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유의 클래식한 정취…힙한 분위기와 독특한 도시재생의 매력을 뿜다

(시사매거진249호=신혜영 기자) 체코는 처음부터 ‘유럽의 감성’으로 각인됐다. 무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찾아간 프라하에서 순식간에 되돌아 온 그때의 감회는 처음 만난 다른 도시에서도 계속해서 이식되고 있었다. 카메라 뷰파인더를 통해 하루하루 달라진 감성의 이름들을 담으려했던 모라비아, 그렇게 내 사랑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진 땅. [자료제공_모두투어]

모라비아 Moravia

체코는 수도 프라하 등이 속한 서부의 보헤미아Bohemia, 제2의 도시 브르노 등이 속한 동남부 지역의 모라비아, 그리고 동북부 지역의 실레지아Silesia까지 3개의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라비아는 체코어로 ‘Morava모라바’라고 부르며, 모라비아강이 이 지역을 지나가고 있어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한다. 과거 영화롭던 시절을 보여주는 바로크 양식의 많은 유산들과 체코를 대표하는 와이너리들이 모여 특유의 클래식한 정취를 간직하고 있지만, 체코에서 가장 힙한 분위기와 독특한 도시재생의 매력도 뿜어내고 있어 최근 여행자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2010년 만들어진 프리덤 광장Namesti svobody의 천문 시계는 그 모양부터 이색적이다. 마치 커다란 총알처럼 생긴 약 6미터 높이의 이 시계는 30년 전쟁 동안 스웨덴 군대에 대항한 도시의 위대함을 형상화한 기념물이다.

서정적 강철도시 ‘오스트라바 Ostrava’

프라하를 떠난 기차는 약 3시간 후 오스트라바에 닿았다. 체코를 대표하는 공업도시는 프라하의 기억이나 모라비아에 대한 기대와는 감성적으로 먼발치에 있는 듯 보였다. 흐릿한 시야와 인적 드문 시내의 생기 없는 기운 때문이었을까. 제법 흥미로운 외관을 지닌 시청사의 전망대에 올라가 도시의 풍경을 바라본 뒤에도 왠지 휑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스트라바는 석탄을 채취하는 광산으로도 유명했다.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폐광을 박물관으로 만들어 관광코스로 개발한 란덴 파크Landen Park에는 지난 1990년대까지 약 150년 이상을 이어왔던 탄광의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관광용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어두운 갱도 속을 오가는 광차와 각종 장비들, 목숨을 담보한 채 더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던 광부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아슬아슬한 모습들, 그리고 이곳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바치고 이제는 가이드로 일하고 있는 백발의 노인까지. 그의 눈에는 그 시절의 첨단 시스템을 도입하고 지역 경제에 크게 이바지했던 책임자로서의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리고 지금 란덴 파크는 폐광의 아픔이 아닌, 변함없는 활기찬 모습으로 새로운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오늘의 오스트라바를 또렷하게 이해할 수 있는 곳은 뜻밖의 장소였다. 출장 중 참석했던 국제 행사가 열린 돌니 비트코비체Dolni Vitkovice. 한 때 유럽을 대표하던 거대한 탄광과 제철소 단지는 모두 녹슬어 자칫 폐허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곳에 모인 전 세계 참가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만족스러워 보였다. 여느 유명 행사장 못지않은 공연과 파티가 열렸고, 과거 가스 저장탱크로 쓰였던 공Gong이라는 이름의 컨벤션센터에서는 대규모 컨퍼런스를 비롯해 각종 강연과 미팅이 진행됐다. 야외에 마련된 참가자들의 휴식 장소에 마련된 선베드, 한편에서 빠른 템포의 음악을 틀어 놓은 시민들의 스포츠 이벤트, 유모차를 끌고 아이들과 함께 산책을 나온 가족들, 거대한 용광로 위에 설치한 전망대에 놓인 빨강 자동차까지. 이 모든 아이러니한 현실을 둘러싼 웅장한 고철덩어리와 낡은 벽돌은 이곳에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오히려 역동적인 세련미를 연출해내고 있었다.

덜컹대도 좋은 편안한 품격 ‘올로모츠 Olomouc’

올로모츠는 수세기 동안 모라비아의 중심이었다. 이곳에 대주교청이 설립되며 모든 힘과 권력이 올로모츠에 모였고, 카톨릭 도시로, 대학도시로 모라비아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찬란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때문에 올로모츠의 골목골목 대부분이 하나의 역사이고, 또 길 위에서 눈을 통해 만나는 과거의 영화는 무척이나 진중하고 위엄이 넘친다. 올로모츠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호로니 광장에는 흥미로운 유산이 남아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된 성삼위일체석주Holy Trinity Column가 독특한 모습으로 시선을 이끈다. 이 석주를 만들 때, 올로모츠의 사람들은 그 어느 것도 감히 견줄 수 없는 크기와 아름다움, 그리고 부를 상징하는 기념물로 이것을 만들었다. 이 석주에 대한 시민들의 애틋한 사랑은 한 전설에서 알 수 있다. 과거 도시 전체가 군대에게 포위되었을 당시 시민들이 나서 이 석주에만큼은 총을 쏘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는 얘기.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이 아름다운 석주의 세밀한 조각 하나하나까지도 감상할 수 있다.

역사에 그리 흥미가 없다면 시청사 입구의 벽화와 천문시계 등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과거 공산주의 시절 노동자와 과학자를 최고로 쳐줬음을 보여주는 벽화, 매시 시간을 알려주는 재미있는 서양식 천문시계와 일꾼들의 모습, 한 때 체코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었던 365개의 모든 이름들까지, 그야말로 ‘알쓸신잡’ 같은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주변에는 조금 더 ‘FUN한’ 이벤트가 기다린다. ‘비어바이크’는 맥주를 홀짝거리며 올로모츠 시내를 느릿느릿 돌아보는 커다란 자전거로 함께 탄 일행 모두가 열심히 페달을 밟아야만 한다. 바이크가 데려다 준 곳은 점심식사를 위한 어느 호텔의 레스토랑. 전통이 느껴지는 도시 분위기와는 조금 다른, 모던하고 우아한 이곳의 음식들은 하나같이 요리라고 해야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오늘의 올로모츠는 대학도시로 이름이 높다. 숙박시설과 카페, 레스토랑 등을 둘러보며 그런 면면을 느낄 수 있었다. 캐주얼하고 톡톡 튀고, 또는 지극히 노마드 적인. 이렇게 올로모츠를 만들어가는 요즘 사람들의 개성들이 수세기 영화를 누렸던 도시의 전통과 함께 어색하지 않게 녹아들어 있어 오히려 안락함을 준다. 그런 면이 오늘을 여행하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참 감사하지 않을까.

옛 돌길로 된 골목을 따라 산을 오르다 보니 와인을 맛볼 수 있는 곳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풍요 속 디톡스 ‘레드니체 성 Castle Lednice’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유럽의 정원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레드니체 성으로 향하는 길은 특별히 기대가 컸다. 며칠 동안 도시를 여행하다가 19세기 네오고딕 양식의 성과 정원을 찾아가는 일정은 마치 부록처럼 얻어진 뜻밖의 즐거움이었다. 귀족들의 여름 회의장이자 별장이라는 소개가 나의 별장이라는 환청으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레드니체 성은 의외로 소탈하고 아늑했다. 성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귀족의 별장이라는 표현이 적당한 모습.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투어프로그램을 통해 리히텐슈타인 가문이 휴가를 즐기던 공간을 잠시 들여다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조금은 긴장됐던 마음을 편안히 내려놓을 수 있었던 곳은 기타 연주를 감상했던 작은 공간. 커튼 틈 사이로 흘러들어온 햇살에 물들어버린 마루 위 양탄자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연주자의 눈감은 표정을 바라보며 나와 이곳의 시간은 함께 잠시 먼 과거로 돌아갔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마음은 어느새 햇살을 타고 창밖으로 날아갔고, 정원을 거니는 귀족들을 떠올렸다. 언젠가 다시 한 번 찾아보고 싶었던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정원의 끝은 아득히 멀어 보였다. 가장 먼 곳 한가운데에 뜻밖의 미나렛첨탑이 부끄러운 듯 모습을 드러냈고, 발걸음은 그곳으로 향했다. 거추장스러운 장식 없이, 그대로의 자연만이 존재하는 길이지만 싱그러운 초록들의 조화로 정원은 풍요로웠다. 호수, 새, 꽃, 나무, 잔디, 나무다리, 아이, 가족들까지. 눈과 귀 그리고 코와 입을 통해 흘러들어온 레드니체 정원에 살고 있는 모든 것들의 기운이 몸속으로 전해져왔다. 조금 더 산뜻하게, 조금 더 사색하며, 자연이 만들어놓은 초록빛의 터널을 걸을 수 있었던 시간. 나의 머리와 가슴은 몰라보게 가벼워져있었다.

 

숨은그림

올로모츠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호로니 광장에는 흥미로운 유산이 남아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된 성삼위일체석주Holy Trinity Column가 독특한 모습으로 시선을 이끈다.

찾기의 유쾌함 ‘미쿨로프 Mikulov’

레드니체를 떠나 미쿨로프로 가는 차 안에서 멀리 언덕 위에 자그마한 건물들이 보였다. 마법에 걸린 듯 계속해서 눈을 뗄 수 없는 새하얀 모습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어느새 언덕 아래 마을에 이르렀다. ‘거룩한 산’을 뜻하는 하얀 예배당 ‘스바티 코페첵Svatý Kopeček’을 품은 미쿨로프. 가이드는 스바티 코페첵이 모라비아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성지순례지로 꼽히는데, 이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의 마지막 여정을 기념하는 동상 15개가 설치되어 있어 ‘십자가의 길’로 불린다고 소개했다.

‘이렇게 아담한 마을에 와이너리는 어디 있고, 와인 셀러는 어디 있을까’, 광활한 농장 같은 와이너리를 상상했던 탓에 와인을 맛볼 수 있는 곳을 찾으며 어쩔 수 없이 걱정 반, 의심 반이었다. 하지만 옛 돌길로 된 골목을 따라 산을 오르다 보니 와인을 맛볼 수 있는 곳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돌산 아래에 자리 잡은 한 와이너리로 들어가 ‘체코 와인의 진리’라고 까지 불리는 화이트와인과 음식을 주문했다. 양배추 등을 넣어 만든 빨간 국물의 스프는 김치찌개와 거의 흡사한 맛을 보여주었는데, 뜻밖에도 화이트와인과 궁합이 절묘했다. 미쿨로프의 화이트와인만 가져간다면 한국에서도 멋진 페어링이 가능하지 않을까.

식사를 마친 뒤, 백발의 주인장은 한편에 굳게 닫혀 있던 동굴 문을 열었다. 거대한 암벽들이 그대로 식당 벽면까지 들어와 있는 모습을 신기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진짜 동굴이 그 속에 숨어 있었고, 와인 셀러가 바로 그곳이었던 것. 주인장은 와인을 하나씩 꺼내어 맛을 보여주면서 미쿨로프 와인에 관한 유쾌한 설명을 들려주었다. “미쿨로프에서는 와인을 친구와 함께 페이스를 맞춰가며 함께 마셔야 합니다. 자기 잔에 직접 따라 먹는 사람을 여기서는 알콜중독자라고 하죠. 건배는 처음에 한 번만 하고 그 다음부터는 건배를 하지 않고 자유롭게 먹습니다. 모라비아 지역의 여자들은 화이트와인만 먹어야 합니다. 모라비아 여자들은 따뜻한 가슴을 갖고 있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에요”라며 껄껄 웃었다.

‘거룩한 산’을 뜻하는 하얀 예배당 ‘스바티 코페첵Svatý Kopeček’을 품은 미쿨로프.

힙플레이스의 상상력 ‘브르노 Brno’

브르노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무려 13세기부터 열리기 시작했다는 양배추시장Cabbage Market이었다. 숙소 앞 브르노 시내 중심 제일 큰 광장에 장이 서고 있어 일부러 찾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다. 시장이 도시의 가장 중심에 있는 광장에서 열린다는 사실이 의외였지만, 양배추시장이 오래도록 브르노 시민들이 소식을 전하고 인사를 나누는 만남의 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더욱 의미가 깊어진 브르노의 첫 여행지는 그리 크지 않은, 비교적 아담한 시장이다. 화사한 파라솔 아래 상인들이 펼쳐놓은 물건들은 더욱 화사하다.

브르노 시내에는 지나가는 길목에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남아있다. 구 시청사Old town hall에는 ‘브르노 드래곤Brno Dragon’과 ‘브르노 휠Bruno Wheel’, 그리고 약속한 돈을 받지 못해 화가 난 조각가가 조각품의 일부를 구부려 놓은 모습이 있고, 늘 그곳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있다. 브르노의 상징이기도 한 브르노 드래곤은 거의 완벽하게 악어 모양을 하고 있지만, 실제 이런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시민들이 전설 속의 용이라고 부르면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 웃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길을 따라 내려오면 또 다른 볼거리들이 기다리고 있다. 지난 2010년 만들어진 프리덤 광장Namesti svobody의 천문 시계는 그 모양부터 이색적이다. 마치 커다란 총알처럼 생긴 약 6미터 높이의 이 시계는 30년 전쟁 동안 스웨덴 군대에 대항한 도시의 위대함을 형상화한 기념물이다. 또한 이 시계는 특이하게도 오전 11시에만 딱 한 번 시간을 알려주는데, 유리구슬을 네 개의 구멍 중 하나로 방출하고 그 구슬은 줍는 사람이 임자다. 때문에 늘 11시가 가까워지면 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대기하는 모습이 연출된다. 하지만 문제는 11시 이외에는 이 시계를 통해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길 건너에 일반적인 시계를 설치해놓았다. 그래서인지 오후의 천문 시계 앞은 무척이나 한산했다.

천문 시계 옆에는 노천카페 ‘Na Brno dobrý’가 있다. 마치 빛 좋은 해변이라도 되는 듯, 상의까지 벗고 비치의자에 누워 태양을 즐기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이색 카페. 체코어로 도브리dobrý가 ‘좋다’라는 의미를 갖는데, 비록 바다가 없는 체코이지만 이 카페가 있어 브르노에서도 해변을 즐길 수 있어 좋다는 의미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브르노 사람들은 한결 같다.

브르노에는 전설적인 빌라 투켄하트, 신비로운 언더그라운드, 선택된 소수자를 위한 원자폭탄 대비소,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납골당, 악명 높은 감옥 등 이미 잘 알려진 독특한 볼거리들이 많지만, 그보다는 이 도시에 활기를 가득 불어 넣고 있는 젊은 감각과 문화적 감성을 더 찾아보고 싶었다. 브르노는 체코 최고의 학생 도시이자 특이하고 흥미로운 어트랙션을 경험할 수 있는 도시 그리고 유럽에서도 삶의 질이 높은 도시로 이미 꽤 높은 점수를 받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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