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슨 만델라 장례식, 91개국 정상, 10만 인파, 애도의 물결 이어져

2013년 12월5일 9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그는 한평생 아프리카인을 위한 자유와 민주주의의 투쟁에 헌신했으며 인권 탄압에 항거한 투사로, 또한 세계 평화에 공헌한 용기의 화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 장례식이 있던 날, 제이콥 주마 남아공 대통령, 만델라의 부인 그라사 마셸 여사, 전 부인 위니 마디키젤라-만델라 여사를 비롯한 가족 등 약 5,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새 남아공 건국의 아버지 만델라와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만델라 공식 추도식, 오바마, 반기문 등 90여 개국 수반 모여
“굿바이 마디바(만델라의 애칭).”
그를 지칭하는 말은 수없이 많지만 그를 떠나보내는 날은 그냥 ‘마디바여, 안녕’이라고 인사하면 될 듯하다. 어떤 수식어를 써야 그의 고된 일생을 대변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러한 만델라의 삶을 보상이라도 하듯 잠든 만델라의 곁에 10만 인파가 눈물로 그를 떠나보냈다.
12월10일 하루 종일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FNB 경기장에서 열린 만델라 공식 추도식에는 90여 개국 수반과 정상급 인사가 참석해 역대 최대 규모의 조문 외교를 펼쳤다. 이날 정오 시작된 추모식에서 장내 아나운서의 소개와 함께 전 세계 지도자의 얼굴이 전광판에 비칠 때마다 관중석에서는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가장 뜨거운 박수를 받은 것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다. 만델라와 오바마는 각각 남아공과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데다, 오바마가 여러 차례 만델라를 자신의 멘토라고 밝혀왔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만델라를 ‘역사의 거인’으로 칭하면서 “만델라의 투쟁은 여러분의 투쟁이었고 그의 승리는 여러분의 승리였다”고 말했다. 그는 만델라를 간디, 마틴 루서 킹과 비교하면서 “우리에게 행동과 이상의 힘을 가르쳐줬으며, 법을 넘어 사람의 심장까지 바꾼 사람”이라며 “만델라가 가르쳐준 자아성찰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바마는 연설 전 미국과 냉전관계에 있는 쿠바의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과 악수를 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추도사에서 “무지개는 비와 태양이 어우러져 탄생하듯이, 만델라와 남아공 국민의 고통과 영광이 무지개 국가를 탄생하게 했다”며 “만델라는 위대한 정치지도자를 넘어 이 시대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고 추모했다.

고단한 만델라, 고향 쿠누에서 조용히 잠들다
이러한 시대의 영웅 만델라도 결국 조용한 고향 쿠누로 돌아가 고된 삶을 마감했다. 만델라의 장례식은 만델라 가족 농원의 개활지에 세워진 타원형 돔 모양으로 설치된 흰색 대형 천막에서 진행됐다. 15일(현지시각) 만델라의 시신이 든 관은 국기가 덮인 채 장례식장으로 운구됐으며 이를 군 의장대가 행진하며 호위했다.
주마 대통령은 추도 연설을 통해 “오늘은 남아공의 자유 투사였으며 공복인 만델라의 95년에 걸친 영광스러운 여정이 끝나는 날”이라며 “민주화된 남아공을 건국한 고인의 마지막 길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이 영광”이라고 말했다.
장례식에는 또한 아프리카연합(AU) 순회의장인 에티오피아 하일레마리암 데살렌 총리, 남아프리카개발공동체(SADC) 순회의장인 말라위 조이스 반다 대통령, 탄자니아 자카야 키크웨테 대통령이 참석해 헌사를 했다.
만델라와 함께 로벤섬에서 26년 동안 복역했던 민주화 투쟁의 동지인 아흐메드 카스라다도 연설을 통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자유를 향한 먼 여정을 달리고 남아공에 존엄함을 복원시킨 당신(만델라)께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고 추도했다.
화창한 날씩 속에 진행된 장례식은 TV를 통해 남아공과 전 세계에 생중계됐으며, 장례식 만델라의 시신이 든 관은 인근 가족 묘원에 매장됐다. 다만 관이 묻히는 장면은 만델라 가족의 요청에 따라 공개되지 않았다.
이날 장례식을 끝으로 떠나는 만델라를 애도하는 10일간의 국가적 추모행사가 모두 종료됐다. 떠나는 그가 외롭지 않았을 것임은 틀림없었다.


만델라, 감옥에서 한층 더 성숙했다
만델라는 변호사이자 권투선수였다. 또한 사우스 아프리카의 흑인 차별을 철폐하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는 확신으로 공산주의 노선을 택했고, 백인 정부를 전복시키는 테러리스트이자 혁명가였다. 그는 간디의 비폭력운동에 영향을 받아 변호사가 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인종격리정책) 반대운동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흑인인권운동에 참가했다.
정부 전복음모 혐의로 사형 언도를 받고 무기 징역으로 감형되어 27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여기서 만델라의 삶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 기간 그는 흑백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무력보다는 평화와 화해가 더 소중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때 그의 죄수번호가 ‘46664’번이었는데, 이후 이 번호는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숫자가 됐고, 세계인들은 그를 가리켜 존경받는 어른이란 뜻인 ‘마디바’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만델라는 자서전에 이렇게 써 있다. “나는 감옥에서 성숙해졌다.” 옥중에서 받은 각종 인권상을 계기로 그의 명성은 알려졌고, 어느새 세계인권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비밀리에 감옥으로 가서 만델라를 만났던 디 클락(FW de Klerk) 대통령은 만델라의 인격과 크기에 마음이 움직였고, 그 길로 만델라를 석방하고 ‘아파타이트(Apartheid: 인종차별)’를 종식시켰다.

정의와 자유의 구심점 만델라,
가장 행복했던 장소로 돌아가다

남아공 최초의 민주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된 만델라의 위대함은 집권 이후 발휘되었다. 그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설치하고 인권유린 사례들을 낱낱이 밝혀내는 대신 해당자들을 모두 사면했고 “용서한다, 하지만 잊지는 않겠다”는 말로 국민 대통합의 기조를 밝혔다. 이에 따라 남아공은 다인종 민주사회를 향해 첫발을 내딛게 됐다.
백인 통치를 끝내면서 가장 열화같이 치솟는 기대가 비인간적 만행을 청산하고 흑인 존엄성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만델라는 많은 지지자들을 실망시켰다. 백인 잔재를 청산하라는 흑인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그들을 용서한 것이다. 만델라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지지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만델라는 흑인 이기주의, 흑인 중심주의를 거부하고, “나는 백인 지배를 거부하지만 흑인 지배도 거부한다”고 말했다.
만약 그가 사우스 아프리카의 ‘아파타이트’를 종식시키면서 백인 잔재 청산을 시행했다면 사우스 아프리카는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이고, 오늘의 안정과 화해는 없었을 것이다. 만델라는 대통령 취임 당시 ‘모두를 위한 정의와 평화’와 함께 ‘모두를 위한 일과 빵, 물과 소금에 대한 희망’을 약속했다. 실제로 최근 10년간 남아공에서는 흑인 중산층이 2배로 늘어났고, 평균 소득도 169% 증가했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백인가구 평균 소득의 6분의 1에 불과하다. 또한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소득 불균형은 오히려 확대됐다. 94년에는 남아공 상위 10% 계층이 전체 소득의 55%를 차지했으나, 지난해엔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70%를 차지했다고 블룸버그가 보도했다. 특히 하루 1.25달러(1,316원) 미만으로 연명하는 빈곤층도 26%에 이른다. 소득 불균형은 흑인 사회 내부에서도 확대되고 있다. 이렇듯 아직 해결해야 할 수많은 과제를 남기고 있다.
하지만 만델라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세계 정치·경제의 지도 자체가 바뀌었을 것이다. 이를 알기에 세계적인 지도자들도 추앙하는 인물 만델라. 그는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보냈던, 자신의 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묻혔다. 그렇게 만델라는 95년의 힘들고 긴 여정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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