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매거진246호=편집국) 구대일은 작별 인사를 한 후에 천천히 무악재를 내려가고 있었다. 김충선은 그의 반듯한 변모에 내심 흡족해 하면서 봄의 하늘을 보았다. 그는 부드러운 햇살을 즐기고 싶었다. 봄날의 빛줄기는 마치 여인의 방심(芳心)과도 같다. 달콤하고 설레는 마음이 눈부시다. 이런 날은 마오(真央)가 그립다. 그녀의 솜털 잔잔하던 목덜미에서 풍기던 풋풋한 향내가 떠올랐다.

‘이건 그 날의 냄새와도 같다!’

김충선은 흐르는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잠시 봄의 햇살을 감상 하다가 눈을 번쩍 떴다. 언제 부터였던가? 일곱 자 쯤의 거리에서 사내아이 한 명이 고개를 길게 빼고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분명 냄새는 여자인데......?’

자세히 주의해서 보았다. 여자였다. 비록 사내아이처럼 차림을 하고 있었으나 신체의 굴곡이며 얼굴 모습이 영락없는 여자 아이였다. 나이는 18이나 19세 정도.

“뭘 보고 있냐?”

“뭘 보고 있냐?”

“까불지 말고 가던 길이나 가라.”“까불지 말고 가던 길이나 가라.”

“야! 너 정말 혼 좀 나볼래?”

“야! 너 정말 혼 좀 나볼래?”

엉뚱한 놈이었다. 아니 년이었다. 사야가 김충선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 내고 있었다.

“따라하지 마라.”

“따라하지 마라.”

김충선은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라 개울물을 발로 차서 튕겼다. 놀랍게도 개울물은 물기둥을 이루며 뭉쳐서 상대에게 날아갔다. 남루한 사내 복장의 여자는 피신할 사이도 없이 흠뻑 물세례를 받고 말았다.

“이 개망나니 같은 놈!”

온 몸을 적신 그녀가 울화를 터뜨렸다. 그 발음이 매우 기이했다. 김충선은 순간적으로 그녀가 조선인이 아닌 것을 간파했다.

“넌 누구냐?”

“넌 누구냐?”

김충선은 다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과하마. 난 김충선이라고 한다. 피할 줄 알았는데...?”

“사과는 안 받겠어. 내 옷이 마를 때까지 보류야. 내 이름은 아율미(娥溧美)다.”

아율미는 물기를 손으로 털면서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매우 귀염성 있는 얼굴이었다. 반듯한 콧날에 입술은 단아했고 눈이 별처럼 초롱초롱 했다.

“내게 용무가 있는 거야?”

김충선은 별로 기대하지 않고 무심히 던져 본 말이었다. 그러나 돌아 온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무엇 때문에 너에게 접근 했겠어? 항왜 사야가! 일본인 철포대장으로 조선에 투항하여 전 조선군에게 화승총의 제조와 사용법을 전수했음. 그 때문에 일본의 피해가 막중하며 결국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 여태 길어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 이유 중 하나임! 성격은 신중하면서도 대범하고, 조총의 달인이며 칼과 창술에도 귀재이고 이순신을 부모처럼 섬기고, 그의 아들 울과 의병장 김덕령과 절친한 친구이며 홍의장군 곽재우 등과도 대단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신비로운 일본인이며 조선인!”

기가 막혔다. 김충선은 봄날이며... 햇살이며 그 눈부시고 찬란한 자연의 현상들은 완전히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율미라는 남장여인을 대하며 기묘한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누구냐? 넌...?”“아율미라고 했잖아.”

“내가 알고 싶은 건 이제 이름이 아니야.”

아율미는 물에 적셔진 누더기 두건을 벗었다.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긴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내려왔다. 모발이 드러나자 그녀의 얼굴은 이제 다시 변했다. 귀여울 뿐만 아니라 도발적인 아름다움까지 엿보였다.

“궁금하지? 궁금해서 미치겠지?”

아율미는 대놓고 약을 올렸다. 김충선으로서는 실로 처음 만나는 강적이었다. 지난 수년 간 조선의 각 처를 돌아다니며 전쟁을 치루고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다. 물론 여인들과 마주 할 기회는 적었으나 그래도 경험은 있었다. 하지만 이 소녀는 특이했다.

“나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있으니 두 부류 이겠지. 이롭거나, 아주 이롭거나...그 반대의 경우.”

“아, 그랬어요. 당신은 두뇌도 매우 훌륭하다고 들었어요. 인정 합니다. 그렇다면 내 정체에 대해서도 이제 어느 정도 감을 잡아야 하는 게 아닌가요?”

아율미는 얄밉도록 예쁘게 말하며 두건의 물을 짜냈다. 갑작스런 존대에 당혹감마저 일어났다.

‘귀신은 아니겠지?’

김충선은 그녀를 훑어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럴 때 그 친구 김덕령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성격이 호탕하고 기개가 넘치는 김덕령은 언제나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넘쳤다. 아마 김덕령이었다면 당장 아율미에게 이렇게 말했으리라.

“이 년, 너의 미모를 보니 사내들을 숱하게 홀리겠구나. 백년 묵은 여우 짓일랑은 이제 그만두고 순순히 꼬랑지를 내리 거라. 너를 안아줄 수 있는 사나이는 여기 나뿐이니라.”

아율미의 행동이 갑자기 멈췄다. 김충선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설마 김덕령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 내어 입 밖으로 나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아율미의 대답은 더욱 놀란 것이었다.

“이상하네. 그건 의병장 김덕령이 주로 사용하던 대사인데......”

혼비백산이 따로 없었다. 이 소녀는 도무지 내력을 알 길이 없는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아까운 김덕령을 조선 왕은 개잡듯 잡아 버렸어. 미친놈이야.”

소름이 오싹 돋았다. 조선의 왕을 함부로 욕하는 이 소녀의 정체가 너무 궁금했다.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장수를 모함하여 때려 죽였으니 쯧쯧 조선이 제대로 되겠어? 이런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니까.”

비로소 김충선은 그녀가 조선의 왕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적어도 김충선이 꿈꾸는 새로운 조선을 이해할 수 있는 동지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김충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누구인지 알거 같군.”아율미는 개울물에 세수를 하면서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냈다.

“정답이라면 입맞춤을 해주겠어.”

그녀는 거침없이 말하고는 배시시 웃는다. 뇌쇄적인 웃음에 봄 햇살도 부끄러워 달아나고 소녀의 방심(芳心)만이 천지에 가득하다. 그 향기에 취하여 김충선이 더듬거렸다.

“너...넌.......?”

아율미는 고혹적인 눈빛을 던지며 또 다시 김충선의 말을 따라했다.

“그래...너....넌 어떻다는 건데?”

“내 꿈을 성취해 주기 위해서 온 사람이야.”

아율미는 순간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상대의 대답이 의외였던 것이다. 꿈을 성취해 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번에는 아율미가 의혹에 잠겼다.

“너의 꿈이 어떤 건데?”

이 순간 사야가 김충선은 망설이지 않는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조선을 꿈꾸고 있다.”

이런 말은 함부로 내뱉는 것이 아니었다. 본래 김충선은 신중하고 사려 깊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율미란 이름의 소녀에게는 반드시 의중을 밝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신비소녀에게는 감출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녀는 이미 김충선에 대해서 상당한 정보를 지니고 접근해 왔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왜냐하면 조선의 의병 김덕령을 개처럼 선조가 두들겨 잡았으므로 그 왕이 미쳤다고 말한 것은 바로 김충선 자신이 친구 울에게 던진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의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아율미의 입에서는 흘러나온 이 말은 실로 무서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전혀 그러한 기색이 없었다.

“그래. 새로운 나라의 주인으로 이순신장군을 꿈꾸고 있다.”

사야가 김충선은 말 한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추호의 동요도 없고 정직하다. 그의 눈빛은 하늘을 품고 있었고 가슴은 푸르기 이를 데 없다. 진심은 언제나 빛이 난다.

“놀라워. 충격적이야. 그렇지만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야.”

아율미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녀는 역시 평범하지 않았다. 잠깐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담담한 얼굴이 되었다. 마치 이 모든 사안들을 알고 짐작했다는 태도였다. 김충선은 이제 신중한 기색으로 상대방을 파악하고 있었다.

“넌......”

“맞아. 여자야. 그리고 왜란이 터지고 나서 조선으로 들어왔지. 이 나라는 한심했어. 불과 20 여 일만에 한성을 일본에게 넘겨주고 왕은 정신없이 도망치고, 그걸 구원한답시고 명나라 장수 조승훈이 3000 병력을 이끌고 개 거품 물며 참전했다가 평양전투에서 완전 박살이 나가지고 요동으로 도주할 때 이 몸은 건주위(建州衛)에서 혀를 차며 왔다고. 개 같은 이 땅에.”

건주위라면 건주여진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의 국경을 넘나드는 북쪽 오랑캐.

“조선에 대하여 그렇게 말 하지마라. 개 같은 경우보다 더 심한 것이 건주위...바로 너의 오랑캐니까!”

“오호, 이제 보니 그대는 조선인이 다 되었군. 하기야 벼슬과 이름을 하사 받았으니 오죽 하시겠나.”

그녀의 야유에 김충선은 오기가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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