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 위치한 한 골프장에서의 일이다. 지인의 안내를 받아 방문한 이곳에서 이국적인 풍경을 감상하며 잠시 차나 한 잔 마실 수 있을까 기대했던 것과 달리 입구에서부터 익숙한 말들이 들려왔다.
“야, 왜 이렇게 늦어? 유 두 썸씽, 이것들이 느려 터져서는…”
한 무리의 중년여성들이 기다리는 줄이 길어지자 한 필리핀 여성에게 삿대질해가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간간이 한두 마디 정도 영어를 사용할 뿐 한국말로 따지듯 말하다 보니 이국의 상대 여성은 무슨 말인지 몰라 커다란 눈만 굴리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에 대해 한 지인은 “겨울이 되니 지난 12월부터 싼값에 골프를 칠 수 있다는 동남아의 장점 덕에 한국인 골프 여행객이 쏟아지고 있다”며 “문제는 이렇게 오는 한국인들이 영어로 의사표현이 제대로 되지 않아 사소한 문제라도 생기면 무례하게 막말하며 항의하는 일이 많다”고 설명했다.
현지에 사는 한 교민은 “얼마 전 연습하러 나왔더니 같은 홀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한 무리가 캐디에게 안마를 요구하고 있더라. 해외로 나오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모습을 보면 부끄럽다”고 말을 보탰다.
이런 얘기를 들은 후 자리를 이동해 샤워장에 가니 한국어로 적힌 안내문이 커다랗게 붙어 있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영어나 중국어 등 타국어는 볼 수 없었다. 한국인 손님이 많아 그런가보다 하고 내용을 숙지하는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안내문의 내용은 ▲시설이 골프클럽을 이용하는 손님을 위한 공간이니 옷을 벗고 다니지 말아 달라 ▲맥주 및 음식 등 식사가 불가능한 공간이니 자제해달라는 것이었다.
안내데스크에 있는 안내원에게 이런 문안을 붙인 이유에 대해 물으니 “한국 사람들이 종종 옷을 벗고 다니거나 샤워 후 이곳에서 술을 먹는 등 행동을 보여 다른 손님들의 항의가 많았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이 모두 그런 것이 아니니 오해는 말아달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이런 가운데 오는 길에 만난 한 현지 캐디여성 A씨에게 최근 한국인 방문율에 대해 물었다. A씨는 “일반적으로 한국인 고객이 90% 이상”이라며 “불편한 분들도 있지만 좋은 분들도 있다. 반 정도의 비율이기 때문에 재수 있고 없는 날로 구분 지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혹독한 날씨 탓에 대문 밖 출입도 어려운 이 계절, 국내보다는 동남아지역 골프장은 골프여행을 즐기려는 한국인 관광객들로 북새통이다. 골프여행을 핑계 삼아 해외로 성매매를 나서는 중년남성들의 이야기는 다수 언론매체에서 이미 충분히 거론된 바 있다.
그러나 직접 들여다 본 필리핀에서의 한국인 모습은 내 자신이 한국 국적을 갖고 있음이 수치스러울 정도였다. 중년여성들은 동남아 지역인들을 낮춰보며 무례한 행동과 언사로 우리나라 이미지를 깎아 내렸고 나이와 지위를 불문한 수많은 한국 남성들은 유학이나 골프여행을 핑계 삼아 성매매를 일삼고 있었다.
우리 역시 50년이란 짧은 기간에 경제화, 민주화, 정보화를 이룩한 나라다. 한국은 19세기 후반 이후 100여 년간 어렵고 힘든 세월을 보낸 경험이 있다.
이런 아픔을 겪은 만큼 우리는 가난함에 허덕이고 굶주린 배고픔을 달래고자 돈을 벌기 위해 나선 동남아 민족을 낮춰보며 함부로 행동하는 자세를 버려야한다.
저명한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라는 저서를 통해 경제와 사회제도 등의 발전 속도 차이 중요성에 대해 역설한 바 있다. 우리도 반백년 짧은 경제성장 역사로 국민 성숙도가 저평가된 ‘졸부 국가’로 나라 이미지가 굳어지기 전에 ‘동방예의지국’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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