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매거진255호=오병주 칼럼니스트) 몇 년 전 지리산 어느 암자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으로 지목된 자는 지리산 반대편 암자에 있던 석구봉 도사였다. 살인사건의 경우는 여자 스님들이 기거하는 암자에서 석구봉 도사가 강제추행을 시도하다 반항하던 여스님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관할 진주지청의 검사는 이 사건을 수사하여 법원에 기소했다.

그런데, 석구봉 도사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그 근거로 자신이 범행시각 50분 전에 지리산 건너편에 있는 자신의 암자에서 신도 100여 명을 상대로 설법을 하였음을 주장했다. 일종의 알리바이를 주장했다.

당시는 지리산 관통 도로가 생기기 훨씬 전이므로 자동차를 타고 가도 1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를 걸어서 가자면 한 나절이 더 걸릴 터이니 완벽한 알리바이가 성립되는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석도사의 범행 장면을 목격한 또 다른 여승이 증언이 있어서 과연 이 여승의 증언을 믿을 것인지 아니면 석도사의 알리바이를 입증해 주는 다른 신도들의 증언을 믿을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다.

한편 석구봉 도사는 이와는 별도로 북한을 고무 찬양한 죄고 재판을 받고 있었다. 검사의 집요한 추궁이 있자, 석구봉 도사는 ‘재판장, 기록 제2책 190정 참고인 정 아무개의 진술조서를 읽어 보시오’하는 것이 아닌가?

재판장이 두꺼운 기록을 꺼내어 읽어 보니 과연 석구봉 도사가 주장하는 바와 부합되는 정황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학력도 국졸 미만이고 변호사도 선임되지 아니한 피고인이 어떻게 법관이 가지고 있는 기록 내용을 더군다나 페이지까지 거론하며 알 수 있는가?

재판장과 검사가 석구봉 도사의 초능력에 감탄하는 가운데 심리가 끝나고 2주 후 판사가 징역형을 선고했다.

그러자 석구봉 도사는 조용한 법정에서 갑자기 껄껄 웃더니 ‘재판장, 당ㅇ신이 재판을 한 것이 아니고 개판을 쳤소’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그 연유를 물으니 반공법(현재의 국가 보안법) 제 몇 조에 의하면 김일성을 고무 찬양한 죄에 대하여는 왜 자격정지형의 선고를 빼먹었느냐는 것이었다.

위 선고는 그 피고인 및 검찰의 항소에 따라 상소심에서 파기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에 따라 당ㅇ시 진주지원 재판부는 이 같은 초능력을 지닌 석구봉 도사라면 50분 전에 설법을 마치고 축지법으로 건너편 암자에 가 강제추행을 시도하다가 살인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고 보고 살해 현장의 목격자의 증언을 받아들여 살인사건에 대하여 유죄를 선고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그 후 어느 방송국의 법정야화를 통해 세간에 소개된 바도 있다.

수십 년 전 재판이 아니고 요즈음의 재판이었다면 알리바이가 입증되는 석구봉 도사의 살인사건은 유죄 선고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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