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매거진=김민수 기자] 보는 것만으로 인생의 방향성을 재조정할 힘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구체적인 용기가 필요한 인생의 시기를 마주한 여성환경연대 활동가 ‘조화하다’가, 앞서 걸었고 지금도 걸어가고 있는 마음 근육 탄탄한 선배이자 동료들을 찾아가 전수 받은 경험의 말들을 한 권에 담았다.

<리틀 포레스트>의 영화감독 임순례, 제주도의 젊은 여성 정치인 고은영, 싱어송라이터 요조, <까칠남녀>의 사이다 여성철학자 이현재, 동물권에 귀 기울이는 비건 셰프 린, 지속가능한 경영 모델을 세운 여우책방의 지숲, 토종 씨앗 연구자 김신효정, 쉽게 결정에서 배제되던 여성의 자리를 새로 세우는 채은순, 자신을 돌보는 요리를 연구하는 문성희, 빵을 굽고 여신들을 노래하는 뮤지션 안혜경까지, 공통점은 에코페미니스트라는 것뿐, 사는 모습도 성격도 하는 일도 다 다르지만 경험에서 나온 힘 있는 언어로 전하는 문장들은 읽는 것만으로 삶 전체를 응원 받는 기분이 든다. 《괜찮지 않은 세상 괜찮게 살고 있습니다》는 혼란스러운 인생의 문턱에 서 있는 여성들에게 명징한 방향성과 용기를 전달하는 책이다. 꼭 에코페미니즘을 잘 알지 못해도 괜찮다. 이 책을 펼친 당신은 자신만의 위대함을 찾을 준비가 된 열세 번째 여자들이다.

살아온 만큼 나는 내가 되었습니다

남들처럼 수능을 보고 대학을 가고 취업 준비를 하고 회사에 들어가고, 결혼을 했는데도 정말 내 길이 맞는지 의문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에는 두려움이 들고 가만히 있기에는 막막한 순간. 설령 인생의 ‘무모한 도전’을 꾀한다고 해도 옳은 선택을 한 건지 확신이 들지 않기도 한다. 잠깐이라도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서 내가 한 선택이 옳았는지, 잘 살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 ‘잘 될 거다’라는 막연한 위로도 싫고 그렇다고 ‘그렇게 하면 안 되지’라는 핀잔이나 편견도 싫다. 망망대해를 떠도는 배가 될지라도 불필요한 사공 대신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등대’가 필요하다. ‘이렇게 살다가 이번 생 망하는 거 아니야?’ 불현듯 불안감이 엄습할 때, 나보다 조금 앞서 비슷한 길을 걸어간 여성들이 잘 사는 모습을 보면 다시 한 번 세상에 뛰어들 힘을 얻는다. 여성환경연대의 활동가 ‘조화하다’도 자신의 결정에 따라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그녀 역시 더 구체적인 모습의 용기가 필요한 인생의 시기를 마주했고, 그래서 주변의 선배이자 동료들을 찾아 나섰다.

 

불필요한 백 마디의 위로 대신, 하나의 확신을 주는 행동을 하는 여자들

인생에 정답은 없지만 동시에 정말 많은 정답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가장 중요한 건 나만의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용기를 갖고 알을 깨서 새로운 세상을 맛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괜찮지 않은 세상 괜찮게 살고 있습니다》는 12명의 말을 빌려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질러버려도’ 괜찮다고 말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이자 동물보호단체 대표이기도 한 임순례 감독은 주류에서 벗어나는 것은 삶에 있어서 실패한 것이 아닌 오히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회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으로 삶을 살아온 그녀의 삶이 엿보인다. 페미니스트 비건 셰프이자 활동가인 린은 서로를 공감해주고 알아주는 ‘감수성’의 존재를 강조하며, 비주류의 언어일지라도 비건을 향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설령 비건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마저도 공감하고 이해하는 그녀의 행보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거침이 없다. ‘여우책방’의 책방지기 지숲도 다양한 모임을 통해 동네 주민들과 소통하며 동료들과 함께 그녀 인생만큼이나 변화무쌍한 책방을 이끌고 있다.

제주도의, 제주도에 의한, 제주도를 위한 젊은 여성 정치인 고은영은 귀를 막고 있는 한국 사회에 계속해서 편지를 보내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세상을 향해 확성기를 든 나영도 적(노동), 녹(생태), 보라(여성)의 문제를 개별적으로 보는 것에 문제의식을 갖고 나아가고 있다.

이렇듯 이 책은 우리에게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제대로 아는 것, 그리고 그 방향이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인지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바꾸며’ 사는 여자들

세상에는 수많은 잣대와 압박이 존재하지만 그 틈새에서 구멍을 내려는 사람들이 있다. 할머니들의 밭일을 거들며 토종종자에 대한 논문을 쓴 김신효정도 그렇다. 그녀는 토종씨앗이 먹거리를 넘어 농민의 권리라고 주장하며, 앞서 사회의 기준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향대로 나아간 여인들처럼 그녀만의 인생을 일군다. ‘책방 무사’를 운영하는 요조도 하루하루 무사하지 않더라도 결국 내 인생은 ‘무사’하다고 말한다. 설령 생산적이거나 효율적이지 않더라도 ‘기어이’ 뭔가를 하는 인생이야 말로 ‘나다움’이라고 내비친다.

사회 규범에 내재화된 ‘주체’가 아닌 삐딱한 ‘비체’가 되고자 하는 여성철학자 이현재도 끊임없이 ‘담론’을 이끌어내며 함께할 사람들을 찾고 있다. 동네 여성들을 모아 ‘카페 또봄’을 연 채은순도 억제되어 있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잔잔하면서도 강렬하게 터트리고 있다. ‘임금노동자’와 ‘가정주부’ 등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여성의 역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동네 페미니즘 활동가 모아나도 그렇다. 그녀는 지역 활동을 통해 ‘엄마’로만 한정되어 있던 자신의 역할에서 뛰쳐나와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인생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자신을 돌보는 것은 밥상부터 시작한다는 문성희는 다른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은 자기 돌봄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밥과 숨’은 과거보다 나아지려는 노력과 이어져 있다. 여신을 노래하는 안혜경의 행보 또한 좋아하는 일이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는 걸 보여준다. 지리산에서 빵을 굽고 삶을 노래하는 안혜경의 이야기는 ‘나만의 정답’을 찾은 그녀의 확신을 내비친다.

‘기어이’ 무언가를 해서 정답을 찾은 그들의 이야기는 완벽하고도 미완의 완성이다.

 

나다운 삶을 살고 내가 되었어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이런 대사가 있다. “남들이 결정하는 삶은 살고 싶지 않아.” 어쩌면 우리 개개인 모두의 바람이지만 그만큼 다짐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기어이 사회의 기준과 억압에 구멍을 내버리겠다고, 12명의 여성들은 담담히 우리에게 전한다. 닫혀 있던 문을 열고 경험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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