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이수빈 작가

[시사매거진=신혜영 기자] 한지는 제작과정에 인내심이 따르는 만큼 문자를 기록하는 매체 역할이며, 한지 자체 속성에 따른 변형과 방법론으로 다루는 예술도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옻칠도 견딘다는 닥종이 한지는 염료로 물들거나, 덧씌워져 사물의 흔적을 한시적으로 지운다. 사대부의 여흥 한 자락을 진경화로 펼쳐보이던 한지는, 현대에 와서 안료용 금을 겹겹이 흠뻑 머금어 기존에 없던 존재의 부각과 혼재된 기억이 덧씌워진 가치에 대해서도 말하게 된다. 지난 해 ‘흔적의 기억 : 시간’ 전에서 전통 수묵화라는 한국화에 대한 선입견을 뒤로하고, 기억의 흔적을 거꾸로 덧입혀 그 흔적에서 남은 기억의 단면을 금빛 위용으로 선보인 화가 이수빈 작가의<흔적의 기억> 작품 테마를 소개한다.

이수빈 작가는 고착된 황금의 이미지를 보는 원인과 답습의 결과를 독창적으로 해석하는 화가이다.

한지에 황금의 본래 수단과 가치를 결정짓는 방법론을 보여줄 시간의 흔적을 아로새기다

금은 숭배의 대상이자 존재와 가치를 판단하는 척도이다. 고집스러운 과거의 기억을 뒤집어 ‘기억의 고집’이라는 초현실로 나타낸 달리는 황금에 욕망과 황무지의 상반된 이미지를 삽입하는 법을 후대 예술가들에게 알려준 바 있다. 서양의 거친 마띠에르를 입힌 정갈한 한국화이자, 수묵담채의 고정된 이미지를 깨뜨리는 금, 먹, 호분의 점층 구조로 아련하게 배어나오는 금빛의 새로운 전기를 작성한 이 작가는 3년 전, 경험으로 생긴 흔적 그리고 기억들의 공존과 혼재의 모습을 무심히 표현하고자 했다. 즉 사람들의 상황이 지닌 가치들을 물성적으로 풀어내고자 했다. 그래서 이를 ‘흔적의 기억’으로 도치(reverse)시켰다고 한다. ‘꿈꾸는 방랑자’를 주제로 한 모친의 작품세계에서 영향을 받아, 이 작가는 새로움을 추구하며 한국화에 대한 고민을 금 소재에 점층적으로 얹게 된다.

또한 그림에서 금은 수단과 가치를 결정하는 방법론을, 실은 시간을, 종이와 천은 기록을 각각 상징하는 재료가 되었다. 또 과거 ‘왜’라는 질문에는 경험을 끄집어 내 그 흔적으로부터 무엇이 어떻게 벌어지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 작가는 예술가로서 그 가치에 대한 생각과 질문을 흔적으로 남기고, 기억의 단편을 구조적인 풍경으로 압착시켜 만들게 된다. 이 작가의 작업 과정은 한국화도 서양화도 아니면서 둘 다일 수도 있는 영역으로, 캔버스의 나무틀 위에 장지로 판을 만드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에 안료용 금을 입힌 뒤, 다시 닥종이로 치고 올리는 고행을 반복한다. 금빛은 이 과정을 거쳐서 배경과 밑그림으로부터 배어나오게 되고, ‘흔적의 기억’ 연작들은 겉에 채색하는 것이 아닌, 겹겹이 이뤄진 종이 속에서 금맥을 캐내듯이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금의 섬광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금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한국의 대표작가 계보를 잇는 화가의 반열에 오르고 싶다

이 작가는 나이에 비해 작품의 사료(思料)가 성숙된 부류로 평가받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금에 대해서 사치보다 가치를 결정하는 일종의 방법론으로 접근하기에, 한지, 장지(壯紙), 순지(純紙), 닥지를 입혀 빛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사이로 왜곡된 이미지들이 보이도록 종이를 겹치는 기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캔버스 위에 먹을 칠하고 한지를 바르는 경우도 있으며, 캔버스에 종이를 붙여 장막 밖에서는 알 수 없는 상황을 암시하기도 한다. 따라서 기억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면서 담는 피사체인 그릇은 본래 불투명한 사물이었다가, 소통을 하고자 투명성과 ‘원’이라는 형태의 상징성을 더해 빛을 받고 투과하는 부분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 작가는 비구상보다 추상적인 구상 같은 어중간한 형태로 동서양의 것을 추구했지만, 앞으로 표현법에서 한국적인 성향을 유지하겠다는 확신이 있다. 그리고 주변 일상과 관계성, 환경과 상황에서 영향을 받아 ‘흔적의 기억’을 구상하는 데만 1년이 걸렸는데, 이 작가는 과거 ‘질문’을 테마로 한 작품에서 현재로 오는 동안 그림의 소통과 영향력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 작가는 관객들이 자신의 그림을 보면서 생각을 하고, 더 가치 있는 선택을 하자는 메시지를 느끼길 바란다고 전한다. ‘흔적의 기억’에는 본래 ‘노부부의 웃음소리’등 각 테마에 따른 소제목들이 있으나, 관객들의 상상하는 사고회로를 열어주고자 쓰지 않았다.

또 기억의 프레임을 덧씌운 작가의 의도에 따라, 그림들은 치료행위를 경계로 삶과 죽음이 각각 의미를 지닌 장소인 병원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5월 20일부터 6월 2일까지 스위스 ‘SON`s Gallery’에서 전시를 마치고, 부산 벡스코 아트페어에 참가할 예정인 이 작가는 대중적이고 다양성의 존중을 상징하는 장소들에 전시할 기회가 많기를 바라며, 소품보다는 30호 이상의 큰 작품을 계속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장차 한국의 화가 계보를 잇겠다는 포부를 키우는 이 작가는 이제,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어떻게 구현하며 시간이 무슨 대화를 걸어와 어떤 흔적을 남길 지를 생각하고 종이 위에 눌러 담는 작업을 계속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입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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