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현재까지 11건 보유

유네스코는 1972년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 보호 협약을 채택해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세계유산으로 지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5년 12월 해인사장경판전, 종묘, 석굴암·불국사가 ‘세계유산’에 등재된 이후 다양한 세계유산을 비롯해 판소리, 강강술래, 김장문화 등의 16건의 인류무형유산, 훈민정음, 직지심체요절, 난중일기 등 11건의 기록유산이 유네스코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 6월에는 남한산성이 열한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방어력 극대화 한 산성 도시 ‘남한산성’
서울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방어력을 극대화한 곳이다. 이는 16〜18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동아시아의 한국과 중국 일본 간에 산성 건축술이 상호 교류한 중요한 증거이자 조선의 자주권과 독립성을 수호하기 위해 유사시의 임시 수도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계획적으로 축조된 유일한 산성도시다.
남한산성은 한국 축성술의 기술적 발달을 잘 보전하고 있다. 험한 지형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해 산성 내에 여러 시설을 갖춤으로써 도시와 방어 시설의 두 가지 기능을 모두 수행한 남한산성은 특히 비상시를 대비한 단순한 방어 시설에서 출발해 아직도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는 살아있는 유산이라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
뿐만 아니라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방어 전략인 산성거주론이 실천된 유일한 사례다. 호국불교사상을 바탕으로 승영사찰을 중심으로 승려들이 축성과 관리를 담당했는데 이는 다른 국가나 문명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사례다. 축성 이후 300여 년 동안 불교 승려들이 성내에 10개의 승영사찰을 두어 군사적 목적으로 성곽 관리를 담당한 것은 불교의 호국정신과 함께 조선의 자주성이 발현된 상징적인 증거다.

세계유일 대장경판 보고 ‘해인사 장경판전’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해인사 장경판전은 13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적 문화유산인 고려 대장경판 8만여 장을 보존하는 보고(寶庫)다.
대장경의 부식을 방지하고 온전한 보관을 위해 15세기경에 건축된 장경판전은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한 보존과학 소산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는 유네스코의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역사적 중요성이나 함축성이 현저한 사상이나 신념, 사진이나 인물과 가장 중요한 연관이 있는 유산’이라는 기준에 따라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장경판전은 정면 15칸 규모의 두 건물이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돼 있다. 장경판전 남쪽의 건물은 수다라장,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 동쪽과 서쪽의 작은 규모 건물은 동·서사간판전으로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 세조 3년(1457) 어명으로 판전 40여 칸을 중창했고 성종 19년(1488)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30칸의 대장경 경각을 중건한 뒤 보안당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초기의 전통적인 목조건축 양식으로 건축된 장경판전은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은 물론, 건물 내 적당한 환기와 온도·습도조절 등의 기능을 자연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돼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돼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조선왕조 왕과 왕비의 신주 모신 ‘종묘’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는 세계적으로 독특한 건축양식을 지닌 제례공간이다. 16세기 이래로 원형이 보존돼 있어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종묘는 태조 3년(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해 이듬해 9월에 완공했다. 5만 6,503평의 경내에는 종묘정전을 비롯해 별묘인 영녕전과 전사청, 재실, 향대청 및 공신당, 칠사당 등의 건물이 있다. 한국의 일반 건축물과 같이 개별적으로 비대칭구조를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의례공간의 위계질서를 반영해 정전과 영녕전의 기단과 처마, 지붕의 높이, 기둥의 굵기를 그 위계에 따라 달리 했다.
주전인 정전은 건평이 1,270㎡로 동 시대의 단일 목조 건축물로는 세계에서도 규모가 가장 큰 건축물로 추정된다. 건축 양식은 궁전이나 불사의 건축이 화려하고 장식적인데 반해 유교의 검소한 기품에 따라 건립된 특수목적용 건축물이다. 세종 3년(1421)에 6칸 규모로 창건한 영년전 역시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에 10칸, 그 후 계속 증축해 16칸으로 남아 있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 정전 뜰앞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완벽에 가까운 불교 예술 ‘석굴암과 불국사’
석굴암과 불국사는 1995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됐다.
경주 토함산 정상에 못 미친 깊숙한 곳에 동해를 향해 앉아 있는 석굴암은 완벽하고 빼어난 조각과 독창적 건축으로 전세계적으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그 내부공간에도 본존불을 중심으로 총 39체의 불상을 조각했으며, 석굴암의 석굴은 장방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통로로 연결돼 있다. 360여 개의 판석으로 원형주실의 궁륭천장 등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것이다.
석가모니가 정각 즉,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가시적인 건축과 조각으로 재현한 석굴암은 조각에 있어서도 인위적인 기교나 부자연스러움 없이 생명력이 넘치며 탁월한 예술성이 돋보인다. 특히, 주실 내에 봉안돼 있는 굽타양식의 본존불 석가여래불은 고요하고 결가부좌한 모습, 가늘게 뜬 눈, 온화한 눈썹, 미간에 서려있는 슬기로움, 금방이라도 말할 듯한 입과 코, 길게 늘어진 귀 등 그 모든 것이 내면에 깊은 숭고한 마음을 간직하도록 조성됐다.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교,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비로자나불 등 다수의 국보를 품고 있는 불국사는 석굴암과 같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이 창건해 서기 774년 신라 혜공왕 때 완공했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지상에 옮겨 놓은 것으로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와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및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를 형상화했다. 석가탑은 각 부분의 비례와 전체의 균형이 알맞아 간결하고 장중한 멋이 있으며, 다보탑은 정사각형 기단위에 여러 가지 정교하게 다듬은 석재를 목재건축처럼 짜 맞췄는데 독특한 구조와 독창적인 표현법은 예술성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 ‘창덕궁’
조선왕조 제3대 태종 5년(140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창덕궁은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서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 궁이다. 특히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 1610년 광해군 때 정궁으로 쓰게 된 뒤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이다. 창덕궁 안에는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인 돈화문, 신하들의 하례식이나 외국사신의 접견장소로 쓰이던 인정전, 국가의 정사를 논하던 선정전 등의 치조공간이 있다. 또 왕과 왕후 및 왕가 일족이 거처하는 희정당, 대조전 등의 침전 공간 외에 연회, 산책, 학문을 할 수 있는 매우 넓은 공간이 조성돼 있다.
위락공간인 후원에는 자연지형을 위압하지 않도록 작은 정자각이 많이 세워졌다. 300년이 넘은 거목과 연못, 정자 등 조원시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 건축사적으로 또 조경사적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후원은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창건할 때 후원으로 조성돼, 창경궁과도 통한다. 이곳에는 각종 희귀한 수목이 우거져 있으며, 많은 건물과 연못 등이 있어 왕과 왕비들은 이곳에서 여가를 즐기고 심신을 수양하거나 학문을 닦고 연회를 베풀었다.

사도 세자 향한 정조의 효심 ‘수원 화성’
수원 화성은 조선 후기에 세워진 계획도시다. 이는 정조의 효심에서 건설된 것으로 그 의미가 더욱 깊다.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당파 싸움에 희생돼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사도 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지금의 화성)으로 천봉하고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 아래로 옮겨 수원 화성을 건설했다. 정조가 화성을 건설한 것은 아버지의 무덤을 옮기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동시에 백성들을 보다 편리하고 풍요롭게 살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에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 안에는 팔달문과 장안문, 창룡문, 화서문 등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비교 불가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약 3만여 기에 가까운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이 2000년 12월에 세계유산으로 등록됐다. 이는 밀집분포도, 형식의 다양성으로 고인돌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이며 유럽, 중국, 일본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
고창 고인돌 유적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도산리, 아산면 상갑리 일대의 유적으로 죽림리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로 약 1,764m 범위에 447기가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 군집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화순 고인돌 유적은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 일대의 계곡을 따라 약 10㎞에 걸쳐 500여기의 고인돌이 군집을 이루고 있으며 보존상태가 좋다. 또한 고인돌의 축조과정을 보여주는 채석장이 발견돼 당시의 석재를 다루는 기술, 축조와 운반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다. 강화 고인돌 유적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의 지역에 고려산 기슭을 따라 15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이곳에는 길이 6.4m, 높이 2.5m의 우리나라 최대의 탁자식 고인돌이 있으며 우리나라 고인돌의 평균고도보다 높은 해발 100m~200m까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세 지역의 고인돌 유적은 2,000〜3,000년 전의 무덤과 장례의식 기념물로서 당시의 기술과 사회현상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준다.

신라 역사·문화를 한눈에 ‘경주역사유적지구’
2000년 12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세계유산이다. 이미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일본의 교토, 나라의 역사유적과 비교하여 유적의 밀집도, 다양성이 훨씬 뛰어난 유적으로 평가된다.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종합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뉘어 있다.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돼 있다.
경주 남산은 야외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신라 건국설화에 나타나는 나정, 신라왕조의 종말을 맞게 했던 포석정과 미륵곡 석불좌상, 배리 석불입상, 칠불암 마애석불 등 신라의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월성지구에는 신라왕궁이 자리하고 있던 월성, 신라 김 씨 왕조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 신라통일기에 조영한 임해전지, 동양 최고의 천문시설인 첨성대 등이 있다. 대능원지구에는 신라왕, 왕비, 귀족 등 높은 신분계층의 무덤들이 있다. 황룡사지구에는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있으며, 산성 지구에는 A.D 400년 이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명활산성이 있다. 이 신라의 축성술은 일본에까지 전해져 영향을 끼쳤다.

생태계 연구의 중요한 학술적 가치 ‘제주’
제주도는 수많은 측화산과 세계적인 규모의 용암동굴, 다양한 희귀생물 및 멸종위기종의 서식지가 분포, 지구의 화산 생성과정 연구와 생태계 연구의 중요한 학술적 가치가 있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지역은 한라산, 성산일출봉, 거문오름용암동굴계 3개다.
한라산은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약 180만 년 전부터 역사시대에 걸쳐 일어난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졌다. 한라산 정상부에는 한라산 조면암과 백록담현무암이 분포하며 한라산 조면암은 높은 점성을 갖고 돔상으로 솟아 한라산을 더 웅장하게 만들고 있다. ‘해 뜨는 오름’으로도 불리는 성산일출봉은 제주도에 분포하는 360개의 단성화산체 중의 하나다. 높이 182m로 제주도 동쪽 해안에서 거대한 고성처럼 자리 잡고 있는 이 응회구는 사발 모양의 분화구를 잘 간직하고 있다. 거문오름용암동굴계는 지금으로부터 약 10〜30만 년 전에 거문오름에서 분출된 용암으로부터 여러 개의 용암동굴이 만들어진 것으로 가장 규모가 큰 용암동굴은 만장굴로서 이 동굴의 길이와 규모는 세계적이다. 제주도 해안 저지대의 용천동굴과 당처물동굴도 세계적인 경관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
제주도 한라산, 성산일출봉, 거문오름용암동굴계는 2007년 6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됐다.

500년 조선 왕조의 무덤 ‘조선왕릉’
조선 왕조는 1392년에 고려 왕조가 끝난 이후 시작돼 500년 이상의 지속됐다. 조선왕릉은 이 시대에 살았던 총 27대 왕과 왕비 및 추촌된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조선왕릉은 우리나라의 유교적인 문화 전통이 확고하게 드러나는 문화유산이다. 특히 조선시대 때 강조됐던 ‘조상숭배’라는 유교적인 개념을 바탕으로 나라의 최고 권위자였던 왕의 무덤을 신성화하는 전통이 형성됐다. 전체 42기 가운데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하고 우리나라에 있는 40기 모두가 2009년 6월30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조선왕릉은 풍수지리사상을 바탕으로 조영됐다. 또 엄격한 질서에 따라 내부 공간을 구성하면서도 아름다운 주변 산세와 어우러져 주목할 만한 신성한 공간을 창출했고, 봉분과 조각, 건축물들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룬 탁월한 사례로 동아시아 묘제의 중요한 발전단계를 보여준다고 평가받았다. 또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600년 이상 제례의식을 거행하면서 살아있는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독특한 공간이라는 점도 세계유산 등재의 이유가 됐다.

한국의 대표 전통 마을 ‘하회·양동마을’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은 14〜15세기 조성된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마을이다. 안동하회마을은 조선 중기인 1600년대부터 풍산 류 씨들이 모여 주택과 서원 등을 건축하고 마을을 조성한 풍산 류 씨의 집성촌이며, 양동마을은 조선시대 초기에 입향한 이래 지금까지 세거해온 월성 손 씨와 여강 이 씨가 양대 문벌을 이루고 있다.
안동하회마을은 그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양반의 주거문화를 대표하는 양진당과 충효당, 북촌댁과 서원건축의 백미인 병산서원과 같은 옛 건축물들은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다. 중앙길을 중심으로 북촌과 남촌으로 크게 나뉘는 마을은 북촌에는 대양진당(보물 제306호)과 북촌댁(중요민속자료 제84호), 남촌에는 충효당(보물 제414호)과 남촌댁(중요민속자료 제90호)이 대표적이다.
양동마을은 작은 산등성이와 골짜기에는 반가(班家)들이 비교적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그 아래에는 가랍집들이 위치하고 있어 조선시대 신분제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공간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또 풍수 지리적으로 좋은 위치(穴자 형상의 위치)에 배치돼 있는 주요 건물들은 모두 보물(무첨당 등 3건)과 중요민속자료(수졸당 등 11건)로 지정돼 있다.
두 마을은 한국 씨족마을의 대표적인 사례로, 한국의 오랜 건축 양식을 비롯해 전통 생활양식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 공간이라는 점을 인정받아 2010년 8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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