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지하경제비율 25%, 만연한 탈세가 빚더미로 내몰아

[시사매거진] 지난 7월13일 마라톤협상 끝에 유로존 정상회의에서 그리스가 추가 개혁안을 이행하는 조건으로 유럽재정안정화기구(ESM)와 구제 금융 협상을 개시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협상의 최대 쟁점인 독일이 제안한 ‘한시적 그렉시트(그리스 유로존 탈퇴)’는 결국 채택되지 않음으로써 ‘그렉시트’(Grexit) 파국은 모면하게 됐다.

   
 

유로존 정상들은 그리스에 3년 간 최대 860억 유로(약 108조 원) 규모의 구제금융이 필요하며 협상 타결까지 필요한 유동성 지원으로 120억 유로를 제공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에 긴급 유동성 지원으로 자본 통제로 폐쇄된 그리스 은행들이 영업을 정상화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그리스는 채무불이행(디폴트) 위기를 넘기게 됐다.


은행 파산을 막기 위해 채권단이 요구한 강도 높은 개혁안을 결국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치프라스 총리는 협상에서 연금과 부가가치세, 노동시장 개혁, 민영화 등 4대 부문의 타협에서 결국 유로존 정상들의 요구에 굴복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우리가 많은 부분에서 동의하지 않는 개혁안을 수용하거나 혼란스러운 디폴트에 빠지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강조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마라톤 협상 끝에 유로존 정상회의에서 도출된 개혁안은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이탈하고 그리스 경제가 벼랑 끝으로 몰리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며 의원들의 협조를 당부했다.


이후 지난 7월16일 그리스 의회가 11시간이 넘는 격론 끝에 유로존 정상회의에서 도출한 추가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이날 의회가 다룬 안건은 부가가치세(VAT) 인상, 연금 축소, 통계청의 독립성 보장, 재정 지출 자동 삭감 등 총 4개 법안이다. 4개 법안에 대해 전체 의원 300명 가운데 229명이 찬성해 가결됐으며 개혁안에 반대하는 집권당 시리자(급진좌파연합) 내 강경파 의원들과 공산당 의원 등 64명이 반대했다. 6명이 기권했으며 1명은 투표에 불참했다. 긴축안에 대해 시리자 의원 149명 중 야니스 바루파키스 전 재무장관과 강경파 의원 등 32명이 반대표를 행사했다.

 

   
▲ 그리스 연급수급자들이 그리스 은행 영업 중단 및 출금 한도액 제한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그리스 일간지 카치머리니 신문이 지난 7월1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그리스 정부는 지난 7월21일 유럽재정안정화기구(ESM)를 통해 3년 간 최대 860억 유로(약 107조 원) 규모의 구제금융을 받는 협상을 개시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 2개 법안을 의회에 상정했다. 이날 그리스 본회의에 상정될 2개 개혁 법안은 채권자가 손실을 부담하는 채무구제 방식인 ‘베일인(bail-in)’에 대한 유럽연합(EU)의 ‘은행 회생·정리지침(BRRD)’ 준수 법안 및 민사 소송 절차 간소화 법안이다. BRRD는 2013년 키프로스 구제금융 때 10만 유로 이상 예금주와 채권 투자자가 손실을 일부 부담하는 채무탕감 조건으로 구제금융 지원이 이뤄진 이후 도입됐다.


피에르 모스코비치 EU 경제·통화 담당 집행위원은 7월21일 프랑스 BFM TV와의 인터뷰에서 그렉시트 위기가 사라진 것이냐는 질문에 “그런 방향으로 진일보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며 “그러나 그리스가 개혁을 지속하고 유럽인들이 결속력을 잃지 않도록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국제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는 유로존의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 지원 합의로 그리스의 신용등급을 CCC-에서 CCC+로 두 단계 상향조정했으며 신용등급 전망도 ‘부정적’에서 ‘안정적’으로 조정한다고 밝혔다. S&P는 올해 그리스의 국내총생산(GDP)이 3% 위축될 것으로 전망했으며 그렉시트 가능성은 50% 미만으로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브뤼셀에서 합의된 개혁안은 그리스 국민투표에 부쳐진 긴축안보다 더 가혹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리스가 재정주권을 박탈당한 ‘경제 신탁통치’를 받게 됐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개혁안에 서명한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합의안 내용이 비이성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치명적인 디폴트에 빠지지 않고 그렉시트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의원들에게 “3차 구제금융안은 모든 당사자에게 어려운 과제이지만 그리스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 및 최후의 방법”이라고 밝혔다.


최대 채권국인 독일은 그리스 지원에 가장 엄격한 입장을 견지해왔다. 이날 메르켈 총리는 의원들에게 구제금융의 궁극적 성공에 대한 우려를 인정하면서도 구제금융을 반대할 경우 그리스는 대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3차 구제금융 협상의 주체들인 그리스, 독일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은 구제금융 지원을 놓고 여러 차례 이견을 표출했다. 3차 구제금융이 효율적으로 집행되기 위해서는 부채탕감 및 만기연장 등의 채무 재조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3차 구제금융 협상 개시를 위한 입법 절차를 시작하면서 시리자의 내분도 격화됐다. 재정이 거의 바닥난 상황에서 그리스로서는 개혁 의지를 대외에 보여줘야 구제금융을 지원받을 수 있다. 이에 따라 시리자 강경파 의원들은 물론 시리자 중앙위원회 위원 과반수도 개혁법안이 그리스 국민에 너무 많은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며 수용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좌파연대를 이끄는 파나기오티스 라파자니스 에너지 장관과 니코스 필리스 시리자 원내 대변인 등도 정부안을 수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 그리스의 디폴트(채무불이행) 사태와 중국 주식시장 폭락으로 한국 경제시장이 위축 될 것으로 예상된 7월12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의 환전소 앞을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유로존 위축현상이 세계경제로 전이돼 교역량이 줄어드는 등 대외 여건이 악화하면 한국경제의 부담이 커질 수 있다.

그리스 의회에서 개혁안을 놓고 격론이 벌어진 가운데 의회 밖에서는 개혁안에 반대하는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했다. 반체제 시위대는 지난 7월15일 3차 구제금융 협상 관련 법안 표결에 항의하며 약 1만 2,000명의 시위자가 반긴축 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충돌했다. 반대 세력은 그리스가 2010년 첫 구제금융을 받은 이래 5년 간 긴축 프로그램을 이행했지만, 실업률은 증가하고 빈곤층은 늘고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이 줄었다며 그리스는 더는 재정지출 축소를 수용할 수 없다고 맞섰다.


유클리드 차칼로토스 재무장관도 “유로존 정상회의에서 도출된 합의안을 따르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밝혔다. 이어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날이 될 것”이라며 “내가 내린 결정은 앞으로 남은 나의 인생에 무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이런 가운데 유럽중앙은행(ECB)은 지난 7월20일(현지시간) 그리스 정부가 이날 만기일을 맞은 부채 42억 유로(약 5조 2,600억 원)에 대한 상환을 마쳤다고 밝혔다고 영국 BBC가 보도했다. ECB에 따르면 그리스 정부는 이날 채무 35억 유로와 그에 대한 이자 7억 유로 등을 포함한 총 42억 유로를 상환했다.
그리스가 ECB에 대한 상환에 실패할 경우 ECB가 그리스 은행권에 제공 중인 긴급유동성지원(ELA)은 중단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 경우 그리스 금융시스템은 붕괴돼 그리스 정부는 자체 통화를 발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가 이날 ECB 부채를 상환함으로 인해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을 피하게 됐다.
그리스 정부는 이날 앞서 국제통화기금(IMF)에 연체했던 부채 20억 유로(약 2조 5,000억 원)도 모두 상환했다.


이에 IMF는 “그리스는 부채를 모두 상환했으며 더 이상 체납국이 아니다”며 그리스의 기술적 디폴트(채무불이행) 상태 해소를 공식화했다.

그리스가 빚쟁이로 몰려 글로벌 애물단지로 전락한데에는 그동안 분수에 맞지 않는 과잉 복지 지출이 그 원인으로 지목돼 왔다. 그리스는 ‘은퇴 직전 임금 대비 연금 수령액’이 95%에 달한다는 점이다. 독일이 42%, 프랑스가 50% 수준이다. 만약 30년 동안 직장생활을 한 사람이 100만 원을 받고 일을 시작해서 임금이 점점 올라 은퇴 직전 300만 원을 받았다면 연금수령액은 300만 원에 가까운 수준에서 받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스의 GDP 대비 복지지출 수준은 21%로 30%대에 가까운 독일과 북유럽 국가들보다 낮다. 그러나 그리스의 조세부담률은 20% 초반으로 OECD 평균인 25.8%에 못 미친다. 지하경제 비율은 GDP의 25%에 달해 미국(7%), 프랑스(11%)와 비교해 크게 높고 탈세가 만연하다.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는 경우도 빈번하다. 세정당국의 감시망이 촘촘하지 않고 국민들의 납세 의식이 미성숙한 점이 그리스를 디폴트까지 몰고 온 것이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중산층이 모여 사는 아테네 중심부 근처 코우카키의 주택가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디미트리스 보카스는 그가 판매하는 욕실 비품에 대한 꼼꼼한 기록을 보관하고 있다. 최고 23%의 판매세(한국의 부가가치세)가 올바르게 납부되고 있는 지를 확인하기 위한 세무조사원의 불시 방문을 대비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보카스는 설치와 수리 작업도 한다. 고객이 그에게 지급하는 돈의 절반은 노동에 대한 대가로, 영수증 없는 현금거래다. 그는 손님의 판매세 부담을 줄이기 위해 자신이 받는 물품 판매 대금만 기록하고 자신이 설치 또는 수리해준 것에 대한 공임은 기재하지 않고 있다. 보카스는 “나는 내 가게에서 판매되는 모든 제품에 대한 영수증을 갖고 있다”며 “세무조사원은 내 손이 한 일을 모른다”고 말했다.

   
 

이 같은 형태의 탈세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는 그리스의 국민적 습관에 가깝다.  아리스티데스 하치스 아테네대 법대 교수는 “많은 그리스인들이 탈세를 구제금융과 세금 인상에 항의하는 작은 방편으로 생각한다”며 “이들은 이것을 부패로 인식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리스에서 지하경제가 차지하는 비율은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25%다.  전문가들은 그리스 정부가 과거 세대와 계층에서 퍼져나가는 탈세를 단속하는데 실패했다는 점을 들며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에서는 매년 100억 유로(12조 5,000억 원)의 세금이 탈세로 인해 국고로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는 그리스가 국제사회에서 빌린 3,200억 유로(약 402조 6,000억 원)를 갚지 못해 지급불능 상태에 빠진 주요 원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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