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회관 개관, 국제적 규모의 공연장으로 부상

1978년 4월14일 서울시민을 위한 문화 공간이 탄생됐다. 지상 6층, 지하 3층, 한국의 전통적 건축양식으로 구현한 세종문화회관이 바로 그것이다. 총 3,800여 석 규모의 대극장과 음악전용홀인 442석의 소극장 등을 갖춘 세종문화회관은 다양한 문화행사를 실시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서울시민들을 위한 복합문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은 1972년 서울 시민회관이 불타 없어진 뒤, 서울 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이 필요하다는 여론에 따라 다목적 홀의 건립이라는 명목으로 1974년 착공돼 1978년 4월14일 개관했다. 건축양식은 한국의 옛 건축양식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변용해 웅장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갖도록 했다. 또한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부조 및 조각·회화작품 등 수준 높은 예술조형물을 곳곳에 비치했다. 서울시가 운영하고 있는 공연예술을 중심으로 한 8개의 전속단체인 교향악단·국악관현악단·무용단·뮤지컬단·합창단·소년소녀합창단·교향악단·오페라단·청소년교향악단의 운영기구를 갖추고 총감독 아래 2부 8팀으로 조직되었다.
회전승강무대·영사설비를 갖춰 공연예술 전반을 공연할 수 있는 3,895석의 대강당과 음악전용홀로서의 소강당 522석, 6개국 동시통역시설을 갖춘 270석의 대회의장, 기타 소회의장, 500평의 전시장, 1,064석의 연회장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1978년 개관 당시 1978년 4월부터 7월8일까지 약 2개월 반 동안 대강당에서 73회, 소강당에서 82회 등 무려 155회의 국제적 규모의 개관예술제를 마련, 국내외 명성 있는 예술단체가 공연함으로써 국제적 규모의 공연장으로 부상했다.
‘세종문화회관’이라는 명칭은 세종로에 위치한 점과 제3공화국의 ‘세종대왕업적 추앙의 의지’를 반영하기 위해 박종화(朴鐘和:당시 예술원 회장)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채택되었다.
원래는 서울특별시가 운영했으나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함에 따라 1999년 7월1일 재단법인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1896년 4월6일] 제1회 아테네 올림픽 개막

▲ 1896년 4월6일, 393년 제293회 대회 이후 1,500년 만에 고대 올림픽의 전통과 향수가 살아 있는 아테네에서 10일간 개최되었다. 근대 올림픽은 세계 각국 청소년들의 상호 이해와 우정을 다지고 세계의 평화를 이룩하려는 데 있었다.

1896년 4월6일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제1회 근대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이는 고대 올림픽의 이상을 계승한 첫 번째 근대 올림픽으로, 393년 제293회 대회 이후 1,500년 만에 고대 올림픽의 전통과 향수가 살아 있는 아테네에서 10일간 개최되었다.
육상, 사이클, 수영, 체조, 역도, 레슬링, 펜싱, 사격, 테니스, 마라톤 등 43개의 세부종목을 14개국 241명의 선수들이 10일 동안 힘과 기술을 겨뤘고, 판아테나익 스타디움에 운집한 6만여 명의 관중들이 한마음으로 응원하고 환호했다. 대회 개막 첫 경기는 100m 달리기 예선부터 시작됐다. 트랙 경기는 현재와 같은 좌회전이 아니라 우회전으로 실시됐고, 200m 육상경기는 새 트랙의 코너가 너무 뾰족해서 안전상 취소되었다. 수영경기의 경우, 해안까지 되돌아올 거리를 짐작할 출발자와 함께, 수영선수들은 작은 증기선을 타고 나가 4월의 차가운 지중해에서 경기를 치렀다. 대회의 최대 관심사는 옛 그리스의 영광을 찬양하여 종목으로 채택한 마라톤으로 2시간 58분으로 우승한 그리스의 목동 출신 S.루이스는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고대 올림픽 경기에서 우승자만 인정한 것과 달리 각 경기의 1·2위에게 시상이 되었는데, 우승자에게는 상장·은메달과 함께 올리브 가지로 만든 관을 씌워주었고 2위 선수에게는 상장·동메달·월계수관이 수여됐다. 모든 상은 대회 마지막 날인 4월15일에 그리스왕 게오르기오스 1세가 수여했다. 대회 우승은 금메달 11개의 미국이 차지했고, 그리스(금메달 8개)·독일(7개)·프랑스(5개)·영국(3개)이 그 뒤를 이었다.
당시 참가국은 개최국 그리스를 포함해 오스트레일리아·오스트리아·불가리아·칠레·덴마크·독일·프랑스·그리스·영국·스웨덴·스위스·헝가리·미국으로 대부분 유럽 국가이며, 쿠베르탱을 불신한 네덜란드와 올림픽 대회 자체를 비난한 벨기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또 1895년 말까지도 초청장이 발송되지 않아 실제 참가국이 14개국에 불과했고, 대회규모도 축소됐다.
근대 올림픽은 1894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설립을 주도한 프랑스의 피에르 드 쿠베르텡(Pierre de Coubertin, 1863~ 2937) 남작의 공이 컸다. 당초 그의 의도는 보불전쟁(1870~1871)에 패해, 사기가 저하된 프랑스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의욕을 북돋아주고 아울러 올림픽이라는 스포츠 제전을 통해, 세계 각국 청소년들의 상호 이해와 우정을 다지고 세계의 평화를 이룩하려는 데 있었다.
제2회 대회는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었고 이후로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2002년 4월12일] 고속열차(KTX) 첫 선

▲ 2002년 4월 12일 경부고속철도에 투입될 국산 1호 고속열차 ‘KTX 13호’가 첫 선을 보였다. 국산 1호 고속열차 KTX는 동력차 4량, 동력객차 16량 등 20량 1편성, 열차길이 388m, 총 중량 771.2t으로 승객 935명을 태우고 시속 300㎞로 운행할 수 있다.

경부고속철도에 투입될 국산 1호 고속열차 ‘KTX 13호’가 첫 선을 보였다. 건설교통부와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 고속열차 제작사인 (주)로템은 2002년 4월12일 경남 창원시 대원동 창원공장에서 ‘KTX1 3호’에 대한 출고식을 가졌다. ‘KTX 13호’는 고속열차 제작사인 (주)로템이 프랑스 알스톰의 기술지원을 받아 1998년 10월 제작에 들어간 뒤 3년6개월 만에 열차조립을 완료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도 고속열차 생산국 대열에 올랐다.
국산 1호 고속열차 KTX는 동력차 4량, 동력객차 16량 등 20량 1편성, 열차길이 388m, 총 중량 771.2t으로 승객 935명을 태우고 시속 300㎞로 운행할 수 있다. 기존 프랑스 테제베(TGV)열차보다 1.5배 강력한 1만 8,000마력의 추진시스템과 영하 25도의 추위에서도 정상운행이 가능하다. 또 터널이 많은 우리나라의 지형적 특성을 고려, 고속으로 터널을 진입할 때 귀울림(이명)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압력밀폐 시스템이 설치됐다.
고속철도공단은 2002년 말까지 국산 고속열차 16편성을 제작했고, 2003년 10월까지 18편성을 추가로 제작해 국내분 총 34편성의 제작을 완료했다. 2004년 4월 1일, 드디어 고속철도의 시대가 축제 분위기 속에 개막됐다. 오전 5시 5분, 부산발 서울행 제74호 열차의 출발을 시작으로 경부·호남선 전 구간에서 본격적으로 KTX의 상업운행이 시작됐다.

 

[1960년 4월19일] 민주주의 혁명 4.19

▲ 4.19혁명의 민주이념은 그 후의 정권담당세력의 무능과 경제,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으로 미완의 상태로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국민에게 또 하나의 귀중한 각성과 교훈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

4.19혁명은 1960년 4월 학생들이 중심세력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으로 8.18해방과 분단 이후 성립된 1950년대 한국 사회의 정치적·경제적 모순에 대한 변혁의 요구를 배경으로 발생했다.
4.19혁명의 최초의 도화선은 1960년 2월28일 대구에서 불붙여졌다.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의 대구 유세일인 28일은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구시내 모든 초·중·고학생들은 당국의 지시로 등교를 강요당했다. 그것은 야당 선거 유세장에 학생들이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어 3월1일 서울, 대전, 수원에서 8일 대전, 12·13일 부산, 서울에서 계속적인 학생 데모가 일어났다. 학생들의 구호도 “처음에는 구속학생 석방하라”, “학생을 정치 도구화하지 마라”는 등이었으나, 점차 정치적인 구호로 바뀌어 “학생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뭉치자”, “부정선거를 묵인하는 자는 자유로운 조국에서 삶을 포기한 자다”라는 등의 부정선거 규탄의 방향으로 바뀌어갔다. 3월15일 선거 당일에는 마산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벌였고, 자유당의 작태를 목격한 시민들도 선거포기선언을 한 민주당 당사 주변에 모여 “협잡선거 물리치자”고 외치면서 학생 데모에 합류했다. 경찰과 자유당의 정치폭력배들의 무자비한 제지로 많은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속출했다. 그러자 4월11일에는 마산상고생 김주열이 눈에 최류탄이 박힌 채 무참하게 살해된 시체로 바다에서 발견, 전국의 학생들과 국민들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18일 고대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질서 정연한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종로 4가에서 50~60명의 괴한으로부터 기습을 받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심은 완전히 정부로부터 돌아서고 말았다.
19일 수천 명의 학생, 시민이 경무대 앞까지 진출해 ‘이승만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시위대가 경무대로 몰려가자 경찰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무차별 발포해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흥분한 시위 군중은 경찰 지프차를 빼앗아 불사르고, 경찰서와 파출소를 공격했다. 독재타도를 부르짖는 시위는 부산, 광주, 인천, 청주 등 전국에서 이어졌다. 당황한 정부는 오후 5시부터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갑차를 동원해 무차별진압을 감행했다. 밤 10시쯤 계엄군이 진주하면서 시위는 수그러들지만 이날 시위로 서울에서만 1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전국에서 6,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4월25일 학생들이 흘린 피에 보답하라며 대학교수들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다시 시위가 거세졌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사임을 발표하고 학생들은 학교로 복귀하면서 혼란한 시국이 가라앉았다. 같은 해 6월15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7월29일 민의원·참의원선거가 실시돼 민주당이 압승했다. 이 선거 결과에 따라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의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4.19혁명의 민주이념은 그 후의 정권담당세력의 무능과 경제,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으로 미완의 상태로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국민에게 또 하나의 귀중한 각성과 교훈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

 

[1997년 4월20일]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망명

▲ 1997년 4월20일 전 북한 노동당 비서 황장엽 씨가 성남공항을 통해 우리나라에 도착했다. 그의 망명은 북한 입장에서는 정치적 타격이었으며, 한국 정부에는 북한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전 북한 노동당 비서 황장엽 씨가 1997년 4월20일 성남공항을 통해 우리나라에 도착했다. 황 씨는 두 달 전 중국 베이징 주재 한국총영사관에 망명을 신청한 뒤 필리핀에 머물러왔다.
1922년 생으로 탈북당시 75세였던 황장엽은 김일성대학의 철학과 교수로 활동했으며 1965년 김일성대학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970년 노동당 중앙위원이 된 그는 1972년 이후 11년 동안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서 활동했는데 1984년 조선노동당 국제담당비서와 1993년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함으로써 당과 정부의 핵심인사가 되었다. 이 외에도 황장엽은 1979년 주체사상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고 1995년에는 국제주체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그는 북한의 통치 이데올로기 중 하나인 주체사상의 최고 이론가로서 주체사상을 해외에 전파하는 외교업무를 병행했으며, 김일성의 비공식 방중을 단독 수행하는 등 굳건한 입지를 구축했다. 또 김정일이 백두산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백두산 출생설을 퍼뜨리며 김정일 후계자 구도 구축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한 그는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등의 호칭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북한 권력 서열 13위에 오를 정도로 핵심적 권력층에 있었던 그는 김정일과의 갈등을 겪고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 250여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것을 확인한 후 지체 없이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3번이나 지낸 북한 핵심 권력자여서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망명 후 탈북자동지회, 북한민주화위원회 등 탈북자 단체에서 활동하며 강연과 방송 등을 통해 북한의 체제와 권력을 비판했다. 그의 망명은 북한에 대해서는 정치적 타격이었으며, 한국 정부에는 북한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그는 저술 및 강연 등으로 반 김정일운동을 하다 2010년 10월10일 안가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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