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도시’ 타클로반 복원 10년 걸려

지난 11월8일 슈퍼태풍 ‘하이옌’이 필리핀 중부지역을 할퀴고 갔다. 관측 사상 최고 수준으로 순간 최대 풍속이 379km에 달했으며 필리핀 상륙 이후에도 순간 최대 풍속 230km를 기록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중부 레이테주(州)의 최대 도시 타클로반은 살아남은 자도 산 것이 아닌 ‘죽음의 도시’가 되어버렸다.

필리핀 중부 인구 20만의 도시 타클로반. 평화롭던 항구도시가 초대형 태풍의 직격탄을 맞았다.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에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진 건물들과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다. 세계 각국에서 구호물품을 보내오고 있지만 도로가 끊겨 제대로 지급되지 못하고 있다. 전기와 통신, 식수마저 끊긴 상황 속에 약탈과 총격전까지 벌어져 살아남은 자들도 굶주림과 두려움에 떨고 있다.
굶주린 이재민들이 정부 식량 창고를 습격하고, 치안공백 상태를 틈타 탈출한 죄수들이 정부군과 총격전까지 벌이고 있어 타클로반으로 들어가는 검문소에는 이곳을 벗어나려는 주민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이들 중에는 탈출한 수감자들에게 온 가족이 살해당한 주민도 있다. 태풍으로 상처를 입은 주민들은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며 그야말로 생지옥을 경험하고 있다.
필리핀 현지 방송에 따르면 태풍으로 인해 타클로반 교도소에 침수사태가 발생하면서 수감되어 있던 죄수 117명이 집단 탈출했으며 이들은 살인, 강간, 강도 등 각종 강력 범죄를 저질러 복역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국은 “자수하는 죄수들에 한해서 처벌을 유예하는 등 관용을 베풀겠다”고 나섰지만 현재 103명이 행방불명 상태로, 당국은 무장팀을 동원해 탈출한 죄수들을 쫓고 있다.


필리핀 정부 재난 대응 능력 비난
국제 구호물품이 밀려들고 있는데도 필리핀 정부가 피해주민들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면서 필리핀 정부의 재난 대응 능력이 도마 위에 올랐다. 피해 직후 현장에 미국과 영국, 호주 등 각국에서 구호물자가 밀려들었지만 정부의 행정력 부족으로 주유소 업주들이 영업을 기피해 구호 차량들이 연료부족으로 운행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최악의 참사에도 불구하고 생필품마저 제대로 보급 받지 못한 주민들의 좌절과 분노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필리핀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은 안이한 상황판단과 대응능력 부족으로 원성을 샀다. 특히 그는 피해지역 사망자 수가 1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외신들의 보도와 달리 “많아야 2,500여 명이 사망했을 것”이라는 인명피해 전망을 내놓았으며 국제 사회의 지원을 호소하기 보다는 일부 주민들의 약탈을 비난하는 등 불신을 키웠다. 또한 긴급대책회의에서는 군중들에게 공격을 받았다고 호소하는 주민에게 “그래도 죽지는 않은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결국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은 11월11일 TV로 중계된 연설을 통해 “피해지역 주민 구호 활동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국가재난사태를 선포한다”고 밝혔다. 또한 필리핀 정부는 이번 태풍 참사와 관련해 1,774명이 사망하고 최소한 82명이 실종된 것으로 공식 집계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필리핀 정부가 사망자수를 속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으며 AP통신 등 외신은 최소 1만 2,000여 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사망자수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1월22일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의 밸러리 에이머스 국장은 유엔 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50만 명의어린이가 극심한 영양실조 위험에 놓여있으며 80만 명의 임산부가 영양분 섭취에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태풍이 휩쓸고 간 지역의 이재민이 400만 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유엔은 필리핀 피해 복구 자금을 기존 3억 100만 달러에서 3억 4,800만 달러로 상향 조정했다.
400만 명의 이재민 중 현재 정부가 제공하는 긴급 피난처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들은 36만 명. 대다수의 이재민들은 찢어진 천으로 만든 천막에서 생활하고 있다. 더욱이 태풍 후 찾아오는 전염성 호흡기 질환이 이재민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다. 국제 구호단체인 ‘국경없는 의사회’에 따르면 열악한 상황으로 인해 가벼운 기침 증세가 심각한 독감으로 악화됐다가 폐렴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계속 내리는 비로 인해 오염물질이 씻겨 내려가 우려했던 설사병보다 폐렴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민들은 계속해서 내리는 비로 인해 젖은 옷을 말리지도 못한 채 바람이 그대로 통하는 천막에서 생활하고 있어 폐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특히 면역력이 약한 어린이와 노년층의 폐렴 감염 신고가 급증하고 있어 호흡기 질환의 확산을 막기 위해 깨끗한 물과 영양분, 보호소 등의 마련이 시급하다.
뿐만 아니라 마땅히 지낼 곳과 돌봐줄 이가 없는 170만 명의 어린이들이 인신매매와 노동착취의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유엔아동기구(유니세프)가 이재민 중 170만 명이 어린이로 태풍 피해 지역에서 아동 보호 작업이 부족하다’고 밝혔다. 특히 타클로반을 비롯해 태풍이 잦은 필리핀 중부지역에서는 혼자 남겨진 아이들의 학대, 노동착취, 인신매매가 성행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유니세프’는 국제 아동구호단체인 ‘세이브더칠드런’과 함께 아이들의 신원을 파악하고 가족을 찾아주고 있으며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이 안전하게 일과를 보낼 수 있는 센터를 건립을 진행하고 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타클로반에 이목이 집중되면서 의료지원 등 외부의 도움이 이어지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피해지역 주민들의 고통은 더욱 커지고 있다. 레이테주(州)에서 타클로반과 오르목 다음으로 큰 피해를 입은 반타야섬은 섬은 섬의 90%가 붕괴되고 2만 2,0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굶주림에 지친 아이들이 구걸하고 나섰지만 이 같은 사정이 잘 알려지지 않아 도움의 손길이 충분히 닿지 않고 있다.

관측 이래 최대, 슈퍼 태풍 ‘하이옌’
필리핀을 강타한 30호 태풍 ‘하이옌’은 중국어로 ‘바다제비’라는 뜻으로 현지시간 11월8일 오전 4시50분께 마닐라 남동쪽 600km 사마르섬에 도착한 후 빠른 속도로 북서쪽으로 이동했다. 필리핀 기상 당국에 따르면 사마르섬에 처음 상륙할 당시 태풍 중심부의 최대 풍속은 235km, 최대 풍속이 275km이었으며, 피해지역인 필리핀 중부를 지날 때 하이옌의 순간 최고 풍속은 379km(초속 100m)에 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미국 합동태풍경보센터의 태풍 관측 사상 최고 수준의 위력이다. 전문가들은 시속 118km 이상의 바람을 ‘싹쓸바람’이라고 부르는데, 지난 1969년 미국을 강타한 허리케인 ‘카밀(Camille)’ 의 순산 최대 풍속은 304km, 2003년 우리나라를 강타하며 100명이 넘는 인명피해를 낸 ‘매미’는 216km(초속 60m)이었다.
하이옌이 이렇게 엄청난 파괴력을 갖게 된 것은 다양한 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보통 태풍이 저위도에서 고위도 움직이는 것과 달리 하이옌은 줄곧 북위 5~10도 사이의 고수온(약 29도)해역을 지났다. 태풍은 육지를 만나면 힘이 급격하게 약화되는데 하이옌은 4일 동안 육지를 만나지 않고 높은 열 에너지를 유지하며 위력을 키웠다.
강력한 태풍으로 발달한 하이옌은 5m가 넘는 폭풍해일을 만들었고, 폭풍해일이 피해지역을 덮치면서 피해가 커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폭풍해일은 열대성 폭풍이 지나가는 동안 기압의 변화와 강풍으로 인해 발생하는 ‘초대형 파도’로서 해저지진으로 인한 지진해일인 ‘쓰나미’와 기원이 다르다.
더욱이 필리핀 기상당국이 ‘폭풍해일’이라는 용어 대신 ‘쓰나미’라는 용어를 사용해 위험성을 알렸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됐다. 지난 11월25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수많은 필리핀인들이 폭풍해일이라는 용어를 이해하지 못해 위험에 대비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마르 록사스 필리핀 내무장관도 “어느 누구도 이전에 ‘폭풍해일’이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며 만일 ‘쓰나미’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면 사람들이 최소한 위험성에 대해 더 잘 인식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폭풍해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타클로반시 공무원들은 주민을 강제로 대피시키지 않았고 주민 22만여 명 중 1만 5,300여 명만이 대피소를 찾았다.

환란 속에 국제사회 지원 이어져
최악의 재난을 겪고 있는 필리핀에 국제사회의 도움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필리핀 외교부는 총 51개국이 성금을 보내왔으며 이는 총 2억 9,000만 달러(3,000억 원)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필리핀 정부는 복구비를 제대로 충당하기 위해서는 저금리 차관을 지원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하이옌으로 인한 혼란이 점차 안정되고 있는 가운데 필리핀 국가재해위기관리위원회의 공식집계에 따르면 하이옌으로 인한 사망자와 실종자는 5,600여 명, 부상자는 1만 8,577명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1,0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공식 집계에 포함되지 않은 사망자와 실종자를 합산하면 사망자수는 더 늘어날 수 있다. 또한 파손된 가옥이 총 64만여 채, 농업과 인프라 부문에서는 총 2억8,000만 달러의 피해가 파악됐다. 피해를 입은 모든 지역의 건물과 인프라 피해액을 합하면 총 58억 달러(6조 원 이상)에 달할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전문 분석기관 키네틱 애널리시스 코프에 따르면 하이옌으로 인한 필리핀의 경제적 손실액은 최대 140억 달러(15조 원 이상)로 추산됐다.
우리 정부는 11월22일 필리핀 재건 복구를 위해 이미 발표한 500만 달러에 추가해 향후 3년 동안 2,000만 달러 규모의 무상 지원을 결정했다. 또한 대한 공병의료부대 지원을 위해 정부 합동조사단을 현지로 파견했다. 국방부는 태풍 피해 규모와 전체 병력 운용 등을 고려해 500여 명의 공병의료 인력을 파견하기 위해 국회 국방위원회에 파견 동의안을 제출, 의결을 거쳐 파병 절차를 신속하게 완료할 예정이다. 우리 정부가 파병을 결정한 것은 인도주의적 구호와 함께 6.25 당시 필리핀군의 파병에 대한 보은의 의미가 있다. 유엔이 아닌 재난국의 직접 요청으로 이뤄지는 파병은 이번 처음이다. 이번 정부의 결정은 미국과 일본, 영국, 터키 등이 이미 병력과 함께 함정 등을 파견한 후에 이뤄져, 다소 늦은 결정이라는 의견도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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