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꿀 수 있다면,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애니메이션 역사 창출

올 초 한편의 애니메이션이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저주에 걸린 ‘엘사’와 그런 언니를 찾아 여정을 떠나는 ‘안나’의 이야기를 다룬 ‘겨울왕국’은 국내 상영된 애니메이션 최초로 1,000만 관객 돌파라는 기록을 세웠다. 영화의 흥행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주제곡인 ‘Let It Go’를 흥얼거렸고 관련 상품들은 불티나게 팔렸다. 이를 통해 제작사인 월트 디즈니는 다시 한 번 그 저력을 확인시켜줬다.

미국의 애니메이션 영화감독이자 제작자, 사업가였던 월트 디즈니(Walt Disney)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군에서 제대한 그는 1919년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고향 시카고를 떠나 캔자스로 향했다. 그곳에서 월트는 어브 아이웍스(Ub Iwerks)라는 아티스트를 만났고 둘은 광고용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에 입사해 인형을 움직이면서 촬영하는 1분짜리 애니메이션 광고를 만들기 시작했다. ‘래프 오 그램’을 완성한 그는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캔자스시티의 가장 큰 극장인 뉴먼 극장에 자신의 첫 작품을 걸기도 했다.
이듬해 월트는 회사를 그만두고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차렸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회사를 캔자스의 회사를 접고 할리우드로 향했다. 1923년 그는 형 로이(Roy)와 함께 디즈니 브라더스 스튜디오를 열었다. 그리고 형의 지휘 아래 ‘앨리스 시리즈’를 만들었다. 월트는 스토리, 애니메이션, 실사영화의 제작을 맡았고 로이는 회사의 살림을 도맡았다. 앨리스 시리즈가 점점 인기를 끌면서 스튜디오도 점점 커졌고, 회사 사정이 어려워 잠시 헤어졌던 아이웍스도 다시 합류했다. 이후 1926년 하이페이론 애비뉴로 스튜디오를 옮겨 스튜디오 이름도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로 바꿨다.

월트 디즈니를 알린 토끼와 생쥐

 
1927년 스튜디오는 ‘오스왈드 시리즈’를 새롭게 선보였다. 앨리스 시리즈가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것이었다면 ‘운 좋은 토끼 오스왈드’는 100% 애니메이션이었다. 진보적인 애니메이션 기술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이 시리즈는 성공에도 불구하고 배급사에 캐릭터를 뺏기면서 정작 월드 디즈니 스튜디오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야심차게 내건 토끼 캐릭터를 잃은 월트는 주저앉지 않고 새로운 캐릭터 발굴에 나섰다. 그렇게 떠올린 것이 어릴 적에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생쥐’였다. 디즈니 형제와 아이웍스는 월트의 생각을 구체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동글동글한 몸체에 가늘고 긴 팔다리를 가진 귀여운 생쥐 한 마리가 탄생했고 이 생쥐는 ‘미키 마우스(Mickey Mouse)’가 됐다.
미키 마우스가 처음 등장한 것은 ‘증기선 윌리’였다. 이것은 최초의 미키 마우스 만화영화이자 최초의 유성 애니메이션이었다. 이것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디즈니는 타고 다니던 차까지 팔아가며 자금을 끌어 모았다. 단순히 그림에 사운드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그림과 사운드가 동시에 움직이는 것을 구현했다. 이렇게 탄생한 유성 애니메이션은 그야말로 혁신이었다. 관객은 물론 평론가들까지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좌충우돌하는 장난꾸러기 미키 마우스와 여자 친구 미니 캐릭터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사람들은 미키 마우스를 ‘만화의 찰리 채플린’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찰리 채플린으로부터 함께 공연하자는 제의를 받았고 마담 투소는 미키 마우스 밀랍 인형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디즈니는 1930년부터 인형에서 칫솔에 이르는 수백 가지 미키 마우스 상품을 시장에 쏟아냈다. 1932년에는 ‘월트 디즈니 엔터프라이즈’라는 부서를 신설하고 캐릭터 사업에 직접 뛰어들었다. 이듬해 3,500만 달러를 벌어들일 정도로 대성공이었다. 미국 어디를 가나 미키 마우스 천지였다.

장편 ‘백설공주’로 센세이션
디즈니는 1937년 세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개봉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애니메이션은 장편 영화 상영 도중 잠시 틀어주는 소품 같은 개념이었으나 월트 디즈니는 이러한 고정관념에 과감히 도전했다. ‘백설공주’는 플롯과 이야기 측면에서 장편 영화가 가져야 할 모든 것을 갖춘 작품이었다. 무모할 것만 같았던 도전은 개봉 직후 모든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며 대성공을 거뒀다. ‘전함 포템킨’의 감독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은 백설공주를 본 뒤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라고 추켜세웠다.
사실 디즈니는 백설공주가 1년 반이면 완성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25만 달러였던 제작비는 스토리 개발에만 10만 달러, 애니메이션 제작에 30만 달러가 들었다.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고전동화를 80분짜리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 위해 디즈니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동화에서 흥미로운 부분을 추려 애니메이션에 맞는 새로운 스토리를 구성해야 했다.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 일곱 난쟁이를 탄생시키고 이들의 이름과 캐릭터를 완성하는 데에만 무려 2년이 흘렀다. 스로리가 잡힌 다음에는 애니메이션 작업이 이어졌다. 목소리를 연기할 배우가 정해지고, 작품에 쓰일 음악들도 만들어졌다. 1936년 2월 시작된 애니메이션 작업은 1937년 12월1일에야 마무리됐다. 그리고 드디어 12월21일 로스앤젤레스 카세이 서클 극장에서 할리우드의 저명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설공주는 애니메이션은 물론 실사영화의 기록까지 뛰어넘으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카세이 서클 극장에서만 개봉 첫 주에 1만 9,000 달러, 10주간 총 18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드느라 은행 빚을 져야 했던 디즈니는 백설공주 개봉 5개월 만에 이 빚을 모두 갚을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백설공주를 기점으로 애니메이션은 장편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에 아카데미는 1939년 월드 디즈니에게 특별상을 안겼다. 애니메이션 발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한 것이다.
디즈니는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며 더욱 발전한 기술력으로 1940년 ‘피노키오’, ‘판타지아’를 연달아 내놓고 1941년과 1942년에는 ‘덤보’와 ‘밤비’를 선보였다. 1950년에는 ‘보물섬’을 시작으로 ‘해저 2만리’, ‘멍청한 교수’, ‘메리 포핀스’ 등 실사 영화도 활발하게 제작했다.

어떤 간섭도 받지 않는 환상의 세계 ‘디즈니랜드’

▲ 월트와 로이 디즈니 형제는 1923년 디즈니 브라더스 스튜디오를 열었다. 월트는 스토리, 애니메이션, 실사영화의 제작을 맡았고 로이는 회사의 살림을 도맡았다. 그리고 1926년 하이페이론 애비뉴로 스튜디오를 옮겨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로 이름도 바꿨다.
1955년 디즈니는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에 놀이공원 ‘디즈니랜드’를 만들었다. 1930년대 애니메이션에 공을 들였던 것처럼 월트 디즈니는 놀이공원에 심혈을 기울였다.
미키 마우스에서 신데렐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캐릭터를 보유한 디즈니가 테마공원을 만드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디즈니랜드의 실패를 점쳤다. 그래도 월트 디즈니는 ‘꿈을 꿀 수 있다면, 할 수 있다(If you can dream it, you can do it)’고 믿었다. 유성 애니메이션,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이미 세상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던 그는 이번에도 자신의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움직였다.
애너하임을 시작으로 디즈니는 1971년에 두 번째 공원인 디즈니월드를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 건설했고 1983년에는 일본 도쿄, 1992년 프랑스 파리에 디즈니랜드를 열었다. 개장 50주년이었던 2005년까지 총 10개의 디즈니랜드가 문을 열었다. 전세계 디즈니랜드는 하루 평균 30만 명이 방문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특히 일본 도쿄의 디즈니랜드는 개장 2년 만에 32년 동안 미국 디즈니랜드를 구경한 사람 수를 넘어설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였다.
월트 디즈니는 디즈니랜드가 완전무결한 공간이길 원했다. 들어선 순간 외부의 어떤 간섭도 받지 않는 환상의 세계이길 바라며 디즈니랜드를 건설했다. 개막식에서 그는 “디즈니랜드에서는 과거에 대한 추억으로 나이를 잊을 수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젊음을 되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그가 이룩하고자 했던 디즈니랜드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디즈니랜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엔터테인먼트를 창출했다. 그러기 위해 월트 디즈니는 거의 매일 그곳에 살다시피 하면서 새로운 놀이기구를 들이는 등 끊임없이 디즈니랜드를 손봤다. 1956년에 710만 달러, 1958년에 550만 달러, 1961년에 800만 달러가 새로운 놀이기구를 들이는데 썼다.

디즈니 형제의 퇴장, 새로운 전기를 맞다
애니메이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월트는 1966년 12월15일 세상을 떠났다. 몇 년 후 형인 로이마저 세상을 떠나자 월트의 사위인 론 밀러가 회사를 맡았다. 그러나 그가 경영을 맡았던 1971년부터 1984년까지 디즈니는 걷잡을 수 없는 침체에 빠졌다. 그 시가 만든 장편 애니메이션은 고작 3편이었다. 수익은 점점 떨어졌고 야심차게 설립한 디즈니 채널과 터치스톤 픽처스도 기대 이하였다. 그렇게 하향세를 걷던 월트 디즈니를 살려낸 건 파라마운트社 사장 출신의 마이클 아이스너(Michael Eisner)였다. 1984년 디즈니 CEO에 취임한 그는 기존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상상력,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월트보다 더 월트답다’는 평가를 들었다. 여기에 로이의 사업 능력까지 겸비해 디즈니는 다시 활력을 찾았다.

▲ ‘꿈을 꿀 수 있다면, 할 수 있다(If you can dream it, you can do it)’고 믿었던 월트 디즈니는 1955년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에 놀이공원 ‘디즈니랜드’를 만들었다. 디즈니랜드는 들어선 순간 외부의 어떤 간섭도 받지 않는 환상의 세계를 구현했다.
1991년 ‘인어공주’를 필두로 디즈니는 르네상스를 맞았다. ‘미녀와 야수’는 애니메이션 최초로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알라딘’, ‘라이온 킹’, ‘포카혼타스’, ‘노트르담의 꼽추’, ‘헤라클레스’, ‘뮬란’, ‘타잔’에 이르기까지 대중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다.
1995년에는 픽사 스튜디오와 손잡고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제작했다. 이후에도 디즈니와 픽사는 ‘벅스 라이프’, ‘토이 스토리 2’, ‘니모를 찾아서’ 등을 연달아 히트시켰다.
15년 동안 디즈니를 이끈 마이클 아이스너의 뒤를 이어 2005년부터 디즈니를 이끌고 있는 CEO 로버트 아이거(Robert A. Iger)는 디즈니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한 장본인이다. 그는 2006년 픽사를 74억 달러에 인수해 그해 경제 전문 사이트 ‘마켓 워치’가 선정하는 ‘올해의 CEO’로 뽑히기도 했다.
그는 디즈니가 어린이를 포함해 가족이라는 콘셉트를 중심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방향성을 보여준 것은 물론 콘텐츠 이용자들이 갖고 있는 경험 영역을 다원화시키면서도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통해 이용자들의 콘텐츠 접근이 가능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해외 시장 개척을 통해 콘텐츠를 전파하고 이와 동시에 브랜드 파워를 강화했다.
디즈니는 만화, 영화, 캐릭터, 출판, 음반, 놀이공원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오락 분야의 콘텐츠를 제작하고 배급하는 세계 최초이자 최대의 기업이다. 기업의 역사는 켜켜이 쌓이고 있지만 나이를 잊은 왕국, 그곳이 바로 디즈니다. 디즈니가 존재하는 한 우리의 동심도 영원히 시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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