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당신 아버님도 명나라를 일본에 빼앗길까봐 조선을 도우려 했다는 것이요?”

“아버님의 깊은 뜻이겠지요. 그보다 또 하나 말해 볼까요? 당신이 특히 한 여인에게는 많은 공을 들였어요. 바로 김덕령의 정혼녀 장예지 낭자에게.”

일순간 김충선의 뇌리에 한 여인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누이처럼 김충선을 따르며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던 장예지. 그녀는 조선에서 얻은 제자였다. 아름답고 영민한 조선의 여인이었다.

“보고 싶지 않나요? 만나고 싶지 않나요?”

조선의 전쟁에서 만나 우정을 나누던 친구 김덕령이 반역의 누명을 쓰고 고문으로 죽은 후 김충선은 단 한 번도 장예지를 만나지 않았다.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회피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흠칫한 심정이었다. 아율미가 그 상처를 건드렸다.

“예지낭자는 총명하여 진도가 매우 빨랐지요? 난 그녀처럼 우아하면서도 지혜로운 조선 여인을 만나본 적이 없었던 거 같아요. 당신은 그녀에게 정성을 다해 무술을 사사했지요. 난 때로는 의심이 들기도 했어요. 당신이 혹여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김충선의 안면이 상기되었다.

“아율미! 그런 소리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요.”

“아, 미안해요, 상처를 건드려서. 그럼 이건 어떤가요? 비록 무모한 추측이기는 하지만 당신에게 도움이 될지도 몰라서......”

이상한 예감이 불현듯 들었다.

“무모하다면 발설하지 않는 게 좋겠소.”

“나는 생각을 마음에만 담고 사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요. 들어주세요.”

“......”

“지난 해 병신년(丙申年). 김덕령이 당신의 도움으로 탈옥 후, 고집을 피우며 다시 감옥으로 향할 때로 기억 되요. 그때 당신은 만류했지요. 돌아가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그랬던 거 같소.”

“김덕령은 당신에게 탈옥시켜준 것에 대해서 불같이 화를 내고, 또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왕과 대신들이 죄 없는 본인을 그리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어요. 신하된 도리를 다해야 한다면서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길 희망했지요.”

“그렇소. 덕령은 만고의 충신이오.”

“당신은 혹 그때 예지낭자에 대한 사심(私心)을 품고 있었기에 사지(死地)임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김덕령을 끝까지 붙잡는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나요?”

정수리 끝에서 파열음이 천둥처럼 내리 꽂혔다. 그랬던가? 내가 절망의 모퉁이에서 구원을 거부하는 김덕령의 손길을 혹시 즐겼는가. 섬광이 눈앞에서 폭죽처럼 터졌다. 현란한 상념의 색이 부채 살 마냥 혼란스럽게 사방으로 흩어져갔다. 비명은 목청에서 터지지 않았다. 그것은 가슴을 뚫고 핏덩이와 더불어 쏟아졌다.

“그대는 그렇게 느꼈소?”

“네.”

김충선은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그 어떤 경우에도 느낄 수 없었던 절망과 수치심이 엄습했다.

“몰래 숨어서 본 그대의 눈이 더 정확한지도 모르겠소.”

김충선은 회피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격렬한 통증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결코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지독한 아픔을 인고(忍苦)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무지 풀리지 않는 의문은 왜 이제 그녀를 만나러 가지는 않는 거죠?”

“그건......”

“전혀 당신이 의도한 것은 아니잖아요. 아무리 말렸어도 김덕령은 자기 발로 감옥으로 되돌아갔을 테니까요.”

김충선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내게 뭘 원하는 겁니까?”

아율미는 이 사내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지난 3년 간 질리도록 보고 또 보았던 감시와 관찰의 대상이었다. 신기한 것은 그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미묘한 감정의 파장이었다.

“아버지를 만나셔야겠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건주여진 부족의 족장이며 금나라의 재건을 꿈꾸는 여진의 칸 누르하치다.

“왜 그렇소?”

김충선의 질문에 그녀는 추호의 동요도 없이 대답했다.

“이순신의 나라를 건국하기 위해서요.”

“그럼 당신 아버님도 명나라를 일본에 빼앗길까봐 조선을 도우려 했다는 것이요?”

“아버님의 깊은 뜻이겠지요. 그보다 또 하나 말해 볼까요? 당신이 특히 한 여인에게는 많은 공을 들였어요. 바로 김덕령의 정혼녀 장예지 낭자에게.”

일순간 김충선의 뇌리에 한 여인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누이처럼 김충선을 따르며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던 장예지. 그녀는 조선에서 얻은 제자였다. 아름답고 영민한 조선의 여인이었다.

“보고 싶지 않나요? 만나고 싶지 않나요?”

조선의 전쟁에서 만나 우정을 나누던 친구 김덕령이 반역의 누명을 쓰고 고문으로 죽은 후 김충선은 단 한 번도 장예지를 만나지 않았다.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회피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흠칫한 심정이었다. 아율미가 그 상처를 건드렸다.

“예지낭자는 총명하여 진도가 매우 빨랐지요? 난 그녀처럼 우아하면서도 지혜로운 조선 여인을 만나본 적이 없었던 거 같아요. 당신은 그녀에게 정성을 다해 무술을 사사했지요. 난 때로는 의심이 들기도 했어요. 당신이 혹여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김충선의 안면이 상기되었다.

“아율미! 그런 소리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요.”

“아, 미안해요, 상처를 건드려서. 그럼 이건 어떤가요? 비록 무모한 추측이기는 하지만 당신에게 도움이 될지도 몰라서......”

이상한 예감이 불현듯 들었다.

“무모하다면 발설하지 않는 게 좋겠소.”

“나는 생각을 마음에만 담고 사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요. 들어주세요.”

“......”

“지난 해 병신년(丙申年). 김덕령이 당신의 도움으로 탈옥 후, 고집을 피우며 다시 감옥으로 향할 때로 기억 되요. 그때 당신은 만류했지요. 돌아가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그랬던 거 같소.”

“김덕령은 당신에게 탈옥시켜준 것에 대해서 불같이 화를 내고, 또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왕과 대신들이 죄 없는 본인을 그리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어요. 신하된 도리를 다해야 한다면서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길 희망했지요.”

“그렇소. 덕령은 만고의 충신이오.”

“당신은 혹 그때 예지낭자에 대한 사심(私心)을 품고 있었기에 사지(死地)임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김덕령을 끝까지 붙잡는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나요?”

정수리 끝에서 파열음이 천둥처럼 내리 꽂혔다. 그랬던가? 내가 절망의 모퉁이에서 구원을 거부하는 김덕령의 손길을 혹시 즐겼는가. 섬광이 눈앞에서 폭죽처럼 터졌다. 현란한 상념의 색이 부채 살 마냥 혼란스럽게 사방으로 흩어져갔다. 비명은 목청에서 터지지 않았다. 그것은 가슴을 뚫고 핏덩이와 더불어 쏟아졌다.

“그대는 그렇게 느꼈소?”

“네.”

김충선은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그 어떤 경우에도 느낄 수 없었던 절망과 수치심이 엄습했다.

“몰래 숨어서 본 그대의 눈이 더 정확한지도 모르겠소.”

김충선은 회피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격렬한 통증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결코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지독한 아픔을 인고(忍苦)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무지 풀리지 않는 의문은 왜 이제 그녀를 만나러 가지는 않는 거죠?”

“그건......”

“전혀 당신이 의도한 것은 아니잖아요. 아무리 말렸어도 김덕령은 자기 발로 감옥으로 되돌아갔을 테니까요.”

김충선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내게 뭘 원하는 겁니까?”

아율미는 이 사내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지난 3년 간 질리도록 보고 또 보았던 감시와 관찰의 대상이었다. 신기한 것은 그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미묘한 감정의 파장이었다.

“아버지를 만나셔야겠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건주여진 부족의 족장이며 금나라의 재건을 꿈꾸는 여진의 칸 누르하치다.

“왜 그렇소?”

김충선의 질문에 그녀는 추호의 동요도 없이 대답했다.

“이순신의 나라를 건국하기 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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