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 1883년 3월6일 태극을 중심으로 4괘를 배치한 ‘태극기’ 국기로 제정

우리나라에서 국기의 제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1876년(고종13) 1월,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한·일 사이에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부터다. 당시 강화도조약 체결이 논의 되는 동안 일본은 “운양호에는 엄연히 일본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는데 왜 포격했느냐?”며 물었지만 조선에서는 ‘국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조선은 국기 제정에 대한 논의를 하기 시작했고 1883년 3월6일 드디어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선포한다.

 

태극기의 효시는 1882년 박영효가 미국과 조약을 체결할 때 사용한 것에서부터다. 사실 박영효가 태극사괘를 창안하고 도안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일본에서 발행된 일간신문 ‘시사신보’에 따르면 고종이 직접 도안하고 색깔까지 지정했다는 보도를 한 사실이 밝혀졌다.
국기 제정에 대해 청의 의견을 물었으나 청은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강조하기 위해 국기의 도안에 청의 국기를 본뜬 ‘용’을 넣을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고종은 이를 완강히 거부했고 청색과 적색으로 이루어진 태극원과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4괘를 그려 국기로 정한다는 명을 내렸다.
1882년 5월 미국과의 통상 조약 체결로 국기 제정의 필요성이 다시 제기 됐고, 1882년 8월 수신사로 파견된 박영효가 일본행 배위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고종은 1883년 3월6일 태극을 중심으로 건(乾)곤(坤)감(坎)리(離) 4괘를 사각형 네 귀퉁이에 배치한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선포했다.
하지만 국기를 공포할 당시 구체적인 제작 방법이 명시되지 않아 이후 다양한 형태의 국기가 사용됐다. 그러다 1942년 6월29일 국기제작법을 일치시키기 위해 ‘국기통일양식’을 제정해 공포했다. 현재의 국기가 대한민국 국기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49년 10월15일부터였다.
한편, 1883년 조선은 태극기를 널리 알리기 위해 태극기 도안을 놓은 우표 5종 280만 장을 일본에 제작, 의뢰했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의 요청과 달리 4괘를 삭제하고 태극문양도 중국의 태극도형으로 바꿔 제작한 우표를 보내왔다. 이는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나타내기 위한 치밀한 계산이었다.

[1969년 3월2일] 세계 첫 초음속 비행 성공한 ‘콩코드’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개발 한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 1969년 3월2일 시험비행을 위해 프랑스의 뚤루즈 공항을 이륙했다. 프랑스 남서부의 툴루즈 공항 활주로를 이륙한 콩코드는 29분 동안 프랑스 상공을 난 뒤 무사히 지상으로 돌아왔다. 인류 최초의 초음속 여객기가 비행에 성공했다. 첫 시험비행 성공 이후 2대의 콩코드는 1969년 파리 에어쇼, 1970년 영국의 판보로에어쇼 등에 출품돼 그 위용을 과시했다. 이어 지속적인 시험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알루미늄 합금으로 제작됐고 가늘고 긴 삼각날개와 4개의 엔진을 지닌 콩코드는 이후 냉각장치 보완 등을 거쳐 7년 뒤인 1976년 상업운항을 시작한다. 영국의 브리티시 에어와 프랑스의 에어 프랑스가 런던∼바레인, 파리∼리우데자네이루, 파리∼워싱턴, 런던∼워싱턴 비행을 시작한 것이다. 평균 시속 2,000㎞. 대서양을 3시간 만에 돌파했다. 그러나 경제적 부담과 소음 문제 등으로 대서양 횡단 정기편은 오래가지 못하고 런던∼뉴욕, 파리∼뉴욕 구간의 부정기 전세기로만 운항됐다.
콩코드는 2000년 7월25일 추락사고로 113명이 숨지는 등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게다가 2001년 9.11테러로 승객 수가 줄어들었다. 이 같은 악재가 계속되자 두 항공사는 엄청난 유지비의 부담을 극복하지 못하고 2003년 10월24일 콩코드 시대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1887년 3월6일] 조선 전깃불 첫 등장
우리나라 처음으로 경복궁 건청궁에 전깃불이 켜졌다. 에디슨이 백열전등을 발명한 지 불과 8년여 만의 일이다. 당시 향원정의 못물을 막고 발전기를 설치해 전력을 생산했는데, 고장이 잦고 고치는 데 드는 비용이 커 ‘건달불’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전등설비는 1886년 12월 전등 설비 기술자 윌리엄 멕케이(William McKay)가 전등설비와 함께 인천에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윌리엄 맥케이는 에디슨이 설립한 회사의 기술자였다. 그는 경복궁 내 취수가 용이하고 시설물을 설치할 넓은 공간과 배전거리를 고려한 결과 궁내 취향교와 어정 사이를 부지로 정했다. 설비규모는 16촉광의 백열등 750개를 점등할 수 있는 설비였다. 당시 연료는 석탄을 사용했으며 설비도입가격은 2만 4,525달러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사실 경복궁 내의 건청궁에 처음으로 전등이 점화됐지만 최초의 점등 일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당시의 여러 가지 기록과 선청일기(宣廳日記) 등을 토대로 1887년 3월6일 최초의 점등일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7년 뒤 창덕궁에 두 번째 발전소가 설립됐다. ‘제 2전등소’라 불리던 창덕궁의 발전소는 1894년 5월30일 준공됐으며 240마력의 증기설비와 16촉광 백열전등 2,000개를 켤 수 있는 발전설비를 갖췄다.
그 후 전기 수요는 꾸준히 늘어 10여 년 후인 1898년엔 우리나라 최초의 전력회사인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오늘날 한국전력의 모태가 됐다.

[1908년 3월8일] 미국 여성 노동자 시위
1908년 3월8일, 경제 공항에 의한 경기 침체로 생활고에 허덕이던 1만 5,000여 명의 미국 여성 섬유노동자들이 뉴욕 러트거스 광장에 모여 소리 높여 외쳤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이 아니라 휴식이다!” “우리는 빵과 장미를 원한다!”
여성노동자들은 더 나은 작업조건에서 일하고 남성 노동자들과 같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 것(빵)과 함께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투표할 권리(장미)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당시 대부분 10대인 어린 노동자들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초착취 의류 공장에서 하루 12시간에서 18시간 동안 일해야 했다. 여성들에게는 선거권과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굶지 않기 위해 일하면서도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받아야 했다.
이 시위는 여성 평등을 바라는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 이후 여성들의 국제적인 연대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각국에서 여성들의 지위 향상과 남녀차별 철폐, 여성빈곤 타파 등 여성 운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2년 뒤인 191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2차 여성운동가대회에서 독일의 노동운동 지도자 클라라 제트킨의 제창으로 여성운동의 시초가 된 미국 여성 노동자 시위가 일어 난 3월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정했다. ‘여성의 날’에 미국에서는 3월 내내 여성계의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지고 중국은 공식휴일로 정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20년대 처음 ‘세계 여성의 날’ 기념행사가 열렸지만 일제에 의해 행사가 취소돼 1980년대까지 맥이 끊겼다 1985년 제1회 한국여성대회가 열린 이래 매년 3월 ‘세계 여성의 날’을 축하하는 전국적인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대표적인 여성운동으로는 1915년 멕시코와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 반대 및 물가안정 운동, 오스트리아·에스파냐에서 일어난 군부독재 반대운동, 1943년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무솔리니 반대시위를 비롯해, 1979년 칠레의 군부정권 반대시위, 1981년 이란 여성들의 차도르(아바) 반대운동, 1988년의 필리핀 독재정권 타도 시위 등을 들 수 있다.

[2004년 3월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2004년 3월12일 국회는 헌법 제65조 제12항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한다. 2004년 1월5일 새처년민주당의 조순형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언급하면서 본격화된 탄핵은 같은 해 3월5일 대통령이 선거중립의무 위반과 측근비리 등에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하지 않을 경우 새천년민주당은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겠다는 특별기자회견을 했다. 대통령이 사과를 거부하자 3월9일 15시49분 국회의사국에 접수된 탄핵소추안은 그날 18시27분에 본회의에 보고하고 사흘 뒤인 3월12일 제안설명도 유인물로 대체한 채 무기명 투표를 실시, 재적의원 271인 중 193인의 찬성, 반대 2인으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당시 국회에서 통과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의결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회견과 지지자 모임에서 행한 발언과 연설을 거듭해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여 국법질서를 문란케 했고, 대통령 자신과 측근들, 그리고 참모들의 권력형 부정부패로 인해 국정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덕적·법적 정당성을 상실하였으며 세계적인 경기호황 속에서도 국민경제와 국정을 파탄시켜 민생을 도탄에 빠뜨림으로써 국민에게 IMF위기 때보다 더 극심한 고통과 불행을 안겨 주었기에 탄핵소추한다’고 밝혔다.
노무현 대통령은 다음 날부터 대통령으로서의 모든 직무가 정지되었고, 국정은 고 건 대통령 권한대행 중심으로 재편됐다.
하루 이틀 사이에 벌어진 탄핵소추안 가결로 야당에 대한 전 국민적인 질타가 쏟아졌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탄핵 찬반진영의 논쟁이 국민들 사이에 불붙기 시작했고, 백만 명이 넘는 국민들은 탄핵 무효를 외치며 전국 각지에서 탄핵에 반대하는 촛불시위가 잇따랐다. 각종 시민단체들은 탄핵소추안 가결을 야 3당의 쿠데타, 3.12쿠데타로 규정하고 탄핵안 철회운동에 돌입했다. 탄핵안 가결에 대한 국민적인 분노는 4월15일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총선거에까지 이어져 열린우리당이 과반이 넘는 152석을 차지하고, 제1당이던 한나라당은 121석, 제2당이던 새천년민주당은 9석, 자유민주연합은 4석을 얻었다.
탄핵소추안을 접수한 헌법재판소는 심의에 착수, 평균 주 2회씩 7번의 공개변론과 10회에 가까운 평의를 개최하는 등 집중적인 심리가 진행되었다. 같은 해 5월14일 국회의 심판청구를 기각하며 노무현은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는 1948년 대한민국건국헌법의 제정이후 최초로 국가원수이자 행정권의 수반인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국회에서 의결된 것으로 헌정사적 의미가 크다.

[1986년 3월13일] 신상옥·최은희 납북 8년 만에 탈출
영화감독 신상옥과 배우 최은희가 납북 8년 만에 극적으로 탈출했다. 1986년 3월13일 오스트리아 빈의 인터콘티넨탈호텔에 묵고 있던 두 사람은 북한 공작원의 감시를 피해 미국대사관으로 갔다. 이들이 대사관으로 향하는 동안 일본 교토통신 직원이 동행했으며 북한 공작원들은 탈출을 막기 위해 추격전을 펼쳤다.
탈출에 성공한 이들 부부는 미국으로 건너가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의 정치, 사회, 문화 현실을 폭로했고 이번 탈출에 앞서 3회에 걸쳐 탈출을 기획했으나 실패했다고 밝혔다. 최은희는 1978년 1월11일 홍콩에 갔다가 사흘 후인 14일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됐다. 당시 남편인 신상옥 감독은 부인 최 씨가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고 수소문하다 같은해 7월19일 홍콩에서 강제 납북됐다. 납북된 뒤 신상옥·최은희는 북한에서 신필름영화촬영소를 세우고, ‘돌아오지 않는 밀사’, ‘소금’, ‘불가사리’ 등의 영화를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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