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수 발행인

(사매거진255호=김길수 발행인)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오사카 G20 정상회의 때 한·일 정상회담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는 만날 준비가 돼 있지만 일본은 준비가 안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앞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도 지난달 22일 “G20 회의 주최국 의장이므로 일정이 꽉 차 있다”며 정상회담 불발을 밝혔었다. 시간 부족을 핑계로 한·일 정상회담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낸 셈이다. 그러자 청와대 측도 이에 질세라 “우리도 양자회담 일정이 거의 다 찼다”고 응수했다. 15여 개국 정상과 회담을 하면서 가장 가까운 이웃을 만날 시간은 없다는 것이다. ‘만나기 싫다’는 얘기다. 우리 정부의 정상회담 제안에 일본이 응하지 않은 것이다. 양국 갈등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금 한·일 관계는 외교·안보·경제 성한 곳이 없다. 강제 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 위안부 재단 해산, 초계기 갈등 등이 이어지면서 깊어질 대로 깊어진 감정의 골이 이제는 민망한 모습을 감출 수 없는 지경으로 가고 있다. 문제는 지금보다 더한 일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주 한국 측이 제안한 강제징용 배상 해법을 일본은 1시간도 안 돼 거절했다. 작년 말 처음 거론될 때는 일본도 긍정 검토했던 안(案)이지만 청와대가 “발상 자체가 비상식적”이라고 잘랐다. 그걸 G20을 앞두고 다시 꺼내니 이번엔 일본이 거절했다.

이번 G20 정상회의 기간에 한·일 정상회담이 성사되면 최악으로 치닫는 양국 관계의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됐다. 그런데도 G20 정상회의 의장국인 일본이 이웃 나라 한국과의 정상회담에 응하지 않은 건 무책임한 태도다. 한·일 관계의 악화는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일본 정부의 책임이 크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남북관계에만 매달려 외교 지평을 넓히지 못한 것과 치밀한 전략 없이 무턱대고 정상회담 개최를 추진한 정부에도 문제가 있다. 정부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 평화 정착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면서 한·일 관계를 이에 맞추다 보니 대일 외교에 소홀한 측면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외교가에서 ‘한국 외교가 실종됐다’는 우려가 나오는 실정이다.

또 우리 외교 라인의 난맥상도 드러났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한·일 정상회담 개최와 관련해 “결정된 것이 없다”며 청와대 고위관계자와는 다른 발언을 했다. 청와대와 외교부가 손발을 맞추지 못하는 것이 우리 외교의 민낯이다. ‘외교부 패싱’이란 말까지 나온다.

미 국무부 한국과장은 “솔직히 말해 한·일 관계가 좋지 않으면 우리는 북한과의 협상에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빈말이 아니다. 그런데도 외교부는 국회에 보고한 북핵 문제 해결 방안에서 “중국·러시아와 긴밀한 소통을 유지하겠다”며 일본만 뺐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지정학적으로 가장 가까우면서 경제적으로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북핵 문제와 안보 분야에서도 공조가 절실하다. 정부가 지금처럼 남북관계 개선에만 치중한다면 한국 외교의 위상은 더 실추될 수밖에 없다. 한·일 관계가 갈수록 틀어지는 사이, 2~3년 전까지도 으르렁대던 일본과 중국은 빠르게 밀착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게 내년 봄께 일본에 국빈 방문해 달라고 요청할 거라고 한다.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먼저 관계를 개선할 나라가 바로 일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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