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자존심을 되찾는 ‘소리 없는 전쟁’이 시작되다
적절한 조사·평가 없이 방치, 환수된 문화재 4,870여 점으로 환수율 6.5%에 불과

한 방송프로그램에서 범 국민운동 ‘74434프로젝트’를 통해 우리의 문화재를 되찾자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74434’는 지난해 2월 말 문화재청이 조사한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의 문화재 수를 뜻한다. 현재 우리 문화재는 20개국에 흩어져 있으며 문화재청이 지난해 8월 6일 국회 문광위 소속 한나라당 정병국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같은 해 2월보다 877점이 더 늘어난 총 75,311점으로 집계됐다. 이 수치는 각종 자료를 취합해 문화재 유출실태를 파악한 결과여서 실제 유출된 문화재는 이보다 많을 것으로 관계자들은 내다보고 있다.

그동안 관심 밖이었던 해외 유출 문화재에 대한 관심은 한 TV프로그램에서 시작됐다. ‘74434’라는 낯익은 숫자가 우리가 지켜야 할 자존심이란 사실 깨달아 가면서 등한시 했던 해외 유출 문화재에 국민들이 차차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무관심’속에서 방치되어 왔던 우리 문화재가 자칫 역사 속으로만 매장 될 뻔 했던 안타까운 현실을 자각하며 ‘우리의 뿌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에 국민들이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사회적 혼란기에 유출된 문화재들
우리 문화재가 유출된 시기는 대략 세 시기로 구분된다. 그 첫 번째가 구한말 시기로 서구 열강들이 한국에 앞 다퉈 진출했던 시기로 우리 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한국 유물을 수집했다.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듯이 이 시기에 유출된 유물 대부분은 민속품이었으며, 미국, 러시아, 독일, 네덜란드 등 서방에 주로 유출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일본 관민의 합작에 의한 약탈 등 우리 문화재의 유출이 절정에 이른 어두운 시기였다. 한국전쟁 때에는 한국에 진출한 외국인들에 의해 유출된 것으로 이 시기의 유출에는 주로 전문적인 외국인 수집가들이 관여했다.
특히 구한말 이래 외국에 유출된 우리 문화재는 당시의 대상을 반영해 강압에 의한 약탈, 기증, 선물, 매매, 밀반출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유출되었으며 그 양은 실로 막대하다. 그 종류도 민속자료에서부터 고고자료, 고 미술품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약탈 및 도굴 등으로 문화재 유출
우리 문화재 유출된 사례를 보면 강압에 의한 약탈, 학술조사를 가장한 도굴, 관 등이 개입해 유산을 일본으로 밀반출, 서양 외교관들에 의한 유물 반출, 개인 수집가들에 의한 유물 수집사례다.
그 예로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서들은 원래 강화도 외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강압적으로 약탈해 갔다. 1993년 고속철도 열차가 프랑스 떼제베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약속했으나 국가 간 합의에도 프랑스 문화계의 반발로 외규장각 도서는 지금까지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1905년을 전후해 가성, 해주, 강화도 등지의 고려시대 고분을 도굴해 유물들을 일본으로 무더기로 밀반출했다. 그 중 가루베라는 일본인 도굴꾼은 백제고분을 연구한다는 미명 아래 백제유물을 온갖 불법적 수단을 동원해 수집하거나 도굴, 송산리 6호분은 그의 대표적인 도굴 사례다. 8·15해방 직후 그는 온갖 불법행위로 모은 트럭 한 대분에 해당하는 유물을 싣고 대구로 도망쳐 같은 짓을 일삼았던 오구라와 합류해 유물을 일본으로 밀반출했다. 오구라는 풍부한 재력으로 불법 도굴품들을 수집, 그는 패망 후 불법 수집한 유물들을 일본으로 교묘히 밀반출했는데 그 유물들은 현재 오구라 미술관, 동경박물관 오구라컬렉션 등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등이 개입해 조선시대에 국가적으로 귀중한 서적을 보관했던 사고의 장서 중 중 오대산 사고본을 빼돌리기도 했다. 지난 1914년 총독부 소속 관원들과 평창군 서무주임 오케구치 등이 주동이 되어 오대산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서책 150점을 강릉, 주문진을 통해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밀반출시켰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불타버렸다.
1880년 이후에는 외교관들이 조선에 출입하게 되면서 조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한국 골동품에 대한 수집도 시작됐다. 그 중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베베르는 우리 민속품의 러시아 유출에 큰 역할을 했으며, 프랑스 공사 플랑시는 재임기간 중 인류학자 바라와 모리, 쿠랑 등의 도움을 받아 한국 유물과 고서적을 상당수 수집했다. 이 유물들은 현재 파리 국립기메동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국립기메박물관에 소장된 한국유물은 914점으로 그 중에는 ‘철조 천수관음보살 좌상’과 같이 국내에는 희귀한 유형의 불상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플랑시의 수집품에는 수백 권의 고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직지심체요절’은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인쇄한 것으로 매우 귀중한 서적 중 일부이다.
개인 수집가들에 의해 유물이 유출된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개인 수장가이자 주한 미국대사관 문정관이었던 그레고리 핸더슨, 로버트 무어, 윌리엄 모지 등을 꼽을 수 있다. 그 중 핸더슨의 소장품은 현재 하버드 대학의 포그 박물관에 소장되었으며, 무어의 소장품은 국보급 문화재까지 포함된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퇴역 중령이었던 모지는 1972년부터 한국의 공수특전단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약 5,000점에 달하는 유물을 수집하였으며 이중 2,000여 점을 미네소타 대학에 기증하고 400여 점은 대여했다.
한편, 구미의 주요 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불화 등과 같이 반출 경위가 명확하지 않은 사례도 있다. 이들 박물관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미국 프리어 갤러리 클리브랜드 박물관, 필라델피아 박물관 호놀룰루 미술관, 영국 대영박물관,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 독일 베를린 박물관, 벨기에 브뤼셀 박물관 등이다. 그 중에는 하버드 대학의 포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관음보살 좌상’과 같이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명품들도 있다.
당시 불화는 불상이나 석탑과 같은 중량물이 아니라 한 손에 들 수 있는 가벼운 것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던 밀반출 자들에게는 선호되던 유물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불법 반출을 일삼던 일본인 무법자들에게 약탈당했거나 혹은 헐값으로 팔아넘긴 것으로 보인다.


해외 유출문화재 어떤 것들이 있나
■몽유도원도=일본 천리대 중앙 도서관 소장. 1447년 작품으로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꿈에 도원에서 논 광경을 안견에게 말하여 그리게 한 것으로 안견은 이 그림을 3일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거기에는 안평대군의 제서와 시 1수를 비롯해 당대 20여 명의 고사(高士)들이 쓴 20여 편의 찬문이 들어 있다. 한국 산수화 발전에 큰 영향을 준 작품이다. 몽유도원도는 1592년 일본이 한국에 침략해서 빼앗아 갔으며 우리가 몽유도원도를 빼앗긴지도 어느덧 400년이 넘었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1392년부터 1863년까지 472년간에 걸친 조선왕조의 역사서 조선왕조실록이다. 월정사 주지가 보관해오던 이 오대산 사고본은 초대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등에 의해 약탈당해 일본으로 옮겨졌다. 3,600책이던 귀중한 실록은 관동대지진 때 대부분 불타고 47책만이 남아 도쿄대 도서관 한 켠에 방치돼왔다.
■묵란석첩=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 조선시대의 조희룡 작품으로 먹으로 그린 난초와 돌 그림을 모은 책. 모두 24폭으로 구성된 절첩으로 2폭씩 한 작품을 이루고 있다.
■귀거래도=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 사서화의 삼절로 지칭되는 강희안은 15세기 조선초기에 가장 두드러진 문인화가이며, 조선중기 화단을 크게 풍미한 절파계 화풍의 선구자이다. 이 그림은 벼슬을 사직하고 전원의 자유로운 삶을 찾아 귀향하는 ‘귀거래사’를 지은 도잠이 주인공이다.
■견갑형동기=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 청동기시대, 경상북도 경주에서 출토 거북이등껍질 모양의 청동기로 한국식 동검문화 성립기의 것으로 보인다. 나팔형동기와 함께 요령지방의 정가와자유적에서 유사한 청도기가 출토된 바 있기 때문에 요령식 동검문화의 요소로 생각되며 사슴 등의 형상문이 시베리아의 샤머니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이기 때문에 사냥 의식과 관련된 의기로 추정된다.
■지태흑칠새우문오합=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 고려시대 지태란 종이와 같이 매우 얇게 만든 도자기. 다섯 개의 합 위에 흑칠을 하고 뚜껑 표면과 측면에 새우를 그렸다. 이 오합과 같은 형식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자상감투각구갑문화장상자’와 ‘목심흑칠화장합’ 등이 있다.
■금동인장=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 조선 18세기에서 19세기 거북모양의 금도장. 한수정후인이라는 한자가 양각되어 있다. 한수정후는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관우에게 내려진 봉호이다. 이 인장은 거북으로 꼭지를 하였으며 거북꼭지 인장양식은 임금의 어보와 유사하여 관왕묘에서 사용하기위해 왕실의 제도에 따라 제작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인장이 거북꼭지 형태를 가지 시작한 것은 고려 공민왕 19년 5월에 명나라 태조가 도장 꼭지가 거북의 모양인 금도장을 보내온 이후로부터 보인다.
■홍칠십이각풍혈반=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 조선 19세기 말 12각 반면에 8각의 판각다리, 풍혈 모양을 새겨 붉은 칠을 한 상으로 8각 다리에는 방형, 원형, 만자, 여의두문 등을 투각하여 이동시에 손을 넣어 잡을 수 있도록 했다. 다리 아래쪽 모서리마다 망두형감잡이를 대었다.
■화각합죽선=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 조선 19세기 화각이란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쇠뿔을 오려 아주 얇게 덧붙인 것으로 베갯모, 참빗 따위에 응용되는 기법이다. 합죽선은 죽피를 맞붙여 40~50개의 부채살을 갖춘 대형으로 대와 수공이 많이 소요되는 최고급 부채였다.
■청자음각초화문화형탁잔=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 고려 12세기 음각으로 꽃을 새겨 장식된 탁잔 세트로 투명한 청록색 유약을 발라 만든 청자다. 잔과 탁은 모두 구연부를 8엽 화형으로 다듬었으며 특히 잔의 몸체는 골을 눌러 화판을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외면의 음각문은 일정한 굵기의 가는 선을 사용해 부드러우면서도 도안적인 장식효과를 보여주고 있으며, 잔 받침면 언저리를 인화기법으로 연주문 장식을 돌렸다. 잔탁의 이러한 형식과 기법은 금속기를 모델로 한 대표적인 예로 전성기 고려청자의 수려함을 잘 보여준다.
■동판금강야차명왕상=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 통일신라 9세기 때로 금강야차, 사찰 문의 좌우에 서서 수문신장의 역할을 하는 일종의 수호신으로 원래 불상을 모셔두는 방에 장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체형태는 긴 사각형으로 상부에 목조건물의 지붕부를 표현,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듯하며 상호는 무섭게 표현되었다.
■은평탈육각합=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 통일신라. 출토지가 경남이라고만 알려졌을 뿐 매우 희귀한 유물로 우리나라에는 없는 형태이기에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지름 7.5-11.2cm에 높이 7cm인 이 유물은 나무에 흑칠을 하고 은판을 오려 붙인 상자로, 바닥을 제외한 7개면에 흑칠을 하고 은판 포도 당초문을 붙여 장식했다.
■일본의 수월관음도=고려시대에서 문화의 정수라고 일컫는 청자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고려불화다. 수월관음도 역시 일본에서 소장하고 있는 세계적인 회화작품으로 섬세한 기법과 우아한 색채 그리고 금니와 은니의 적당한 사용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호화롭고 정교하며 귀족적인 분위기가 돋보이는 고려문화의 경향을 매우 잘 반영하고 있다.
■프랑스의 외규장각=188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에 보관된 서적을 비롯한 360여 점의 귀중품을 약탈해 본국으로 우송했다. 하지만 조선정부는 외규장각 도서 중 일부가 프랑스로 건너간 사실조차 몰랐다가 1993년 미태랑 대통령이 고속철도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외규장각의 약탈한 책들 중 한 권을 반환하면서 외규장각의 존재도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 책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원 조성사업을 기록한 ‘휘경원 원소도감의궤’로 중요한 의식이 있으면 그것이 본보기가 되어 국가 의식을 치를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의궤 자체 값어치도 크지만 프랑스에 가있는 의궤는 의미가 각별하다. 의궤는 보통 관청에서 보관하는 분상용과 왕실보관용으로 어람의궤가 있다. 현재 국내에는 분상용만 남아있는데 비해 프랑스에 가있는 것은 어람용 의궤인 것이다.
■프랑스의 직지심체요절=직지심체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란 수선오도(선정을 수행하여 불도를 깨달음)의 명귀에서 따온 것으로 독일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보다 70여년 앞선 1377년 7월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찍어낸 직지의 간행에 조언한 문인은 석찬과 달담이고, 시주한 사람은 비구니 묘덕이다. 1877년 주한 프랑스 공사로 서울에 부임한 바 있던 꼴랭드 드 쁠랑시에 의해 프랑스로 건너갔으며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중이다. 문헌에만 전해지고 있는 고려 금속활자본 중 현존하는 유일한 책인 「직지」는 우리 민족이 금속활자를 창안 발전시킨 슬기로운 민족임을 실증해 준 일류문화의 유산인 점에서 그 중요성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이 밖에 고려시대의 걸작인 ‘청자상감 유죽연로 원앙문 정병’과 ‘백자 박산 향로’. ‘경천사지석탑’은 일본 궁내성 대신 다나카가가 빼돌렸으며 신라시대 걸작품인 ‘금동약사여래입상’은 미국이나 일본이 약탈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관음보살 좌상’은 현재 하버드대에 있으나 일본이 약탈한 것이며 다보탑의 돌사자상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신라금동관모’는 일본인 오구라가 가지고 갔다. 또 ‘철조 천수관음보살 좌상’은 프랑스나 일본이 가지고 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 환수는 역사를 되찾는 것
전문가들은 문화재 환수를 빼앗은 자와 빼앗긴 자의 ‘소리 없는 전쟁’이라고 표현한다. 해외유출문화재의 환수는 단지 도자기 한점, 그림 한 폭을 돌려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문화재에 얽힌 한 점, 한 폭의 ‘역사’를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이 지난해 8월 발표한 해외 소재 우리 문화재의 수는 일본 등 20개국에 75,311여 점에 달하며, 국내에서 출토, 발굴된 미 신고유물도 1964년부터 지금까지 88만587건이나 된다. 이 중 환수된 문화재는 8개국 4,870여 점으로 환수율이 6.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환수된 문화재는 1958년 이후 8개국, 4,874점으로 58년 한·일 정부간 회담으로 ‘창녕 교동고분군 출토품’ 106점을 시작으로 96년 일본 야마구치여대의 ‘데라우치 문고’ 경남대 기증, 지난해 10월 ‘북관대첩비’, 2월 후지즈카 아키나오 교수의 추사 김정희 유적품 기증 등이다. 환수 형식은 정부간 협정으로 1,600여점, 기증 2,800여점, 국·공립박물관의 구입 315점이다. 일본에서는 3,916점이 반환돼 11.4%의 환수율을, 미국에서는 687점이 반환돼 3.9%의 환수율을 보였다. 그리고 조선후기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의 국보급 작품 21점이 포함된 화첩이 2006년 11월 독일에서 영구 임대 방식으로 우리나라에 돌아왔다. 독일인에게 헐값으로 유출된 지 82년만의 일이다. 특히 MBC가 지난해 7월 24일 일본에서 사들여 기증한 ‘김시민장군 공신교서’는 사상 최초로 국민들의 힘으로 환수한 첫 번째 문화재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유네스코가 약탈당한 것이 확실한 문화재의 경우 본국 반환을 규정하고 있지만 문화재 보유국이 협정에 가입하지도 않고 문화재의 유출경위가 불확실해서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대응도 어려운 상황이다.
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 박상국 시장은 “일본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대장경의 경우 왜구가 잡아간 양민을 일본 조정이 돌려보내는 대가로 준 경우라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이런 경우 ‘기증’ 이외에는 반환이 어렵다는 것. 이러한 이유로 2006년까지 해외에서 환수된 문화재 4,855점 가운데 정부간 협상으로 이뤄진 것은 3건으로 1,660점에 불과하다.
그러나 문화재청의 2007년 문화예산 1조3,452억원 가운데 유출문화재 환수를 위한 연간예산은 3,700만원으로 다양한 환수방법 중 현실적으로 가장 쉬운 것은 경매 등에 나온 유물의 구입이나 국내 기관의 유물구입비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중앙박물관 성낙준 유물부장은 “올 중앙박물관 유물구입비는 기증에 대한 사례비를 포함, 50억원에 불과하다”며 “현실적으로 국내 유물 등의 구입에도 빠듯한 실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지난해 5월 31일 서울대가 일본 도쿄대로부터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을 돌려받는 과정에서 ‘환수’와 ‘기증’형식을 동시에 취하기로 해 역사의식 부재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당시 이태수 대학원장은 “서울대가 도쿄대 소장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47책을 돌려받기로 한 것은 서울대 개교 60주년을 기념한 양교 학술교류 활성화의 차원”이라면서 “도쿄대 측은 ‘기증’ 서울대 측은 ‘환수’의 형식을 취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연구·조사사업이 우선되어야
해외 유출 문화재중 상당수는 외국의 박물관에서 적절한 조사나 평가 없이 방치되고 있다. 해외문화재 실태조사는 궁극적으로 회수의 목적뿐만 아니라 단절된 우리 문화의 맥을 잇는 중요한 작업이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연구·조사사업이 우선되어야 하며 장기적으로 조사, 요구, 환수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 문화재청은 지난 2002년부터 2012년까지 10개년 계획으로 문화재해외유출 실태와 학술·문화적 가치 조사를 벌이고 있다.
박상국 예능민속연구실장은 “세계에 있는 문화재를 우리의 문화적 역사공백을 메울 수 있는 자료로 활용하는 것이 반환에 앞서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스미스소니언 뮤지엄 등 세계적인 박물관에 있는 우리 문화재를 적극적으로 관리해 우리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유출된 문화재를 환수하기 위해선 감정보다는 실리를 우선하는 정교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실태 파악을 기초로 유출 경위의 확인, 설득 작업 등이 학계나 민간기구, 정부 등의 유기적인 협력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경남대 박재규 총장은 ‘데라우치문고 반입경위와 의의’를 발표하면서 “협상이 상당히 진척된 상황에서 국내 언론들이 ‘약탈’ ‘강탈’이란 용어를 쓰자 협상이 무위로 될 뻔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소장가를 설득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국내의 대일 감정 역시 반입 성사를 어렵게 했다”며 “감정을 자제하고 꾸준한 설득과 친분 유지, 학계와 공공기관의 긴밀한 협조가 필수적”이라고 전했다.
문화재연구소 박형빈 학예사도 “국민적 관심은 필요하지만 지나치거나 감정적 대응은 실무를 어렵게 한다”며 “소장자가 아예 숨기는 경우도 많다”고 토로한다.
이에 앞서 전문가들은 장기적 계획아래 해외소장 우리 문화재에 대한 전면적 실태 파악과 환수를 위한 학계·문화관련 민간기구 중심의 협력체계 구축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백충현 서울대 명예교수는 “문화재 반환에서만큼은 명분보다 실리가 중요하다”고 전한다.
환수와는 별도로 해외소장 문화재의 현지 활용도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성부장은 “당연히 환수하면 좋지만 해외의 우리 문화유산이 현지에서 적극적으로 전시·활용되도록 하는 것도 우리문화 홍보의 한 방안”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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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라컬렉션이란
오구라컬렉션은 일제강점기에 남선합동전기회사의 사장을 역임한 오구라 타케노스케(小倉武之助/1896~1964)가 1922년부터 1952년 기간 중 국내에서 수집해간 유물 1,100여점을 가리키는 말로, 대부분이 한국유물이고 중국, 일본 유물이 소량 포함되어 있다. 이 컬렉션은 그동안 오구라 타케노스케가 창설한 "재단법인 오구라컬렉션 보존회"에 의해 관리되어 오다 그 아들 야스유키(安之)에 의해 1980년대 초반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다. 1,000여점에 달하는 한국 유물은 고고(考古), 회화, 조각, 공예, 전적, 복식류 등 다양한 분야, 전 시기의 유물을 망라하고 있다. 이중에는 8점이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31점이 중요미술품으로 인정되는 등 모두 39점의 유물이 일본의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개인의 수집품으로는 수량이 방대하고 종류가 다양하며, 은평탈육각합(銀平脫六角盒) 등 현재까지 한반도에서도 보기 드문 문화재도 포함되어 있어 오구라 컬렉션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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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소장하고 있는 해외 문화재, 이제 본국으로 되돌려주어야…’
오타니컬렉션반환추진위원회(이하 반환추진위)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오타니 약탈문화재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장물이자, 일본 식민통치가 청산하지 못한 과거”라며 ‘오타니 컬렉션’ 1,500여점의 본국 반환을 요구했다.
‘오타니컬렉션’이란 일본 교토의 승려인 오타니 고즈이가 탐험대를 구성, 1902년부터 1914년까지 실크로드를 세 차례 답사하면서 중앙아시아 각지에서 수집한 유물을 말한다. 주로 석굴의 벽화나 고분에서 발견한 토기, 연장 등으로 현재 독일 베를린박물관, 인도 뉴델리박물관, 일본 동경박물관 등 세계에 흩어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투루판(중국 신장위구르 자치구, 톈산산맥 동쪽) 지역에서 발굴된 보물 상당수를 3층 아시아관 중앙아시아실에 전시, 이것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인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물려받은 것으로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경복궁 수정전에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전시했다. 일본 탐험대가 약탈한 옛 중국의 문화재 1,500여점을 약탈국이 아닌 한국이 오늘날까지 소장하고 있는 셈이다.
반환추진위는 “해외로 약탈된 우리 문화재의 환수운동을 펼치면서, 우리가 약탈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라면서 지난 3월 13일 오타니 컬렉션 반환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국회 청원을 시작으로 약탈문화재의 반환운동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 계획이다. 혜문 스님(반환추진위 사무총장)은 “해외로 유출된 우리 문화재를 찾아오고 있는 가운데 이제는 '우리 것을 찾아오자'는 논의의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며 “우리가 약탈문화재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다면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를 찾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반환추진위는 국내에서 약탈문화재 본국 반환에 대한 국민적 공감을 얻기 위해 국회 청원과 전국민적 반환운동을 펼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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