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곡의 삶과 파주 화석정 그리고 십만양병설

(시사매거진256호=오경근 칼럼니스트/이관우 기자) 우리나라에서 뛰어난 명승고적지(名勝古蹟地)와 길지(吉地)를 자랑하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서울 북로를 통해 자유로를 타고 올라가면 임진강을 마주하는 파주시(坡州市)가 그렇다. 조선시대 광해군 때는 ‘기운이 쇠한 한양땅을 버리고 파주 교하(交河)로 도읍을 옮기자’는 ‘교하천도론(交河遷都論)’이 제기될 정도였다. 함경남도 마식령에서 발원한 강물이 흐를 뿐 아니라 ‘음택(陰宅)이 성해 위대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다’는 풍수지리에 의해서다. 지금도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거론되며 통일과업을 이루기 위한 최대 요충지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그런 파주에 오천원권 지폐 속에 새겨진 ‘율곡 이이’의 세거지인 율곡리와 후진양성을 위해 세워진 자운서원, 그리고 김장생이 감수한 <삼현수간>의 주인공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과 구봉 송익필 3인이 우의를 나누던 화석정이 위치한다.

파주시 법원읍 자운서원로 204에 위치한 율곡 선생의 선산일대 주변에는 율곡 선생의 생애와 관련된 유적들이 있어 이 일대를 국가에서 개발하고 보존했다.(사진_이관우 기자)

조선중기 대학자이며 정치가인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그는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나 파주 율곡리에서 성장했다. 9회에 걸친 과거시험에서 9회 모두 장원급제해 ‘구도장원공’이라 불린 그는 이후 선조 때 ‘십만양병설’, ‘대동법’ 실시, 사창의 설치 등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주장한 대표적 정치개혁가로 이름을 떨친다.

저서로 <동호문답> <성학집요> <격몽요결> 등이 있으며 대사헌을 비롯하여 대제학, 호조, 병조, 이조판서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성리학에 있어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서 이황과 서경덕의 설을 절충하여 ‘일원론적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였고,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후세의 학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한 율곡 이이의 삶은, 그가 살았던 지역과 함께 크게 3부로 요약된다. 1부는 그의 외가이며 출생지인 강릉 북평촌 오죽헌과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에 관련된 생애다. 2부는 본가이며 세거지인 파주 율곡리와 화석정 그리고 자운서당에 얽힌 성장기와 활동기다. 3부는 처가가 있는 황해도 해주 석담에서 관직을 고사하고 살던 은둔과 칩거의 삶이다.

율곡 선생 유적지 입구를 지나 우측 편으로 여성상의 표상인 신사임당과 율곡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진_이관우 기자)

#1. 강릉 오죽헌_ 율곡 이이의 출생과 어머니 신사임당의 추억

먼저 강릉 북평촌(현 죽헌동 201, 율곡로3139번길 24)에 위치한 ‘오죽헌(烏竹軒)’은 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이다. 그의 외가이기도 하면서 어머니 ‘사임당(師任堂) 평산신씨’의 외가이고 또한 외조모 용인이씨의 외가이다. 본래 이곳 오죽헌은 형조참판을 지낸 수재 최응현(이율곡의 외고조부)이 조산에서 살다가 북평촌으로 옮겨와 지은 강릉 최고의 전통 가옥이다.

이후 아들을 낳지 못한 최응현은 그의 둘째 딸 최씨(외증조모)와 결혼한 사위 이사온(외증조부)에게 물려주고, 이사온은 최씨 사이에서 외동딸 용인이씨(외조모)만 낳자 그 사위인 평산신씨 가문의 신명화(외조부)에게 가옥을 물려준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딸 5명이 태어나게 된다. 그중 둘째가 ‘사임당 신씨(이율곡의 모친)’로서 파주 율곡리에 사는 덕수이씨 가문의 이원수(이율곡의 부친)와 결혼하여 4남3녀 중 3남으로 율곡 이이를 낳는다. 이후 용인이씨(조모)는 둘째 딸 사임당(모친)의 아들 율곡 이이에게 조상의 제사를 받들라는 조건으로 서울 수진방(지금의 수송동과 청진동 일대) 기와집 한 채와 전답을 물려준다.

이후 모친인 사임당 신씨는 외조모인 용인이씨가 아들 없는 집안의 외동딸로서 ‘아들잡이’ 노릇을 했던 것과 같이 강릉 오죽헌에 머물며 친정 살림을 도맡게 된다. 진사 벼슬로 서울에서 생활하는 외조부 신명화와 16년간 떨어져 살아야 했던 것처럼, 파주 율곡리에 거주하는 부친 이원수와도 떨어져 지내야 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 4남3녀 중 3남으로 태어난 율곡 이이는 어린 유년시절을 유복한 강릉 북평촌 오죽헌에서 지낼 수 있었다. 이후 조부 신명화가 별세하자 3년상을 마친 사임당 신씨가 서울로 올라왔고, 종종 외가인 강릉 살림과 본가인 파주 살림을 보살펴야 했던 어머니로 인해 이율곡 역시 강릉과 파주를 오가야 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그 중간 지점인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 살림집을 둔 부모의 집을 왕래하기도 했다.

이후 본가 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올라온 어머니와 함께 조모인 용인이씨가 물려준 ‘수진방’과 새로 마련한 ‘삼청동’ 새 집을 오가며 율곡 이이는 한양 사람이라는 신분을 얻게 된다. 하지만 그의 나이 16세 때 어머니 사임당 신씨의 죽음으로 크나큰 정신적 충격을 입은 율곡 이이는 금강산 암자를 찾아 불교계에 입문한다. 1년 남짓 불경을 공부하며 수도생활을 마친 그가 다시 성리학을 완성하기 위해 하산하기까지 ‘입지의 시간’을 힘겹게 보낸 것으로 기록된다.

율곡 선생유적지 제일 위 쪽에는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는 율곡 선생의 묘가 있다.(사진_이관우 기자)

#2. 파주 율곡리_ 율곡 이이의 본가 세거지와 입신양명 시대

파주의 역사적 지명은 고구려 장수왕 때 ‘술이홀현’이라 부르던 것이 시초다. 이후 신라 경덕왕을 거쳐 고려 명종 그리고 조선 태조와 세조를 거처 원평군에서 파주목으로, 그리고 다시 고종 32년에 파주군으로 변경되어 불리고 있다. 1914년에는 서남쪽의 교하군이 파주군에 편입되었고 1996년에는 파주시로 승격이 되었다.

그러한 파주에서 ‘율곡 이이’의 본가며 세거지는 법원읍 법원리에 있다. 하지만 율곡 이이는 어린 시절을 아버지의 고향인 ‘율곡리(밤골마을)’에서 보냈고, 나이가 들어 벼슬길에 오른 뒤에도 황해도 해주의 경치 좋은 석담과 함께 이곳을 즐겨 찾아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또한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이곳에서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며 시 짓기를 즐겨했다. 그의 호 ‘율곡(栗谷)’도 이곳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워진 ‘자운서원’도 파평면와 법원면 사이에 위치한다.

율곡 이이의 부친인 이원수는 사헌부 감찰(정6품)을 지냈으며, 증조부인 이의석은 홍산현감을 지냈다. 또한 당숙인 이기와 이행, 이미 형제는 당대의 실권자로서 위세가 대단했다. 때문에 이이는 자신의 가문을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은 집안’이라 칭했고, 스스로 자신을 ‘세신(世臣)’이라 불렀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이미 3세에 글을 읽었고, 1543년(중종 38)인 8세 때는 ‘화석정에 부친 시’와 더불어 1545년 10세 때 ‘경포대부’를 지었다. 그리고 13세 때는 진사초시에 합격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1551년 16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경을 연구하다가 1년 만에 하산하고 <자경문>을 지어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또한 1557년(명종 12)에는 경북 성주군 성주목사로 치리하던 노경린의 딸과 결혼하였고, 1561년에는 부친 이원수가 별세하여 상을 치렀다. 1564년 7월 생원시에 장원한 이후 9회 과거시험에 9회 모두 장원급제해 ‘구도장원공’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후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예조좌랑, 사간원정언, 이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 사간원 대사간, 황해도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대제학, 호조·병조·형조·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율곡기념관은 1층에 영상실, 디지털갤러리, 체험실 등을 갖추었고, 2층에는 율곡 선생의 생애와 학문, 철학과 사상, 저술 등을 알기 쉽게 전시해 놓았다.(사진_이관우 기자)

#3. 이율곡의 예측대로 전란의 횃불 된 ‘화석정’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으니 시인의 생각이 끝이 없어라
먼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 받아 붉구나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는다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처량한 울음소리 저녁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 8세 이이가 지은 ‘화석정 팔세부시’ 전문 -

이곳 파평면 율곡3리 임진강변의 화석정은 덕수이씨 가문 5대 조부인 이명신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율곡 이이가 즐겨 찾으며 사색을 즐기던 장소로 명소가 되었으며, 특히 그의 친구인 우계 성혼과 구봉 송익필 3인이 우의를 나누던 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화석정은 율곡 이이의 사후 임진왜란을 맞은 선조가 도피할 때 사용한 횃불의 역할로 특별한 이력을 더한다. 1592년 왜구가 조선으로 물밀 듯이 쳐들어왔다. 최후 방어선이라고 믿던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이 패하여 왜구가 물밀듯 서울로 진입해 오자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길을 떠난다.

서울을 떠난 이튿날 밤, 일행은 임진강 나루터에 도착하였으나 비구름으로 한치 앞을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때마침 소나기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려 시야를 분간할 수 없었다. 선조 일행은 강을 건너기 위해 겨우 사공과 배를 찾았지만, 비바람으로 횃불조차 켤 수 없는 상황이라 주저하고 있었다.

이때 도승지 이항복이 강기슭에 있는 정자를 발견하고 뛰어 올라가 불을 질렀다. 이 정자가 율곡 이이가 들기름을 듬뿍 발라 닦은 화석정이었다. 아무리 비가 많이 내리고 있어도 정자에는 들기름이 가득 묻혀 있었으므로 순식간에 타올랐다. 그 불빛을 이용하여 선조 일행은 간신히 임진강을 건널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율곡 이이는 선조에게 왜구의 침공에 대비해 10만 대군을 양성해야 한다는 ‘10만양병설(수도인 한양에는 2만 명, 각 도에는 1만 명씩 양성)을 주장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이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장차 일어날 일을 걱정하여 화석정에 들기름을 발랐던 것이다.

자운서원은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된 서원으로 유적지 북쪽에 위치해 있다.(사진_이관우 기자)

#3. 황해도 해주_ 율곡 이이의 처가와 본가 아우른 석담시절

1574년 40세의 율곡 이이가 지병으로 황해도 관찰사를 사직하고 본가인 율곡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선조의 부름을 받아 홍문관 부제학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해 6월 유희춘의 추천으로 왕명에 따라 사서오경의 언해에 착수하게 된다. 그는 같은 해 9월에 <성학집요>를 지어 올렸다. 선조가 공부해야 할 내용을 모아 정리한 <성학집요>를 올린 후 초학자 훈육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격몽요결>의 집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576년 41세 때 다시 병조참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관직을 사임하고 율곡리로 돌아갔다. 그해 10월에는 황해도 해주 석담(石潭)에서 살 계획으로 ‘청계당(聽溪堂)’을 짓고, 1577년 1월 황해도 해주 석담에서 가족들을 모아 놓고 <동거계사>를 짓는다. 그해 12월에 <격몽요결>을 완성하고, <해주향약>과 <사창>을 의논하여 세운다.

그리고 1584년(선조 17) 1월, 오랜 지병을 앓다가 49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 기슭의 선영에 예장되었다. 또한 해주 석담의 소현서원, 파주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제향 되었다. 그리고 1624년(인조 2) ‘문성’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이렇게 율곡 이이는 현실적인 문제해결을 중시하는 실천적 학문으로, 조선 유학계에 영남학파의 거두인 이황과 함께 쌍벽을 이루며, 기호학파를 형성 주도하여 조선시대 성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율곡의 이러한 학문 경향은 정치·경제·교육·국방 등에 걸쳐 구체적인 개선책을 제시하여 경세가로 탁월한 경지를 보여준다.

율곡 선생 선대의 정자였던 화석정은 율곡이 자주 찾는 곳으로 임진나루 바로 위쪽에 위치했다. 임진왜란 당시에 불탔던 것을 1673년 다시 중건,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파주 유림들이 복원하였다.(사진_이관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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