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정부 3년차, 어깨 무겁다. 경제 살리기를 최우선 할 것”

이렇게 혹독한 청문회를 치르고 국무총리가 되어서 제대로 자리매김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모든 국민들 앞에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은 사생활이 낱낱이 오픈되면서 청문회 내내 연신 사과를 하는 이완구 국무총리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과연 그는 소신껏 자신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까. 곳곳에서 ‘너나 잘 하세요’라는 말이 들릴 텐데, 슬기롭게 풀어가며 박근혜 정부 3년차의 버팀목이 되어줄 것인지, 국민들의 눈과 귀가 이완구 국무총리의 행보를 향하고 있다.

지난 2월16일, 우여곡절 끝에 이완구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국회는 이날 오후 본회의를 열고 재적의원 295명 중 281명이 참석한 가운데 실시한 무기명 투표에서 찬성 148표, 반대 128표, 무효 5표로 이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을 가결시켰다. 동의안은 이날 가결요건인 141석에서 7표를 더 얻어 통과됐다.
이날 투표에는 새누리당 의원 155명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124명, 정의화 국회의장 등 무소속 2명 등 모두 281명의 의원이 참석했다. 정의당은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처리에 불참키로 당론을 정하고 소속 의원 전원이 불참했다. 새정치연합은 이날 의원총회 끝에 본회의 표결에 참석키로 결정했으나 투표는 반대입장을 당론으로 정하지 않고 의원들의 소신에 맡기는 자율투표로 진행했다. 투표결과를 봤을 때 새누리당에서 최소 7표가 이탈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완구’라는 한 사람의 인생으로 본다면 득(得)보다 실(失)이 많지 않았나 싶다. 
국무총리는 법적으로 내각을 통할하는 역할을 맡게 돼 있고 국무위원 임명제청권과 해임건의권 등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지만, 사실상 대통령 체제 하에서의 총리는 실권을 갖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이완구 총리는 청문회 과정에서 상당한 내홍을 겪어 정치적 입지가 더 줄어들었다는 것이 주변의 반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이완구’는 달랐다. 내상이 치유되지도 않았을 텐데 그는 발빠른 국정  드라이브에 나섰다. 취임 직후 바로 지역 민심을 돌아보기 위해 서울 서대문구의 독거노인 가정과 중구의 아동복지시설을 찾아 취약 계층과 대화를 나누고 복지 서비스를 점검하고, 전두환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등 국가 원로들을 찾아 소통하기 시작했다.
지난 2월25일 열린 국회 대정부질문에서도 이 총리는 안정적인 답변과 태도를 보이며 국회 데뷔전을 무난히 치렀다는 평가다. 민감한 질문에는 ‘차후에 알아보겠다’며 답변을 유보하면서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고, 따가운 지적에도 ‘검토해보겠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정치적 연륜이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 총리는 “설 이후 박근혜정부 3년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만큼 국정동력을 되찾아 추락했던 지지율을 되살리기 위한 모멘텀을 마련해야 한다”라며 “경제 살리기를 중점적으로 실현해 국정 성과를 끌어내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朴정부 3년차를 끌어올릴 수 있는 추동력을 가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현안임을 시사했다.
‘불통’이라는 박근혜정부의 이미지를 반전시키고 조기 레임덕을 막을 수 있는 카드가 이완구 총리임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 총리가 이러한 큰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원활한 소통을 하며 묵묵히 선봉에 설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이완구 국무총리는 3선 국회의원과 충남도지사, 여당 원내대표 등을 지낸 여권 내 충청권 대표주자다. 충남 청양 출신인 이 총리는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을 포함해 충청권 출신 첫 원내대표를 지냈다. 또한 그는 지난해 세월호특별법 제정 등 여야 협상을 이끌면서 산적한 현안들을 무난히 처리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 총리는 양정고와 성균관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재학 중인 1974년 행정고시(15회)에 합격하면서 공직에 입문했다. 당시 경제기획원에서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에 참여했다.
그는 홍성군청과 경제기획원 등에서 근무하다 경찰로 옮겨 충청북도, 충청남도 지방경찰청장을 지냈다. 이때 그는 최연소 경찰서장(31세), 최연소 경무관으로 승진하면서 최연소 타이틀을 거머쥐기도 했다.
이후 1995년 민자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발을 담갔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자민련 텃밭이던 충남지역에서 유일하게 신한국당 후보로 당선돼 주목을 받았다. 1997년 대선 당시 김종필 전 총리의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을 옮겨 원내총무와 대변인 등을 역임했으며, 2000년 16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자민련 부대변인 시절 박태준 총재에게 ‘철두철미하다’는 평을 들었고, 김종필 명예총재에게는 ‘번개가 치면 먹구름이 낄지, 천둥이 칠지를 아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는 ‘적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자민련을 탈당해 한나라당으로 이적했으며, 철새 정치인 논란이 일자 2004년 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UCLA대 교환교수로 1년여를 보냈다.
이 총리는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충남도지사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후 2009년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세종시 수정안에 단식투쟁을 벌이면서 반대 입장을 고수하다가 도지사직까지 사퇴하기도 했다. 당시 세종시 원안을 고수했던 박근혜 대통령과 뜻을 같이하면서 이후 줄곧 친박으로 분류돼왔다.
정계 복귀를 저울질하던 그는 19대 총선 출마를 계획했지만 뜻하지 않은 질병으로 출마를 접어야 했다. 2012년 초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골수종에 걸려 10개월여 동안 투병생활을 했고 그해 10월 완치 판정을 받았다.
이후 그는 지난 2013년 4월 재보궐 선거에서 다시 19대 국회에 재입성하면서 충청권의 신맹주로 떠올랐다. 이후 당내에서 세종시지원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세종시 지원에 앞장섰다.
지난해 5월 새누리당 원내대표로 선출돼 원내지휘를 맡아왔고 ‘소통의 리더십’을 인정받아 총리직에 지명됐다.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언론 외압 의혹, 부동산 투기 의혹, 병역 의혹 등이 제기되면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지만, 결국 국무총리로 국회 데뷔에 성공했다.
▲1950년 충남 청양 ▲양정고 ▲성균관대 ▲미시간주립대 ▲행시 15회 ▲LA총영사관 영사 ▲충남북 지방경찰청 청장 ▲미국 UCLA 교환교수 ▲35대 충청남도 도지사 ▲15·16·19대 국회의원 ▲새누리당 원내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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