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참된 복지를 실천하는 “에덴복지재단”

(시사매거진=박희윤 기자) 한국의 중증장애인 복지가 불모지였던 시기에 시작하여 주위의 무관심과 냉대를 딛고 일어선 사람이 바로 정덕환 설립자다. 에덴복지재단의 35년사는 정덕환 설립자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는 직업 재활이 전무한 시절부터 다양한 제도가 마련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장애인 고용 현장을 걸어온 산 증인이다. 올해로 35년을 맞이한 에덴복지재단은 ‘중증장애인 직업재활발달사’라는 책을 발간하고 에덴복지재단의 역사를 통해 장애인 직업 재활 이야기를 내놓았다.

에덴복지재단 정덕환 설립자

에덴복지재단의 태동

정덕환 설립자는 1946년 서울 보문동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힘이 세고 장난기가 많은 개구쟁이였다. 당시 큰 형이 유도선수였는데 그 모습을 흠모하여 유도선수가 되기로 결심하고, 운동에 전념해 고등학교 3학년 때 국가대표가 되었다. 연세대에 특기생으로 입학한 그는 대학교 2학년 때인 1967년 일본 유도 선수권대회에 출전해 7전 전승으로 우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2년 8월 2일 동료선수와의 연습경기 도중 사고로 인해 경추 4번과 5번이 골절되어 전신마비 1급의 지체 장애인이 되었다. 1년 만에 퇴원한 그는 아내의 헌신적인 보살핌과 경제활동으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다.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중에 용기를 내어 모교인 연세대학교에 유도부 코치를 제안했지만, 돌아온 것은 칭찬이 아닌 ‘거절과 장애인에 대한 싸늘한 눈길’이었다고 정덕환 설립자는 회상했다.

유도부 코치를 거절당한 그는 살고 있는 연립주택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1981년 ‘이화식품’이라는 작은 구멍가게를 열게 된다. 정덕환 설립자는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부모의 입장에서 학용품 하나라도 사 줄 수 있는 아빠가 되어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화식품’을 통해 가장으로 설 수 있게 되었고, 사회로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1985년 구로5동 에덴복지원 앞마당

에덴복지원

정덕환 설립자는 신앙생활에 매진하며 교회, 병원 등에서 간증 및 전도 활동을 하다가 구로구 지역에서 버림받고 일자리가 없어 타인에게 구걸하고 있는 5명의 장애인 공동체를 만나게 된다. 정부의 보조 없이 근근이 입에 풀칠만 할 정도로 어렵게 살아가는 그들의 열악한 환경을 목격한 그는 거지들 중에서도 장애인이라 더 심한 차별을 받는 모습에 화가 났다. 그때 갖게된 꿈이 바로 버림받은 중증장애인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고 자립하여 살아갈 수 있는 작업시설을 만드는 것이었다. 결국 미국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겠다는 꿈도 접고 그들과 함께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 아내가 어렵게 모은 500만 원으로 지하방 한 칸을 얻어 ‘에덴복지원’을 설립했다. 장애인들과 함께 ‘일’로서 자립을 꿈꾸기 위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1983년부터 1991년까지 구로에서 전자부품, 조립, 신발 등 임가공을 중심으로 사업을 전개했지만 설립 초기에는 일감을 구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일감을 얻기 위해 찾아간 공장에서 수 차례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특히 1985년에는 세 든 건물 건물주의 부도 때문에 30여 명의 장애인들과 노숙 생활을 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김학수 이사장은 “수입이 300만 원인데 지출이 500만 원이었다. 그렇지만 장애인 직원 모두에게 급여를 주고 있었다. 누적적자를 어떻게 메꾸냐고 물어봤더니 정덕환 이사장이 교회 간증을 하고 강연하고 그 돈을 모아 직원들 급여의 부족한 부분 충당한다”고 말했다며 그 당시를 상황을 회상했다.

1987년 개봉동 에덴하우스 정문

에덴하우스

1987년 에덴복지원에서 에덴하우스로 시설명을 바꾸면서 수해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구로구 개봉동으로 시설을 이전했다. 시설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정덕환 설립자는 다시 한 번 이웃들의 반대와 멸시를 경험하게 된다. 시설 이전에 대한 지역 주민의 원성과 반대가 심했고, 장애인으로서 멸시와 차별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웃과의 마찰을 이기려고 기도를 하였고, 혐오시설이라는 인식을 바꾸기 위해 계속 설득하고 이해시켜 나갔다.

“땅값이 내려간다. 이 땅을 판 장본인도 반대하고 개봉동 집을 지을 때도 건영아파트 주민들이 반대했었어요. 먼저 있었는데 나중에 온 사람들이 반대했었어요”라고 정덕환 설립자는 그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1987년 당시 직원이 83명일 정도로 에덴하우스는 점점 성장해갔다.

1989년에 전자부품을 조립하는 일에서 쓰레기 봉투와 쇼핑백을 만드는 플라스틱 제조업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고, 1990년에는 사회복지법인으로 설립인가를 받아 국가의 보조를 받기 시작했다. 1994년 쓰레기종량제 봉투 시범사업에 참여하면서 에덴하우스 시설을 신축한 그는 1995년부터는 쓰레기종량제봉투 전면 시행 사업에 참여하며, 더 많은 중증장애인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자 했다.

2011년 형원 개원식에서 직원들과 함께 기념사진

에덴복지재단

1998년 법인명을 에덴하우스에서 에덴복지재단으로 변경하고, 그 해 10월에는 경기도 파주로 이전을 하였다. 파주시에 직업재활시설을 이전하려고 할 때도 지역주민의 반대가 심했다. 정덕환 설립자는 “여기 불량배들이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수용하는 곳이 아니고 근로 장애인들이 와서 일하는 복지공장이다”라고 주민들을 설득했다고 말했다.

그는 중증장애인들을 고용해 같은 품질의 쓰레기 분리수거용 비닐이나 세제 관련 상품을 만들었지만, 일반인들은 중증장애인이 제작한 상품에 대해 호감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 근무하는 중증장애인들에게 급여를 제공하면서 운영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당시 시각장애인인 정화원 국회의원에게 ‘중증장애인생산품 우선구매 특별법’ 제정을 건의했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2007년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이 법의 목적은 “경쟁고용이 어려운 중증장애인들을 고용하는 직업재활시설 등의 생산품에 대한 우선구매를 지원함으로써 중증장애인의 직업재활을 돕고 국민경제 발전에 기여함”이다. 당시 중증장애인 시설을 운영하는 시설장이나 중증장애인을 고용하는 시설종사자들에게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2009년 7월 정덕환 설립자는 ‘전국직업재활시설협회’ 회장으로 선임된다. 그는 10월 30일 취임사를 통해 “1030, 일이 없으면 삶도 없다”라는 슬로건을 제언하며, 장애인들에게 일자리의 필요성과 자립을 강조하였다.

또 한 사람의 비장애인을 고용하는 것보다 세 명의 중증장애인을 고용하는 것을 택하겠다는 그의 의지로 2011년 9월 중증장애인다수고용사업장인 ‘형원’을 개원한다.

지난 달 12일 구로구청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흔들리며 피는 꽃’을 듣고 있는 정덕환 설립자

행복공장만들기 운동본부

정덕환 설립자는 장애인들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에덴하우스와 중증장애인 다수고용사업장 형원을 설립・운영해왔다. 특히 믿기지 않았던 사실은 임금 체불 없이 35년간 시설을 운영해 왔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중증장애인의 일자리와 최저임금보장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2015년 4월 23일 ‘중증장애인의 평생일터 행복공장만들기운동본부’를 출범시켰다. 그는 “여기에서 중증장애인이란 인지능력과 사회성이 부족하여 사실상 고용의무에도 배제되는 지적장애, 자폐성 장애인 등의 발달장애인을 말한다”며 ‘고용복지・착한소비・사회통합・생명존중・생산적 선교’의 5대 비전을 바탕으로 발달장애인의 고용에 대한 관심과 그들의 고용 확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에덴복지재단은 올해로 35주년을 맞아 ‘중증장애인 직업재활발달사’라는 책을 발간했다. 정덕환 설립자의 삶과 애환, 그리고 에덴복지재단의 중증장애인 직업재활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정덕환 설립자는 혼자서 일어서거나 누울 수도 없고, 수저나 젓가락을 집을 수 없어 혼자 밥도 먹을 수 없다. 당연히 용변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야 한다.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의 손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다. 또 일반인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몸 구석구석의 통증까지도 극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지난 달 12일 구로구청 5층 대강당에서 개최된 학술대회에서 정덕환 설립자는 도종환 시, 이민욱 작곡으로 제작되어 자신이 직접 부른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노래를 환영의 노래로 선택했다. 아직도 기자의 귓가에는 그 노랫말이 애절하게 들려오는 듯 하다.

지난 달 12일 구로구청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축사를 하는 정덕환 설립자

“흔들리며 피는 꽃”   | 시 도종환   작곡 이민욱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Interview> 김학수 이사장

김학수 이사장

 에덴복지재단에 대한 소개

에덴복지재단은 1983년 10월에 설립하여 올해로 35주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뜻을 같이하는 중증장애인 5명이 모여 우리도 힘을 합쳐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현재 파주에 200여 명이 근무를 하는데, 140명이 중증장애인이고 그 중 절반 정도가 발달장애인이라고 하는 지적장애인, 자폐다. 그런 장애인들에게 일을 가르치고 최저임금을 지급하고 있다. 정덕환 설립자는 장애인들도 정부에서 주는 시혜적인 지원금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일을 해서 땀을 흘려서 벌어서 살아야 하고 세금을 내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결국 장애인들의 복지 패러다임을 시혜적 복지에서 생산적 복지로, Welfare를 Workfare, Productive fare로 바꾼 장본인이다. 에덴복지재단은 중증장애인에 대한 한국의 복지와 맥을 같이하고 선도적인 역할을 해 온 기관이라 하겠다.
 

이사장 취임 후 현황

취임 당시 두 가지를 말했다. 하나는 관리적인 측면인데 이제는 안정과 내실을 기할 때라고 했다. 전체 직원이 약 200명 정도 되는데, 사람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성실하고 배우는 마음을 늘 가져야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나 기술은 기탄없이 말하라고 했다. 이사장 취임 후에 전체회의도 하고 모든 사람들이 제안하는 것을 격려하고, 제안한 것 중에 좋은 것은 선택해서 실천하고 있다.

두 번째는 장애우들이 일을 하면서 좋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첨단기술이 결합된 고부가가치의 아이템을 찾는 일이다. 현재 종량제 봉투는 날로 경쟁이 심해지고, 쓰레기도 줄어들고 있어서 점점 힘들어질 것이라 예상된다. 또 형원의 주 생산품목은 주방세제인데 이것은 대기업에서도 생산되고 있어 어려운 실정이다. 그래서 그런 아이템을 계속해서 찾고 있는 중이다.
 

정부에 바라는 점

장애인들이 생산하는 아이템에 대한 정책적인 보호가 필요하다고 본다.

또 2018년 7월 1일부터 저희 사업장은 주 52시간 근무제를 적용시키고 있다. 하지만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여파가 만만치 않다. 적자가 발행하는 것은 명약관화다.

결국 인건비 인상으로 인한 적자로 인원 감축의 문제가 발생한다. 현재까지는 생산성 위주가 아니라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세 사람이 나누어서 했다. 이제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한 사람이 해야 하고, 자동화도 고려될 것이다. 그러면 고용할 수 있는 인원이 현재의 인원보다 더 줄어들 수 있어 우려가 된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정부나 관련 기관에서 관심을 갖고 해결책을 제시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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