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는 죽은 조상과의 대화, 족보는 죽음 극복의 역사
곧 다가올 구정명절에 모두들 고향을 찾아가 차례를 지내기 위해 전국은 귀성 인파로 혼잡할 것이다. 이러한 '귀성행렬'은 세계에선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한국만의 진풍경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한국사람들은 그토록 고향 가는 것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것일까. 거기에는 아마 많은 이유들이 내포되어 있을 것이지만 무엇보다 ‘나의 뿌리’에 대한 폭넓은 고찰이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제사의 의미
'귀성(歸省)’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돌아가서 부모를 뵙는다’는 뜻인데 여기서 부모의 개념은 두 가지로 하나는 살아있는 육신을 가진 부모를 말하고 다른 하나는 죽은 조상을 일컫는다. 죽은 조상을 뵙는 의식이 바로 제사인데 우리는 죽은 조상을 돌아가신 제삿날이나 명절 차례 때만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고속도로를 가득 메운 귀성행렬의 속 깊은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 보면 조상에 대한 제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제사가 그렇게도 중요했던 이유는 ‘죽음의 극복’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죽지 않고 영생하고 싶어하였다. 단지 문명권에 따라 그 영생의 방법이 다를 뿐. 예를 들어 이집트 문명의 영생방법은 ‘부활’이었다. 죽은 사람의 시체를 아무렇게나 방치하지 않고 정성스럽게 미라로 보존해 놓은 이유도 사자(死者)가 언젠가는 다시 이 세상에 부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막에서 발생한 기독교 문명권에서는 ‘내세’이다. 죽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인도 문명이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은 죽은 후에 다른 인생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였다. 인도사람들의 낙천성에는 이러한 윤회의 사생관이 작용하고 있다.

한편 한국인들의 사생관 중 동이(東夷)족은 ‘자식을 통한 해결’이었는데 대를 이음으로써 죽음을 극복한다고 보는 것으로 쉽게 말하면 죽은 조상이 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다고 믿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인의 사생관은 조상과 후손간의 말접한 연결고리가 특징인데 조상과 후손간의 연결을 통해서 죽음을 극복한다고 보았을 때 그 연결고리를 담당하는 중요한 의례가 바로 ‘제사’인 것이다.
한국인의 족보도 제사와 밀접하게 관련되는데 조상과 후손의 만남을 위한 의례가 제사라면 족보는 그 만남을 확인시켜 주는 기록이다. 족보의 분류기준은 바로 성씨(姓氏)이다. 한국 사람은 성씨를 유난히 중요시하는데 그에 반해 일본 사람들은 우리와 성에 대한 개념을 달리 한다. 우리는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전제하에 ‘성씨를 간다’라는 표현을 내기할 때나 맹세할 때 쓰곤 하지만 일본 사람들은 ‘성을 가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한 뱃속에서 나온 형제간에도 성을 달리할 수 있다. 그 예로 60년대 친형제간에 교대로 일본 총리를 지낸 기시와 사토는 서로 다른 성을 사용하였다. 일본에서는 아들이 유명해지면 아버지 성을 쓰지 않고 자기가 별도로 성씨를 창립할 수 있다. 기시와 사토 형제가 그러한 경우였다. 일본어로 훌륭하다는 뜻이 ‘리빠(立派)’였는데 이것은 파벌을 세운다는 의미이다. 새롭게 성씨를 하나 세우는 것을 훌륭한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일본은 성씨가 총 20만개가 넘는다고 한다. 한국의 성씨가 300개 이내인 것과 비교해볼 때 엄청나게 많은 숫자다.
또 하나 한국인의 제사와 얽힌 대목 중 빠질 수 없는 것이 ‘명당’인데 한국의 족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묘자리의 좌향(坐向)이 기록되어 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자좌(子坐) 오향(午向), 갑좌(甲坐) 경향(庚向) 하는 식으로 말이다. 묘자리의 좌향은 대단히 중요한 정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기록해 둔 것인데 이는 곧 풍수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상의 뼈를 어떤 곳에 묻었는가하는 문제는 세가지 차원과 관련된다. 첫째가 효로서 명당에 조상의 뼈를 묻는 것을 효라 여겼다. 둘째는 발복인데 명당에 묻으면 그 효험으로 인해 살아있는 후손이 복을 받는다고 믿는 것이다. 셋째는 죽음의 극복으로 죽은 후에 명당에 들어간다는 믿음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게 만들어 주는 하나의 기제였다.
명절에 조상을 찾기 위한 귀성행렬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가득 메우는 이유는 이렇듯 죽음, 족보, 성씨, 명당과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사생관 때문인 것이었다.

고구려·백제·발해에 원류를 둔 성씨가 거의 없는 이유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성씨는 총 275개, 본관은 3349본이다. 참고로 본관은 고려초에 등장했고 고려 중기에 이르러서야 보편화되었다. 본관은 연고가 있는 군현(郡縣)의 명칭을 따라 정해졌는데 평민은 감히 군현의 명칭을 쓰지 못하고 그 아래 단위인 방(坊)의 명칭을 따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몰락하여 천민이 된 천민 아닌 천민은 성도 본관도 가질 수 없었다.
우리나라 성씨의 수는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데 1486년의 ‘동국여지승람’에는 277성이 게재돼 있고, 영조 때 도곡 이의현이 편찬한 ‘도곡 총설’에는 298성이 나와 있으면,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250성이, 1960년 국세조사에서는 250성이,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는 275개의 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95%는 120여개 성씨 600여 문중에 속해 있다. 다시 말해 나머지 150여개 성씨에 해당하는 인구는 총인구의 5%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점은 상당수 씨족이 중국 아니면 일본·베트남·몽골 등의 외국과 신라 혹은 가야(가락국)에 원류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고구려나 백제 또는 발해에 원류를 두고 있는 씨족은 찾아보기 힘든 것일까.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많은 백제인들은 그 땅에 살았으며,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많은 고구려인들은 그 땅에 살며 발해를 건국하는 세력이 되었다. 또 발해가 멸망한 후에는 수십만 발해인들이 고려로 귀속돼 들어왔다. 그렇다면 그들의 후예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현재 백제계라 주장하는 씨족은 부여 서씨(夫餘徐氏)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고 발해계로 주장하는 씨족은 영순 태씨(永順太氏)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고려에 의해 멸망한 신라 왕손들은 왕건의 호족 융합정책에 따라 지배층의 지위를 계속 이어갔다. 왕건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金億廉)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고, 경순왕에게 자신의 장녀 낙랑공주를 시집보낸 뒤 경주를 식읍으로 줬다. 현재 경주 김씨 족보는 경순왕의 셋째 아들 김명종(金鳴鍾 : 경주군(慶州君)에 책봉)을 경주 김씨의 대표적 지파인 영분공파(永芬公派)의 시조로 모시고 있다.
왕건의 개성(송악) 왕씨는 조선 개국 후 극심한 탄압을 받아 옥(玉)·금(琴)·마(馬)·전(田)·김(金)씨 등으로 변성(變性)해 혈통을 유지해야 했다. 이들은 조선 정조 때 와서야 문헌 등을 다시 조사해 왕씨로 도로 성을 바꾸고 개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반면 조선의 종성인 전주 이씨들은 합방(合邦)의 형식을 강조하고 싶었던 일제에 그다지 큰 탄압은 받지 않아 현재도 대성(大姓)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사실은 나라가 망한 뒤 수많은 사람들이 성(姓)을 버린 채 지배당하며 살았고, 일부 출세해 세력을 형성한 사람들은 출신을 숨기거나 변조했으며 후대의 자손들은 권력의 변천에 따라 유력한 다른 씨족에 흡수돼 들어갔거나 근근히 혈족을 보존해 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10%안되던 ‘양반’, 조선 말 70%로 급증, 완벽한 양반 집안은 없어
현재 각 문중에서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우리 인구의 상당수는 중국에서 귀화해 온 사람들의 자손이다. 물론 그 중 일부는 실제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지만 또 다른 일부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중국에 원류를 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조선시대는 사대외교(事大外交)가 일반적인 정치 행태의 하나였다. 따라서 자기 신분이나 평가를 높여보려는 의도로 중국 성씨를 갖다 붙이는 경우가 흔했다. 조선 초 한반도의 인구는 1000만명을 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 계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어느 특정 인물이 중복돼 조상으로 등장하는 것을 기록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당시엔 신분제도가 엄격히 존재하고 있었으나 고려의 명문집안이 조선에 와서 평민으로 전락한 경우도 있고 고려의 명문이 조선에 와서 평민으로 전락한 경우도 있으며, 신라나 발해의 왕족이 조선의 평민으로 살아간 경우 역시 있었다. 따라서 크게 보면 5대 이상 이 땅의 사람들과 혼사를 맺으며 살아온 사람들은 모두 같은 혈통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양반계급은 조선 초기만 해도 전체 인구의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것이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70%로 급상승했는데 이는 1909년 일본의 압력으로 민적부(民籍簿:戶籍簿)를 호구단자로 대체하면서, 성이 없던 노비들에게 성과 본관(本貫)을 지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현재와 같은 성을 쓰게 된 것은 삼국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개 4∼5세기부터다. 하지만 성을 쓴 초기에는 본관이라는 것이 없었고, 필요에 의해 스스로 성씨를 정한 경우도 있었으며 임금이 정해준 사성(賜姓)도 있었다.

18세기 들어 족보편찬 일반화

우리나라에서 왕의 계대가 아닌 옛 명가(名家)들의 계보가 단순한 형태로 형성되기 시작한 연대는 13세기로 추정되고 보인다. 계보가 보다 체계화되어 보첩(譜牒)의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현재 실물은 전하지 않으나 1423년에 만들어진 문화 유씨의 ‘영락보’ 서문이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르면 고려 후기 늦어도 15세기 초이다. 그러나 100여 씨족을 제외한 대다수의 씨족에서 족보 편찬이 일반화된 것은 18세기이다.
18세기에 초간보를 발행한 명문가의 예를 들자면, 임란 때의 명재상 서애 유성룡을 배출한 풍산 류씨는 1758년에야 초간보(무인보)를, 충무공 이순신과 율곡 이이를 배출한 명문 덕수 이씨는 1712년에 초간보(임진보)를, 충무공의 선봉장이었던 방덕용 방응원을 배출한 온양 방씨(충무공은 온양 방씨의 사위였다)는 1781년에 초간보(신축보)를 낸다.
19세기에 이르면 족보에 위계(僞系)가 끼어드는 현상이 이전의 시대보다 더욱더 심화되는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족보를 편찬하거나 발행하지 못한 씨족도 상당수 있다. 심지어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초간보를 발행한 성씨도 있고 아직도 초간보를 내지 못한 성씨도 있다.
조선 초 학자 성현(成俔)은 ‘용재총화’에서 ‘옛날에 번창하다가 지금 쇠잔한 가문과 옛날에 한미하다가 지금 번창한’ 75가문을 적고 있다. 이처럼 지배 가문이 많기 때문에 조선 명가를 재는 척도로 문과급제자 수가 자주 인용된다. 에드워드 와그너와 손주호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문과급제자 1만 4600여명 중 300명 이상을 배출한 가문은 5개, 200명 이상을 배출한 가문은 12개이다. 300명 이상을 배출한 가문은 전주 이(李)씨가 844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이 358명의 안동 권(權)씨, 338명의 파평 윤씨, 322명의 남양 홍씨, 309명의 안동 김씨 순이다. 그 다음은 청주 한씨, 밀양 박씨, 광산 김씨, 연안 이씨, 여흥 민(閔)씨, 경주 김씨, 한산 이씨 순이다. 상위 50개 가문이 전체 합격자의 56%를 차지하는데, 1명만 배출한 가문도 319개나 되었다.
이 중 7개 가문이 10명 이상의 정승을 배출했는데 전주 이씨가 22명으로 역시 1위, 동래 정씨가 16명으로 2위, (신)안동 김씨가 15명으로 3위이고 그 뒤를 청송 심씨 13명, 청주 한씨 12명, 파평 윤씨·여흥 민씨 각 11명 등이 잇고 있다. 조선 후기 당쟁이 격화되자 당파에 따른 명가가 등장하는데 조선 멸망 시까지 집권당이었던 노론은 안동 김씨, 연안 이씨, 광산 김씨 등이 핵심가였다.

한국의 희귀성씨들

두 글자 이상을 쓰는 복성(複姓) 중에 남궁(南宮)·독고(獨孤)·사공(司空)·선우(鮮于)·제갈(諸葛)·황보(皇甫)씨 등 비교적 많이 알려진 성씨 외에 강전(岡田)·장곡(長谷)·서문(西門)씨 등도 있다. 또 발음이 희귀한 성씨로 궉씨가 있는데 조선시대 학자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순창에 궉씨가 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으며 중국의 성이라고도 한다’는 기록이 있고, 실학자 이덕무의 앙엽기( 葉記)에는 ‘선산에 궉씨촌이 있는데 선비가 많다’는 기록이 있다. 조사에 따르면 선산, 순창, 청주에 세 본관과 243명이 있다.
인구가 100명 이하인 극희귀성도 적지 않다. 사(謝)씨는 진주와 한산의 두 본관이 있는데, 1960년 19명에서 1985년에는 4가구에 30명으로 늘었다. 삼가 삼(三嘉 森)씨는 1930년 국세조사 때는 나타나지 않은 성씨인데 1985년에는 85명이 확인되었다. 연풍, 전주, 한양의 세 본관에 66명이 있는 애(艾)씨는 1930년 국세조사 때도 있었던 성씨이다. 조사때 80명이 확인된 파평 옹(雍)씨는 원래 순창 옹(邕)씨였는데 1908년 민적 기재때 잘못 기재되었다고 한다.
탄(彈)씨는 조사에 따르면 진주, 해주의 두 본관에 94명이 있는데, 증보문헌비고 등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1930년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구한말 무관학교 교관중에 탄원기(彈元基)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전부터 실재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그 외에 51명의 연안 단(單)씨와 36명의 한산 단(端)씨 등이 있다. 조사 때 정확히 100명이었던 교동 뇌씨(喬桐雷氏)는 강화도 교동이 연산군을 비롯해 여럿 선비들의 귀양지였다는 점에서 귀양 갔던 선비의 후예로 추측된다. 최근에 새로 생긴 희귀 귀화성씨에는 영도 하씨(影島河氏)가 있는데 미국 태생의 국제변호사 겸 사업가인 로버트 할리가 그 주인공인다.
희귀 성씨에는 역사 사건들과 관련있는 성씨들이 있는데 천녕 견씨(川寧堅氏)가 그런 예다. 왕건이 후백제 견훤의 아들 신검을 토벌할 때 고려 대상(大相)이었던 견권(堅權)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아자개를 시조로 모시는 견씨와 견훤을 시조로 모시는 견씨 등 6개 본관에 1985명이 있다.
또 희귀성 중에는 옛 왕족의 성씨도 있다. 개성 내씨(開城乃氏)는 원래 개성 왕씨였는데, 조선 개국 후 탄압을 피해 도망가던 중 임진강 나루터에서 검문을 하던 군졸이 성씨가 뭐냐고 묻자 당황해서 ‘네?’라고 반문한 것이 내씨로 기록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총 283명으로 조사되고 있다. 밀양 대씨(密陽大氏)는 발해의 국성(國姓)에서 유래했다. 시조 대중상(大仲象)은 사료에 걸길중상(乞乞仲象)으로 나오는데 그 아들이 대조영(大祚榮)이다. 발해가 망한 후 그 후손이 경남 밀양에 정착했는데 밀양과 대산(김해)의 두 본관에 499명이 있다.

천방지축마골피’는 천계(賤系)가 아니다.

그런데 희귀 성씨에는 잘못된 통설도 있다. 흔히 ‘천방지축마골피’를 천계(賤系)의 대표인 것처럼 말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먼저 ‘축씨’와 ‘골씨’는 1985년 조사 때의 275개 성씨 중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천씨는 ‘하늘 천(天)’자와 ‘일천 천(千)’자를 쓰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천(天)씨는 조사에 의하면 밀양 등 5개 본관에 1351명이 있는데, 조선 정조 때 천명익이 진사시에 합격한 것으로 봐서 천계는 아니다. 영양 천씨(潁陽千氏)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군으로 온 귀화성씨로서 중시조 천만리가 자헌대부와 화산군에 책봉 받았으니 이 또한 천계가 아니다.
방씨도 대표격인 온양방씨(溫陽方氏)의 경우 중간 시조로 알려진 방운이 고려 성종때 온수(온양)군(君)에 봉해지자 온양을 본관으로 삼은 것이다. 남양 방씨(南陽房氏)는 고려 때 벽상공신 삼중대광보국을 역임한 방계홍을 1세 조상으로 하고 있으며, 개성 방씨(開城龐氏)도 고려 때 원나라 노국대장 공주를 따라온 원나라 벼슬아치 방두현을 시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천계는 아니다. 지씨의 대표격인 충주 지씨(忠州池氏)는 지용수(池龍壽)가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물리친 일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조선 시대 때는 문과 급제가 10명을 배출했다는 점에서 역시 천계가 아니다.

성씨에 얽힌 숨겨진 사연
족보가 가장 발달한 나라답게 성씨에 얽힌 재미있는 사연들도 많다. 그 중 몇가지를 소개하자면 첫째로 안동 권씨가 원래는 김씨였다는 것. 안동 권씨의 시조 권행(權幸)은 원래 신라 왕실의 후손인 경주 김씨였다. 후백제군과 왕건의 고려군이 안동 지역에서 전투할 때 김행이 김선평(金宣平:신 안동 김씨 시조)과 장정필(張貞弼:안동 장씨 시조)과 함께 견훤의 800대군을 함몰시키는 큰 공을 세우자 후삼국의 주도권을 쥐게 된 왕건이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시키고 김행에게 ‘정세를 잘 판단해 권도를 잘 취했다’라고 칭찬하면서 권씨 성을 내린 것이 안동 권씨의 시작이다. 두 번째로 파평윤씨는 잉어를 안 먹는다는 것. 거란과 싸우던 윤관이 함흥 선덕진 광포에서 쫓겨 강가에 이르자 잉어들이 다리를 만들어 주어 무사히 건널 수 있게 해 주고 거란군이 강가에 이르렀을 때 잉어들은 흩어졌다고 하는데 윤관이 영평(파평) 백에 봉해짐으로써 파평을 본관으로 삼은 윤씨들은 잉어의 자손이자 윤관에게 도움을 준 데 대한 보답의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인주) 이씨는 통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해 김씨의 시조는 가락국의 김수로왕인데, 그 왕비는 멀리 아유타국(阿踰 國)에서 온 공주 허황옥(許黃玉)이었다. 그런데 김해 김씨는 김해 허씨와 인천 이씨와 통혼하지 않는 이유는 장자 거등왕(居登王)은 수로왕의 뒤를 이어 김해 김씨가 되었지만 김해 허씨 등은 어머니 허황후의 뒤를 이었기 때문이다.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형제간이기 때문에 통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씨가 포함된 데는 신라 경덕왕 14년(755)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고 알려지고 있는 허기(許寄)와 관련 있는데, 그는 안록산의 난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고 당나라 현종을 따라 촉나라로 피난했다.
난이 평정된 후 현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종성인 이씨 성을 하사했는데 이후 허씨는 이씨와 복성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인천 이씨는 양천 허씨에서 갈라진 태인 허씨에서 다시 갈라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양천 허씨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은 원래 김해 허씨로, 왕건이 견훤과 싸울 때 군량을 공급한 공으로 공암(양천)을 식읍으로 받았는데 여기에서 허사문(許士文)을 시조로 하는 태인 허씨가 갈라져 나왔고, 태인 허씨에서 다시 이허겸(李許謙)을 시조로 하는 인천 이씨가 갈라져 나왔다. 이처럼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 인천 이씨 등은 모두 같은 시조에서 갈라진 한 핏줄이며 그래서 이들은 서로 다른 성씨에도 불구하고 가락중앙종친회에서 함께 소속되어 있다.

이회창, 노무현, 정몽준의 가계

가계(家系)와 족보를 중시하는 우리나라 풍토에서 역대 대통령 선거 때마다 후보들이 어떤 씨족에 속하는지는 항상 주목의 대상이 되어왔다. 역대 대통령은 모두 만만치 않은 씨족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은 조선 왕가인 전주 이씨,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인 밀양 박씨,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은 신라 왕가인 경주 김씨를 본류로 하는 김녕 김씨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경우는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후예인 김해 김씨다. 직접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 가운데 왕족의 후예가 아닌 사람은 교하 노씨인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이 유일하다.
이번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노무현 당선자의 가계는 수재(秀才)들이 가득한 이회창 후보나 재벌가인 정몽준 후보와 달리 그야말로 ‘서민 집안’이다. 노 당선자는 지난 8월 30일 아들 건호씨의 연세대졸업식에 참석해서 자신을 비롯해 “부모와 아내 형 등 직계사촌을 따져봐도 대학 나온 사람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1946년 9월 1일 (음력 8월 6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 마을에서 아버지 노판석(盧判石·76년 작고)씨와 어머니 이순례(李順禮·98년 작고)씨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노 당선자는 본관이 광주(光州)로 광주 노씨 매죽와공파 30세(世)다. 노태우 대통령은 교하 노씨로 족보상 노 당선자와 먼 친척뻘이다.
본관이 전라도 광주인 노 당선자의 조상이 경남지역으로 옮겨온 것은 10대조인 해은(海隱)공 시절로 알려져 있다. 해은공은 벼슬을 하다 임금의 노여움을 사 경남 지역에 와 은신하였다고 한다. 노 후보의 9대조는 경남 고성에 살았고 8대조부터 노 당선자의 고향인 경남 김해에 정착했다. 노 당선자의 8대조의 부인(전주 최씨)은 어사 박문수가 임금에게 열녀로 추천한 인물로 지금도 마을에 열녀비가 서 있다고 한다. 현재 노씨 종친회는 9개 본관 씨족이 합친 ‘노씨중앙종친회’로 운영되고 있는데 노 당선자는 지난 98년 종로보궐선거를 앞두고 종친회 상임부회장으로 영입됐으며 지난 5월 노성대 신임 종친 회장이 취임하기 전 회장 권한 대행을 1년간 맡기도 했다. 현재 노 전 대통령은 종친회 고문직에 있다.
정계를 깨끗이 은퇴한 이회창 전 후보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명문가(名門家) 출신이다. ‘친일파 시비’를 겪고 있는 부친 이홍규(李弘圭·96·전 감사장) 옹을 비롯해 세계적인 화학자인 중부(仲父) 이태규(李泰圭) 박사 등 집안에 유명인이 즐비하다. 이 전 후보의 조부(이용균·李容均)는 500석꾼으로 동네에서 이름있는 한학자였다. 이 전 후보의 본관은 이승만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전주다. 조선 500년을 이끌어온 전주 이씨는 현재 100여파를 두고 있는데 이 후보는 이 중 주부공파(主簿公派)에 속한다.
한편 정몽준 의원은 1951년 10월 17일(음력) 부산에서 태어났다. 정몽준은 8남 1녀의 6남이지만 형제 두 명이 죽고 현재는 6형제만 남았다. 현대그룹 창업자 고(故) 정주영(鄭周永) 본인은 비록 강원도 통천에서 소학교 3학년을 마친 게 학력의 전부였지만 본인은 물론 형제들도 머리가 좋았다.
정몽준은 하동 정씨다. 하동 정씨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 계통이 다른 밀직공 국룡파(密直公 國龍派), 정승공 응파(政丞公 膺派), 지예부사공 손위파(知禮部事公 遜位派) 3파가 있는데 정 의원은 지예부사공파 자손이다. 하동 정씨는 조선 시대에 들어와 상신(相臣) 1명, 대제학(大提學) 1명과 58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정초, 정인지 등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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