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주 변호사

(시사매거진244호=오병주 칼럼위원) 지금으로부터 203년 전인 1795년, 정도 임금이 왕위에 있을 때 제작한 ‘원행을묘정리의궤’라는 제목의 기록을 자세히 보면 ‘자’, ‘궁’, ‘회’, ‘갑’, ‘연’, 즉 임금의 어머니 회갑잔치라는 글이 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28살의 한창 나이에 아버지 영조 임금의 지시로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굶어 죽었다. 죄인으로 죽은 아버지 때문에 자신의 정통성에 하자가 있었던 정조는 치밀한 정치 이벤트를 꾸민다.

서울대학 규장각에는 당시 정조의 행차를 볼 수 있는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원본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화성행차 당시 누군가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15미터 길이의 행렬 후면도가 하나 더 있다. 훼손 상태는 심하지만 화려한 채색을 한 행렬의 뒷모습을 통해 전조행차의 복장과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 행렬도 역시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보이는 정조 행차의 숫자와 정확히 일치한다.

회갑잔치 행차에 마치 도성의 행정체계가 모두 움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행렬 속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 한 사람 빠져 있다. 바로 정조의 비인 중전이다. 시어머니의 회갑잔치에 며느리인 중전이 참석하지 않고 창덕궁에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에는 화성 행차 당시의 정치 역학관계가 얽혀 있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은 동갑이었기 때문에 정조에게 이 행차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화성에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에 화성에서 회갑잔치를 하려는 것은 어쩌면 정조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수한 회갑잔치 행차로 보기에는 그 행렬의 규모가 너무나 크다. 더욱이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대단히 미묘한 시기였다. 화성 행차 당시 정조의 행적을 담아 놓은 여덟 폭의 병풍을 살펴보면 정조의 화성 해아 목적이 분명해진다. 이 병풍 그림은 정조가 화성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하는 과정을 담아 놓은 것이다. 어머니 회갑잔치를 하러 가서 대규모의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것은 매우 엉뚱한 일처럼 보인다.

정조는 행차 마지막 날 노인들을 초대해서 양로잔치를 열었다. 화성에 거주하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또한 정조의 행차 길에는 언제나 꽹과리가 울리고 백성들이 적극적으로 민원을 제기했다. 그리고 정조는 그 자리에서 바로 백성들의 민원을 청취하고 해결해 주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화성 행차 결산 보거서이다. 놀랍게도 정조는 이 보고서에 자신이 먹은 밥값까지 기록해 놓았을 정도로 화성 행차의 전모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행차의 전모를 이처럼 투명하게 기록하여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제작하기까지는 6개월이나 걸렸다. 이 같은 정치적 기록은 정조의, 정치 행위에 대한 공개성, 투명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가져온 정조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필요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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