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 역사 새로 쓴 김연아, 한국인 최초 프리미어리거 박지성

수년간 우리는 때때로 깊은 새벽 알람 소리에 깨 TV 앞에 앉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부비며 TV 속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때로는 환희의 함성을 지르게 하고, 때로는 울분 섞인 탄식을 뱉게 한 그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자신들의 무대에서 내려왔다. 우리를 울고 웃게 했던 피겨 여왕 김연아와 남의 무대인 줄로만 알았던 프리미어리그를 선물해준 캡틴 박지성. 그들이 자연인으로 돌아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피겨 여왕 김연아가 2012년 7월2일 마이크 앞에 섰다. 2010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사상 최고점을 기록하며 금메달을 거머쥐고 2011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피겨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준우승한 뒤 아무 대회에 나서지 않았던 그녀였다. 은퇴냐, 현역 연장이냐를 두고 온갖 말들이 오고가던 때, 세간의 관심은 온통 그녀의 ‘입’에 쏠렸다. 드디어 입을 연 김연아는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까지 현역 생활 연장하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 위원 도전하겠다”면서 “선수생활의 종착역을 밴쿠버올림픽으로 정했었다. 하지만 이제 소치올림픽으로 연장시키고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 새 출발을 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일곱 살이었던 1996년, 과천시의 실내 빙상장을 찾았다가 처음 스케이트를 탄 김연아는 류종현 코치의 권유로 본격적인 피겨 스케이팅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2003년 열 네 살의 나이로 최연소 태극마크를 단 그녀는 2004∼2005시즌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주니어 그랑프리 2차 대회에서 한국 피겨 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거머쥐었으며, 한국 선수 최초로 2005∼2006시즌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 2006년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금메달 등을 달성했다. 시니어 데뷔 시즌인 2006∼2007시즌에는 역시 한국 선수 최초로 그랑프리 시리즈와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을 일궈내는 등 줄곧 한국 피겨 역사를 새로 써왔다.
피겨 여왕의 면모는 점수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났다. 사상 최고점을 갈아치우며 세계 피겨 신기록을 세웠다.
시니어 데뷔 후 처음으로 나선 세계선수권대회 쇼트프로그램에서 김연아는 71.95점을 받아 쇼트프로그램 역대 최고점을 경신했고, 2007∼2008시즌 그랑프리 5차 대회에서는 프리스케이팅 역대 최고점인 133.70점을 얻었다. 2009년 4대륙선수권대회 쇼트프로그램에서는 72.24점을 받았다. 2009년 3월 세계피겨선수권대회에서는 쇼트프로그램에서만 76.12점을 받아 역대 최고점을 다시 한 번 경신했다. 이 대회에서는 프리스케이팅에서도 131.59점을 받아 총 207.71점을 획득, 세계 피겨 여자 싱글 사상 최초로 200점을 돌파했다.
2009년 10월에 열린 2009∼2010시즌 ISU 그랑프리 1차 대회 프리스케이팅에서는 프리스케이팅 사상 최고점인 133.95점을 받아 합계 210.03점을 얻어 210점대의 벽마저 무너뜨렸다. 그런가하면 같은 해 11월 2009∼2010시즌 그랑프리 5차 대회 쇼트프로그램에서는 76.28점을 기록, 쇼트프로그램 사상 최고점을 끌어올렸다. 최고의 순간은 2010년 밴쿠버동계올림픽이었다. 쇼트프로그램에서 자신이 갖고 있던 역대 최고점 76.28점보다 1.22점 높은 78.50점을 받은 김연아는 프리스케이팅에서도 완벽한 연기를 선보이며 150.06점을 획득, 228.56점이라는 경이로운 점수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밴쿠버올림픽 금메달로 김연아는 그랑프리 파이널·세계선수권대회·올림픽 등 피겨 3대 메이저대회 우승을 모두 석권하며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그리고 우리가 잘 모르고 있지만 주목할 만한 기록 하나 더. 김연아는 노비스(만 13살 이하) 시절부터 참가한 모든 경기에서 포디움(3위) 밖으로 밀려난 적이 없다. 이는 현재 확실하게 남아 있는 기록을 기준으로 세계 피겨 여자 싱글 부문의 역사상 최초의 기록이다.

김연아는 종종 ‘밴쿠버올림픽이 최종 목표’라고 말해 왔다. 밴쿠버올림픽 이후 피겨 여왕의 침묵이 그래서 길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연아는 긴 침묵을 깨고 다시 도전에 나섰다. 그것은 단순히 현역 연장의 의미를 넘어 후배들에게 올림픽 티켓을 선물하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에 도전하겠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피겨 여왕은 보란 듯이 컴백했다. 20개월의 공백을 깨고 참가한 독일 도르트문트에서 열린 NRW트로피는 정상급 선수들이 나오지 않는 B급 대회였지만 김연아의 복귀 무대라는 이유만으로 메이저 대회보다 더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이후 골든 스핀 오브 자그레브, 국내 종합선수권대회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김연아는 올림픽 2연패에 도전에 나섰다.
모두가 여왕의 2연패를 낙관했다. 기대에 보답이라도 하듯 김연아는 훌륭한 연기를 펼쳤지만 ‘스캔들’이라 불릴 정도의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금메달은 주최국인 러시아의 품으로 돌아갔다. 비록 2연패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현역 무대를 마쳤다.
김연아가 준비한 마지막 무대는 팬들을 위한 무대였다. 피겨 여왕의 17년간의 피겨 인생을 정리하는 아이스쇼 무대의 주제는 ‘아디오스, 그라시아스’. 선수 생활 동안 팬들로부터 받았던 아낌없는 사랑과 성원에 보답한다는 의미였다. 그녀는 ‘Let it go’,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 ‘Time to Say Goodbye’에 맞춰 마지막 연기를 펼쳤다.
은반 위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난 피겨 여왕의 다음 무대는 IOC 선수위원이다. 은퇴 후 첫 행보로 대학원 진학을 결정한 김연아는 지난 10일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체육학 대학원 구술면접 시험을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대학원 진학은 IOC 선수위원 도전을 위한 초석 다지기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제대로 된 훈련장 하나 없는 피겨 불모지에서 김연아는 누구도 탓하지 않고 스스로 세계 정상의 자리에 섰다. 그녀의 우아한 몸짓은 국적불문, 남녀노소를 뛰어넘어 모두를 감동케 하기 충분했다. 소치올림픽 직후 미국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쾀 도우스가 헌정시를 통해 ‘모든 게 이제 끝났다고, 홀가분하고 기쁘고 평안하다고, 그녀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행복했고 그녀를 믿었다. 이제 그녀는 스케이트를 벗고 땅에 발을 내딛는다. 경기장 밖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멀어져 간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김연아는 지금 막 땅에 발을 내딛었다. 그녀에게 받은 감동을 이제는 그녀 앞길에 힘찬 격려와 응원으로 보답할 차례다.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자 한국인 최초 프리미어리거인 박지성은 명실상부 한국 축구의 아이콘이다. 특히 ‘산소 탱크’, ‘두개의 심장’으로 불릴 정도의 성실한 플레이는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됐다. 그런 그가 축구화를 벗었다.
5월14일 수원 영통의 박지성축구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박지성은 “더는 지속적으로 축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무릎 상태가 좋지 않아 은퇴를 결심하게 됐다”며 은퇴 이유를 밝혔다. 쉴 새 없이 그라운드를 뛰고 국가의 부름에는 주저 않고 비행기에 올랐던 그의 성실함이 결국에는 선수생활을 단축시킨 셈이다.
박지성은 수원 세류초 4학년 때 축구와 인연을 맺었다. 금세 두각을 나타내 6학년 때 전국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해 ‘차범근축구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작은 키와 왜소한 체격이 늘 박지성의 발목을 잡았다. 주전선수로 뛰지 못해 벤치에 있는 시간이 많았고 수원공고 1학년 시절에는 기본 훈련만 받았을 정도였다. 명지대에 진학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시드니올림픽 대표팀과 명지대의 연습경기에 참가한 박지성을 본 허정무 당시 감독이 그의 플레이를 눈여겨보고 국가대표에 발탁했다. 2000년 아시안컵 1차 예선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른 박지성은 시드니올림픽에 출전했고, 기세를 몰아 일본 J리그에도 진출했다.
J리그의 교토 퍼플상가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박지성은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그 기량이 빛을 발했다. 자신을 믿고 엔트리에 포함시켜준 거스 히딩크 감독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잉글랜드,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연속으로 골을 터뜨렸고 포르투갈과의 조별리그 최종전에서도 결승골을 터뜨려 한국의 사상 첫 16강을 이끌었다.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알린 박지성은 월드컵 이후에 히딩크 감독을 따라 네덜란드 프로축구 PSV에인트호벤에 입단, 유럽에 진출했다. 특히 2005년 AC밀란(이탈리아)과의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서 골을 터뜨리며 유럽 무대에 강인한 눈도장을 찍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 알렉스 퍼커슨의 눈에 든 것도 바로 이 골이었다.

박지성은 2005년 7월 맨유에 입단했다. 한국인 최초의 프리미어리거 탄생이었다. 모두가 그의 성공을 반신반의했지만 박지성은 체력과 스피드, 넓은 활동량을 바탕으로 주전 경쟁을 이겨내며 맨유의 주축 일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2006∼2007시즌에는 맨유가 리그 우승을 차지해 아시아 선수 최초로 프리미어리그 우승도 경험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박지성은 2008년 12월 아시아 선수 최초로 국제축구연맹(FIFA) 클럽월드컵 우승을 맛봤고, 2009년 5월에는 FC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나서며 또 하나의 아시아 최초의 기록을 만들었다.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한 그는 대표팀에서도 중심이었다. 2002년에는 막내였지만 2006독일월드컵 프랑스와의 조별리그에서 극적인 동점골을 터뜨려 이름값을 했고, 각종 대회에서 팀의 중심 역할을 했다. 2008년 10월15일 열린 아랍에미리트(UAE)와의 남아공월드컵 최종예선 B조 2차전에서는 주장 완장을 차며 ‘캡틴’의 면모도 아낌없이 보여줬다. 소통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월드컵 본선 진출과 남아공월드컵에서 한국 축구가 사상 처음으로 원정 월드컵 16강에 진출하는데 기여한 박지성은 2011아시안컵에서 다시 한 번 주장 완장을 차고, 우승에 도전했다. 그러나 준결승에서 일본에 아쉽게 패하고 말았다.
소속팀과 국가대표팀을 오가던 박지성은 2011년 1월31일 축구협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대표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박지성은 11년간 A매치 통산 100경기 출전, 13골을 기록했다.
박지성은 2012년 맨유를 떠나 퀸즈파크레인저스(QPR)로 이적했다. 하지만 팀 성적은 곤두박질쳤고 팀은 2부 리그로 강등됐다. 이에 2013년 8월 에인트호벤으로 임대 이적해 8년 만에 네덜란드 무대로 복귀했다. 과거 에인트호벤에서 선수로 함께 뛰었던 필립 코쿠 감독과 함께 마지막 축구 인생을 보낸 박지성은 QPR과 계약 기간을 1년 남겨둔 지난 5월 선수로서의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에인트호벤 코리아투어에 참가한 박지성은 5월22일 수원삼성과의 코리아투어 1차전을 치르고 이어 24일 창원축구센터에서 열린 경남전에서 선발로 출전, 53분간 활약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그의 마지막 경기였다.
그라운드를 떠난 박지성은 6월2일에 자선경기 ‘아시안드림컵 2014’를 개최했고 7월27일에는 김민지 전 SBS아나운서와 백년가약을 맺는다. “일단은 국내가 아닌 유럽에 머물면서 휴식을 취할 예정”이라고 향후 계획을 밝힌 그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늘 성실한 플레이와 겸손한 태도로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고, 세계무대를 종횡무진하며 축구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던 캡틴 박지성.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라운드에서 그를 볼 수 없다. 하지만 그가 늘 조용히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왔던 것처럼 은퇴 후에도 ‘JS파운데이션’의 이사장으로, 혹은 축구행정가일지도 모를 모습으로 사회에 그 에너지를 생기 있게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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