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특수공작을 목적으로 창설된 ‘실미도 부대’

31명의 부대원들은 3년 4개월간 철저한 인민군식 훈련을 받았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국가에 버림받았다. (사진출처_뉴시스)

(시사매거진244호=신혜영 기자) 1971년 8월 23일 월요일, 이날 새벽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 실미도(현 인천광역시 중구 실미도)에 위치한 대한민국 공군 684부대 북파공작원 24명이 부대원을 살해하고 부대를 이탈한다. 실미도를 탈출한 이들은 인천에서 탈취한 버스로 서울로 진입했지만, 결국 버스 안에서 수류탄으로 자폭한다. 30년 만에 세상에 알려진 ‘실미도사건’은 올해로 사건이 발생한 지 48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명확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남겨졌다.


[1971년 8월 23일] 실미도사건 발생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의 무장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하는 이른바 1‧21사태가 일어난다. 이후 정부는 대북 강경 대응 방침에 따라 1968년 4월 1일 대북특수공작을 목적으로 실미도 부대를 창설한다. 실미도 부대의 정식 명칭은 ‘2325 전대 209 파견대’로 1968년 4월에 창설됐다고 해서 ‘684부대’로 불렸다. 그곳에서 31명의 부대원들은 3년 4개월간 철저한 인민군식 훈련을 받았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국가에 버림받게 된다. 1970년대 초 국제적인 긴장완화와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됨에 따라 부대원들의 임무는 무의미해졌고, 이들의 존재가 불필요해진 정부는 기간병들에게 이들을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 그러나 오히려 당시 같은 부대에 있던 기간병 24명 가운데 18명이 훈련병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훈련 중 사망한 7명을 제외한 부대원 24명은 실미도를 탈출한다. 12시 20분경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 부대원들은 시내버스를 빼앗아 서울로 진입,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현 동작구 대방동) 앞에서 군경과 대치하다 30사단 예하의 육군 병력에게 저지되었고 결국 버스 안에서 수류탄으로 자폭한다.

이 실미도사건으로 경찰 2명과 민간인 6명, 군인 18명, 공작원 20명이 사망했고 당시 생존 공작원 4명은 체포되어 군사재판을 받고 1972년 3월 10일 사형 당했다. 정부는 이 사건을 북한 무장간첩이 서울을 침입하여 군인들 간의 교전 끝에 이들을 사살한 북한 소행의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발표했다.

2006년 7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과거사위)는 실미도사건’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1971년 8월 23일 공작원들의 탈출사건(실미도사건) 발생배경에 대해 “구타, 살해 등 일련의 부대 내 상황에 절망감을 느낀 공작원들이 청와대 등 상급기관에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기 위해 부대를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당시 진상조사 결과, 공군 2325부대는 사건 당일인 1971년 8월 23일과 1998년 두 시기에 걸쳐 공작원들의 개인 이력카드 등 관련 서류를 소각, 철저한 은폐를 시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실미도사건이 30여 년 간 베일에 싸여 있다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건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1999)’을 원작으로 한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2003)’를 통해서다. 당시 영화에서는 북파공작원 선발과정에서 사형수, 조폭, 흉악범 등을 포섭해 특수부대를 만든 것으로 알려졌으나 당시 이 사건을 수사했던 공군 감찰부장 김중권은 “부대에 범죄자 출산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2004년 초에는 1968년 3월 충청북도 옥천군의 한 마을에서 실종된 7명의 청년이 684부대원이었다는 사실이 국방부에 의해 확인되기도 했다. 아직까지 684부대의 구성원들이 범죄자였는지 아니면 민간인들이었는지는 의문에 싸여 있다.

한편, 국방부는 지난해 8월 23일 오전 실미도 공작원 합동봉안식을 제7지구봉안소에서 거행했다. 실미도 공작원 29구의 유골함과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한 4인 중 2인의 위패를 안치했다. 45년 만에 영면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그동안 사형 집행된 4인의 공작원 유해를 찾기 위해 오류동지역과 벽제시립묘지 일대를 관계자의 증언과 현장 동행 등을 토대로 3차례에 걸쳐 발굴을 시도하였으나 아직 찾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1995년 8월15일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이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이 “일제의 잔재를 철거함으로써 민족정기를 회복하겠다”는 명분 아래 철거됐다. (사진출처_뉴시스)


[1995년 8월15일] 옛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이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이 해체된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1916년에 공사를 시작해 1925년에 완공되어 우리 민족을 수탈하고 억압하는 총 본산으로서 사용됐다. 해방 후 1948년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서울의 랜드마크이자 중앙행정관청으로 쓰이다 제3공화국 시절 중앙행정부서가 성루 세종로 종합청사와 과천청사 등으로 이전하면서 1986년부터는 23개의 전시실을 갖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사용되기도 했다.

오랜 기간 “일제식민통치의 치욕의 역사를 상징하는 건물로 철거가 마땅하다”, “동양에서 건립된 근대서양식 건물 중에서 르네상스 양식을 대표할 수 있는 걸작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철거와 보존을 둘러싸고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참여하는 첨예한 찬반대립의 공방전을 벌이다 1993년 완전해체 및 철거가 결정되었다. 그 후 8.15광복 50주년을 맞이하던 1995년부터 철거된 중앙청 건물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당시 정부는 “과거의 아픈 기억도 보존할 가치가 있으며, 비록 조선총독부 건물로 지어지긴 했으나 그 안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도 만들어져 왔다”, “치욕의 역사라고 해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증거이기에 이전을 해서라도 역사적 교훈의 장소로 삼아야 한다”는 여러 반론들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잔재를 철거함으로써 민족정기를 회복하겠다”는 명분 아래 철거했다.

제일 먼저 철거된 지붕 첨탑과 일부 철거 부자재들은 현재 천안의 독립기념관 야외에 자리한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에 보관되어 전시되고 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울창한 미루나무에 가려 한국 진영 제 3초소가 보이지 않자 미루나무 가지를 치자 북한군 장교 2명과 사병 수십 명이 나타나 작업을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 경비병이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하자 갑자기 수십 명의 북한군 사병들이 트럭을 타고 달려와 도끼와 몽둥이를 휘둘렀다. (사진출처_뉴시스)


[1976년 8월18일]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경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울창한 미루나무에 가려 한국 진영 제 3초소가 보이지 않자 미루나무 가지를 친다. 당시 미군 장교 2명과 사병 4명, 그리고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등 11명이 남쪽 국제연합군 측 제3초소 부근에서 미루나무 가지를 치는 한국인 노무자 5명의 작업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때 북한군 장교 2명과 사병 수십 명이 나타나 작업을 중지하라고 요구했으나 한국 경비병이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하자 갑자기 수십 명의 북한군 사병들이 트럭을 타고 달려와 도끼와 몽둥이를 휘둘렀다. 이들은 UN군측 지휘관과 장병들에게 집중 공격을 가해 경비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미군 대위와 소대장 마크 배럿(Mark Barrett) 미군 중위가 이마에 중상을 입고 피살됐다. 또 미군 사병 4명, 대한민국 국군 장교와 사병 4명 등이 중경상을 입었고, UN군측 트럭 3대가 파손되었다.

사건 직후 주한미군과 한국군은 ‘데프콘 3호’(경계상태 돌입)를 발령하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미군은 F-4 전폭기 1개 대대와 F-111 전폭기 1개 대대를 한국에 증파하고,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를 한국해역으로 항진시켰으며, B-52 폭격기를 출동시키는 등 전쟁위기에 직면했다.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자 북한은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발생 사흘 뒤인 8월 21일 북한 인민군 최고사령관의 명의로 국제연합(UN)군 사령관에게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이러한 사건들이 또 다시 재발하지 않도록 쌍방이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사태는 일단락됐다. 세계 여론의 비난이 잇따르자 북한정부는 ‘유감’을 표명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같은 해 9월부터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 남과 북의 분할경비로 바뀌었다. 경계 밖 상대편 지역에 존재하던 초소는 철거되었고 군사분계선을 따라 남과 북은 경계구역을 나눠 높이 1m의 흰색 말뚝 126개를 10m 간격으로 설치됐다.

이 사건은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북한군이 저지른 대표적인 도발행위로 인식되고 있다.


[1997년 8월6일] 대한항공 여객기 괌 추락

1997년 8월5일 오후8시22분 승객 231명, 승무원 23명을 태운 대한항공 801편이 김포국제공항을 이륙했다. 그리고 6일 승객과 승무원 등 254명을 태운 대한항공 여객기가 휴양지 괌의 아가냐공항에 착륙하다 니미츠힐 밀림지대에 추락했다. 추락 당시 801편의 왼쪽 날개의 랜딩 기어가 나무와 송유관을 치면서 왼쪽 날개 엔진이 언덕과 충돌했고 이후 기체는 언덕을 올라가면서 기수 부분부터 부러지기 시작했다.

짙은 어둠에 열대성 폭우가 쏟아지는 악천후 속에서 공항의 활공각 유도장치시설의 작동이 중단되고 최저안전고도 경보시스템이 고장난 상태에서 조종사가 육안에 의존해 착륙하려다 이 같은 참사가 빚어졌다. 구조는 사고 1시간이 지나서야 시작 됐고 구조는 괌 소방서와 미군이 함께 진행 했으나 당시 화재가 심해서 신원확인이 불가능한 시신도 많았다. 이 사고로 228명이 사망하고 26명이 목숨을 건졌으나 휴가철이어서 대부분 신혼부부나 일가족 참사가 많았다. 사고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착륙인 줄 알았다고 말했으며 비행기 충돌 후 화재가 발행했고 진술했다.

블랙박스를 해독한 NTSB(미 연방교통안전위원회)는 기장의 착륙 전 브리핑에 대해서 문제가 있었다고 밝혔다. 사고 30분 전 박용철 기장은 브리핑에서 니미츠 VOR/DME(전방향 무선표지소)가 활주로에서 3.3항공마일 떨어져 있다는 사실과 활주로까지 안전하게 강하할 수 있게 도와주는 장치인 글라이드 슬롭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리 통보 받았다. 그러나 부기장과 항공 기관사가 자신의 역할은 물론이고 기장에 대한 상호 확인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고, 결국 추락이라는 끔찍한 사고를 맞았다.

1938년~1941년 전 세계를 무대로 한국 춤의 아름다움을 알리며 ‘반도의 무희’, ‘동양의 진주’라 불렸던 최승희가 1969년 8월8일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출처_뉴시스)


[1969년 8월8일] 무용가 최승희 영원히 잠들다

광복 후 월북해 북한에서 활동하던 무용가 최승희가 1969년 8월8일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958년 그녀의 남편 안막(安漠)이 김일성에게 반역했다는 이유로 숙청당한 뒤 부르주아적 잔재를 가진 예술가로 탄압을 받았고 최승희는 중국으로 도망가다 국경수비대에 사살됐다는 설과 격리 수용되다 간암으로 사망했다는 설, 그리고 지하철공사장에서 강제노역을 하다 숨졌다는 설이 있다.

1911년 11월24일 경성에서 태어난 최승희는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무용 발표회를 관람한 것을 계기로 무용계에 입문했다. 최승희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을 하고 경성방송국 연예 분야를 담당하던 오빠 최승일의 후원을 받아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의 연구생으로 지원, 일본에 건너간다. 이시이의 제자가 되어 일본에서 사사한 뒤 무용단의 일원이 되어 각지에서 공연을 펼친 최승희는 1929년 서울로 돌아와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했고 잇따라 신작 발표회를 가졌다. 그녀는 전통무용을 익혀 자신의 창작무용에 응용, 칼춤과 부채춤, 승무 등을 현대화했다. 특히 일본에서 공연한 ‘에헤야 노아라’가 대성황을 이루어 점차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그녀는 1938년~1941년 전 세계를 무대로 한국 춤의 아름다움을 알리며 ‘반도의 무희’, ‘동양의 진주’라 불린다. 1938년 개최된 세계무용경연대회에서는 마리 비그만(Mary Wigman), 루돌프 폰 라반(Rudolf von Laban) 등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의 강요로 일본군 위문공연을 해 광복 후 친일파라는 오명에 시달리게 되자 문인인 남편 안막과 월북, 1946년 평양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우리나라 전통무용의 체계화와 무용극 창작에 몰두한다. 하지만 남편의 숙청 후 그녀 역시 1967년 숙청을 당했으나 2000년대에 들어 복권된 것으로 전해진다.

주요 작품으로 ‘인도인의 비애’, ‘초립동’, ‘장구춤’, ‘거친 들판에 가다’, ‘승무’, ‘칼춤’, ‘반야월성곡’, ‘춘향전’, ‘유격대의 아들’, ‘조선의 어머니’ 등이 있다. 무용 이론 연구에도 매진한 최승희는 ‘조선민족무용기본’, ‘조선아동무용기본’ 등의 책을 펴내기도 했다.


[2000년 8월12일] 러시아 핵잠수함 쿠르스크호 침몰

2000년 8월12일 러시아 북해함대 소속 최신예 전략 핵잠수함 ‘쿠르스크’호가 기동훈련 도중 노르웨이 북부 바렌츠해에서 침몰했다. 원인 불명의 폭발음을 남긴 채 해저 108m에 가라앉았다. 이 사고로 잠수함에 타고 있던 승무원 118명이 모두 숨졌다.

침몰 사실은 서방측이 먼저 공개했고 러시아 군 당국은 이틀이 지난 후에야 이를 공식 확인했다. 당시 러시아 정부와 군은 사고가 나지 쉬쉬하기에 바빴다. 사고 당시 러시아 해군은 쿠르스크함과의 통신이 갑자기 두절되자 곧 조사에 착수했고, 동함의 추진력을 공급하던 2기의 원자로가 중지된 채 해저에 침몰하고 있는 것을 사고 다음날인 13일에서야 확인한 것이다. 러시아 해군은 다음 날 “130여 명의 승조원이 탑승한 러시아 전략 핵잠수함 쿠르스크함(오스카급)이 바렌츠해에서 충돌한 뒤 침몰했다”고 발표했다.

러시아 해군은 사고 이틀 후에야 모스크바에 있는 해군사령부에 구조작전본부를 설치하고 항모 쿠츠네쵸프를 비롯하여 잠수함구조함, 수상함, 잠수함 등 22척의 함정을 동원 해 구조작업에 나섰으나 심한 비바람과 높은 파도로 작업을 일단 포기했다가 날씨가 좋아지자 15일 밤터 본격적인 승무원 구출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자체 능력으로 구조가 어려워지자 러시아는 나흘 만에 노르웨이와 영국의 심해 구조팀의 지원을 받았다.

미국을 포함한 서방국가들은 러시아에 공식적 진상규명을 위한 공동조사를 요구했지만, 러시아 측은 쿠르스크호를 침몰시켰을지 모를 서방국과의 진상규명을 거부했다. 쿠르스크함의 침몰원인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정확한 원인이 발표되지 않고 있다. 사고가 난 뒤 한 달 후 러시아 의회 사고 조사반이 “쿠르스크함이 핵순양함 포트르함이 오발한 어뢰에 맞아 침몰한 것 같다”고 밝혔지만 아직도 러시아의 공식 표명은 없는 상태다.

쿠르스크호는 항공모함 추격과 격침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길이 154m, 폭 9m, 배수량 1만 3,000톤의 신형 잠수함으로 최대 24기의 핵미사일을 탑재하고 수심 500m에서 120일간이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최신형 오스카급 전략 핵잠수함이었다. 1994년 건조되어 1995년 취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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