 끊기었고 밖에는 무릎 높이까지 함박눈이 쌓여 상주 시내에서 유숙하기를 권했으나 부득불 가겠다고 우기어 할 수 없이 청년 2~3명을 암자까지 모셔드리도록 딸려 보냈는데 그 청년들이 신작로 길은 스님과 같이 잘 따라갔는데 암자 근처의 산자락에 이르자 갑자기 스님이 100여 미터 전방으로 사라져 결국은 암자까지 모셔다 드리지 못하고 상주 시내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도승은 지리산의 석구봉 도사처럼 축지법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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