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매거진=김민수 기자] 2009년 7월 31일은 죽산 조봉암 선생이 처형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당시 여당과 야당은 이례적으로 한목소리를 내며 조봉암 선생의 명예회복을 촉구했고 언론 역시 그 어느 해보다 조봉암의 50주기를 관심 있게 보도했다. 조봉암 50주기를 떠나 한국현대사에서 서서히 잊히고 있는 조봉암이 재조명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죽산 조봉암은 한국현대사 비극의 시작점이었다. 당시 이승만과 여기에 기생하는 검찰․법조인 등 기득권 세력들은 용공좌경의 딱지를 붙여 조봉암의 목에 밧줄을 걸었다. 그리고 이러한 수법은 1950년대에서 끝나지 않고 박정희, 전두환 시대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저자는 서문에서 “50년이 지난 지금 이 땅은 통일은커녕 평화가 심대한 위협에 직면해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라고 말한다. 즉 조봉암에 대한 정치보복이 이후 ‘한국현대사 비극의 시작점’이 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죽산 조봉암 평전》은 바로 이 ‘시작점’을 다룬 책이다.

총 14장과 부록으로 구성된 이 책의 1~3장은 조봉암의 유년시절 그리고 그의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조봉암은 3.1운동 주동자로 지목돼 1년간 옥살이를 하면서 민족과 역사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고, 이는 조봉암이 사회주의사상에 심취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4~6장은 조봉암의 공산당운동에 초점을 맞췄다. 조봉암은 조선공산당의 모체인 화요회에 뒤늦게 참여해 집행위원으로 활동했고 이후 상해에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국내세력과의 끊임없는 마찰과 종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으며 쉽지 않은 길을 걸어야 했다. 특히 6장에서는 일제 말기 조봉암의 전향 의혹을 다루었는데 이는 해방 뒤 다시 한 번 논란이 된다.

7~8장은 과격 공산주의운동과 결별하게 된 원인 그리고 이후 이승만의 초대 내각에 참여하게 된 배경을 이야기한다. ‘친애하는 박헌영 동지에게’라는 공개서한을 발표한 후 과격 공산주의운동과 결별한 조봉암은 분단정부에 참여해 제헌의원에 당선되고 아울러 이승만 내각에서 농림부장관으로 발탁되었다. 당시 조봉암이 만든 농지개혁법안은 비록 기득권세력의 방해로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많은 농민들에게 환영받았고 대한민국 존립에 버팀목이 되었다.

9~11장은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한 조봉암과 이후 이승만과 대립하게 되는 과정을 다루었다. 이승만과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유지했던 조봉암은 제2대 대선에 출마하면서 이승만과 대립하게 된다. 이후 조봉암은 노골적인 이승만 정부의 탄압 그리고 보수 야당의 조봉암 견제 등으로 힘겨운 길을 가게 된다.

마지막으로 12~14장은 진보당 창당과 진보당사건으로 사법살인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결국 그를 옭아맨 것은 공산주의였다. ‘평화통일론’과 ‘고루 잘 사는 사회’를 꿈꾸었다가 ‘용공좌경’으로 몰려 1959년 7월 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최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진보당사건이 정치탄압이므로 명예회복 조처를 취하라고 국가에 권고했다. 그러나 아직 명예회복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책을 비롯해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시작된 지금, 사법부는 재심을 통해, 정부는 사과를 통해 조봉암 선생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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