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엇갈린 역사 바로잡아야

(사진출처_뉴시스)

(시사매거진244호=신혜영 기자) 지난 2월 친일반민족행위 판명으로 인촌 김성수에게 내려진 서훈이 박탈됐다. 정부는 인촌이 1962년 받은 건국공로훈장 복장(현재 대통령장·2등급)을 취소 의결하며 56년 만에 서훈을 박탈했다. 이로써 지난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한 20명의 서훈 박탈이 모두 마무리 됐다. 그런가 하면 최근 법무부가 친일파 이해승의 손자를 상대로 낸 수백억 원대 땅 환수 소송에서 패소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올해 광복 73주년을 맞았지만 친일청산은 여전히 더디며 속 시원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20명의 서훈을 박탈하는 데 10여 년이 걸린 것처럼 곳곳에 산재해 있는 친일의 역사를 바로 잡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림은 극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갈 미래를 위해서 친일청산은 꼭 해야만 하는 숙원임에는 틀림없다.

지난 3월 1일은 3‧1절 99주년을 맞았던 날이었다. 이날 서울 시내 곳곳에서는 ‘친일을 청산하자’와 ‘이제 반일 감정을 버리자’는 상반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광복을 맞고 오랜 기간 동안 친일청산을 해왔지만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친일 잔재는 여전히 곳곳에 즐비해 있다. 오랜 기간 친일청산이 이뤄지면서 일각에서는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잊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 청산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역사를 바로 알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건 앞으로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대학, 지역 내 등 우리 사회에 만연한 친일흔적

우리나라 곳곳을 보면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흔적들이 즐비하다. 대학가, 지역 내 등 여전히 친일인물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난 3‧1절 광주 기념식에선 친일논란의 가곡 ‘선구자’를 부르려다 취소되는 일이 발생했다. 선구자를 작곡한 조두남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고 작사가 윤해영은 친일논란이 있는 인물이다.

최근 고려대를 비롯해 이화여대, 연세대, 한국외대 등 대학가 내에서는 친일논란이 있는 동상을 철거하라는 학생들의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2월 친일반민족행위 판명으로 서훈이 박탈된 인촌 김성수의 동상은 현재 경기 과천의 서울대공원과 서울 성북구의 고려대, 전북 고창 새마을공원 3곳에 세워져 있다. 이 가운데 고려대와 고창 새마을공원에 위치한 동상 2개는 서울 종로구 계동의 고택과 인촌의 숙소터, 고창의 인촌 생가 3곳 등 총 5곳과 함께 지난달 국가보훈처에 의해 현충시설 지정이 해제됐다.

지역 내에서도 친인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경기 수원박물관은 수원 출신 독립운동가 발굴 조사를 진행하면서 친일 경력 논란이 있는 나혜석(1896~1948년) 서양화가를 독립운동가로 규정해 말썽이다. 나혜석은 3·1운동으로 5개월 복역한 게 전부다. 그 뒤 친일파로 일본 외무성 부영사가 된 남편 김우영과 만주로 이사한 뒤 조선총독부 주최 제1회 조선미전에 입선해 오히려 친일 논란을 부추겼다.

전북 고창 인촌 생가, 광주 남구 구동 광주공원에 있는 친일파 윤웅렬과 이근호 선정비, 경상남도 사천시의 단종 태실지위에 자리한 친일파 최연국의 무덤 등 지역 곳곳에 우리가 몰랐던 친일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최연국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어 있는 인물이다.

이화여대 친일청산 프로젝트 기획단 학생들이 지난해 11월 1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본관 옆 김활란 동상 앞에서 김활란 친일행적 알림팻말 제막식을 하고 있다. 최근 이화여대를 비롯해 고려대, 연세대, 한국외대 등 친일논란이 있는 동상을 철거하라는 학생들의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사진출처_뉴시스)


친일파들이 국가유공자?

국가 서훈을 받고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몇몇 친일파들이 현충원에 순국지사들과 나란히 누워 있는 것 역시 우리가 청산해야 할 친일잔재다.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자 국립묘지 안장자 현황’을 보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63명의 시신이 서울현충원과 대전현충원에 묻혀 있다. 친일파 63명 가운데 김백일·김홍준·신응균·신태영·이응준·이종찬·백낙준 등 7명은 서울현충원에, 김석범·백홍석·송석하·신현준 등 4명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 혐의자’를 보면 1966년 국민장을 받은 윤익선을 비롯해 1977년 대통령표창을 받은 김동호, 대통령장을 받은 김성수, 서춘, 이은상, 이갑성 등 총 21명에 달한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으로서 1981년 3월 사망 당시 성대한 국민장을 치르고 국립묘지에 안장된 이갑성 역시 논란의 대상이다. 그에 대한 뚜렷한 친일행적은 밝혀진바 없지만 아나키즘 계열의 독립운동가 김성수가 결정적인 단서를 내놓았고 임의택(임정서무국장), 유우석(유관순 열사의 오빠) 등도 이갑성의 친일행적에 대해 언급한 바 있기 때문이다.

특히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고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는 일에 앞장섰던 김창룡이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는 사실은 더욱 아이러니하다. 김 씨의 묘는 김영삼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로 정권이 이양되던 1998년 2월 어수선한 시기를 타서 이장됐다.

시민단체들은 기무사 내부의 누군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계획된 일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며 김창룡의 묘를 이장하라고 요구했지만 국방부는 이장 요구를 받아들일만한 법적근거가 없다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제로 국립묘지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는 친일파라도 ‘장성급 장교로 전역·퇴역한 뒤 사망한 이와 무공훈장을 받은 사람은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을 갖는다’라고 돼 있다. 때문에 독립유공자 서훈이 국무회의에서 취소되거나 국립묘지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지 않는 한 현충원에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묘를 강제로 이장할 수는 없다.


박정희 정권, 독립유공자 심의에 친일파 내정
원칙과 순수성 무너뜨려

대한민국 정부 차원의 보훈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50년 4월14일 군사원호법이 공포·시행되면서다. 이 법은 공비를 토벌하다 전사한 사람이나 군 복무 중 순직한 자의 유족에 대한 원호 업무가 목적이었던 사업으로 항일 독립유공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보훈 지침도 들어 있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강력한 후원아래 친일세력과 연계해 반공을 국시로 성립된 권력이었기 때문에 김구를 비롯한 우파 독립운동 진영은 부담스런 정적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훈의 첫 출발을 반공으로 삼았고 그러한 유공 과정을 통해 친일세력들은 ‘반공 애국투사’로서 대한민국에 당당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박정희 정권기에 들어서며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과 포상이 본격화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다양한 형태의 국가적 기념사업과 독립유공자에 대한 보훈사업을 전해했고, 1962년 4월16일 군사정부는 군사원호칭을 원호처(現 국가보훈처)로 승격시키고 그 대상도 군사원호 대상자 중심에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추가로 포함시켰다. 같은 해 문교부 산하에 독립유공자 공적 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1963년 내각 사무처에 독립유공자 상훈심의위원, 1968년 총무처에 독립유공자 상훈심의위원, 1977년 원처에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 등을 설치해 이전의 정권과는 달리 적극적인 보훈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독립유공자에 대한 공적 조사와 상훈 심의는 친일 행위자를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을 임명하거나 수상자로 포함시키면서 원칙과 순수성을 무너뜨렸다. 그 결과 친일단체나 일제 통치기관에 근무했던 사람들이 국립현충원 내 국가 유공자 묘역, 애국지사 묘역 등에 진짜 독립유공자들과 함께 안치되는 아이러니가 연출되기도 했다.

독립유공자 사이에 뒤섞인 친일 경력자를 찾아내기 위한 1차 조사는 1980년대 초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였던 고 임종국 선생과 광복회가 나서 진행했다. ‘광복회원친일유공자 명단’이라는 이름으로 작성된 문건에는 친일 경력을 가진 23명의 명단이 포함돼 있다. 이를 민족문제연구소가 이어받아 지난 2004년 2월 ‘독립유공자 가운데 재심이 필요한 사람’들의 명단 20명을 국가보훈처에 제출했다. 이 가운데 3.1운동 민족 대표 33인으로 대통령장을 서훈 받은 이갑성 등 9명은 ‘조사가 더 필요한 사람’으로 같은 대통령장이 서훈된 김성수 등 11명은 ‘친일 행위가 뚜렷한 사람’으로 꼽혔다. 국가보훈처는 그동안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1996년 한 차례 서춘, 김희선, 박연서, 장응진, 정광조 등 5명의 친일 전력자에 대한 서훈을 박탈하는데 그쳤다.

애국선열 관련단체의 한 관계자는 “도대체 누구의 가치판단으로 이루어졌는지 몰라도 그 역시 같은 친일파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선영이나 일반묘지에서 호화묘지를 꾸민다 해도 눈총을 받을 것인데 하물며 국립묘지에 묻힌 것은 분명히 재고되어야 한다”며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2004년, 2005년 각각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특별법과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국가귀속특별법을 논란 끝에 제정했지만 결국 이렇다 할 성과는 내지 못했다. (사진출처_뉴시스)


친일후손, 조상들 땅 찾기 소송 줄이어

친일재산 환수 작업에 대한 논의는 지난 1997년 이완용의 증손자인 이윤형 씨가 국가에 몰수된 땅을 돌려달라며 소송을 내면서부터 시작됐다. 이 씨는 부동산 관련 소송에서 승소했고 이후 친일 후손들의 ‘땅 찾기 소송’이 활발해졌다. 당시 서울고등법원 제2민사부는 판결문에서 “매국노의 후손이라도 법률에 의하지 아니한 재산권 박탈은 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완용 후손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를 계기로 1990년대 이전에는 1건에 불과했던 친일파 후손들의 소송건수가 지난 2006년 2월 26건으로 늘었고 승소율 50%가 넘었다.

이처럼 친일후손들이 조상들의 땅 찾기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친일파들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친일파인 이완용과 송병준이 보유한 것으로 확인된 토지는 95만 평으로 시가 수조 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송병준은 80만 평 규모의 토지와 임야를 일제강점기 때 제공받았다.

경기도와 강원도 일부를 조사한 결과 이완용도 14만 5,000여 평의 토지를 제공받았다. 하지만 국가자료가 정리된 곳이 주로 경기도와 강원도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향후 전면적 조사가 이뤄진다면 이들 명의의 일제강점기 때 부동산 규모는 수백만 평 이상에 달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 2001년 1월 서울지법은 친일파인 이재극의 후손이 국가를 상대로 낸 ‘땅찾기’ 소송을 각하했다. 당시 대법원은 친일파의 후손이라도 법적으로는 재산의 소유권을 보호받아야 한다는 판례를 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하급 법원의 판결이 대법원 판례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친일파 재산에 대한 논의가 봇물 터지듯 공론화됐고 친일재산환수법 제정과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출범을 위한 토대가 마련됐다.

소송을 포기한 경우도 있다. 국가를 상대로 토지를 돌려 달라고 소송을 낸 친일파 민영휘와 이재완 후손이 소송을 포기했다. 지난 2007년 5월6일 대법원에 따르면 2차대전 당시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한 것으로 알려진 친일파 민영휘의 후손이 2004년 12월 국가를 상대로 토지소유권확인 청구소송을 냈다가 1심 재판을 받던 지난 2006년 말 소송을 포기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땅 1,600여㎡의 토지의 소유권을 주장해 온 민 씨 후손이 사망하자 소송을 승계한 유족이 재판 포기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12년 11월 민영휘의 후손 20여 명은 ‘친일·반민족 행위자 재산환수 특별법’이 소급 입법 등을 금지한 헌법에 어긋난다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또 지난 2012년 5월에는 친일파 송병준의 후손이 같은 헌법 소원을 제기했지만 헌제는 “위헌 법률 심판 제청 신청에서 기각 결정이 내려진 적이 없어 헌법소원 심판 청구 자체가 부적법하다”며 각하했다. 앞서 을사늑약 감사사절단에 포함된 이재완의 후손도 지난 2012년 3월 시가 1억 3,000만 원 상당의 경기도 남양주시의 땅 570여㎡에 대한 소유권 보존등기 말소 청구소송을 냈다가 소송을 포기했다.


엇갈린 역사 바로잡아야

그렇다면 해방된 지 73년이 지나도록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이유는 뭘까.

지난 1993년 김원웅 의원은 이완용 후손들이 친일의 대가로 형성한 재산을 되찾는 것을 보고 친일파들의 재산몰수를 위한 ‘민족정통성회복특별법’을 추진했으나 상정도 되지 못하고 무산됐다. 이에 김원웅 의원은 “결국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이 친일측 기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라고 토로했다.

실제로 해방이후 부일협력자 관료직 진출 상황을 보면 총 155명 중 국무총리가 배두진, 정일권, 최규하 등 7명에 달하며, 내무부장관이 18명, 법무부 장관이 13명, 치안국장이 7명, 대법관이 14명이다. 이러한 배경엔 ‘미군정3년’과 60~70년대 이승만 정권이 친일세력을 정부요직에 대거 등용시킨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는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면서 36년이라는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독립하였다. 그 후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고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자행된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승만이 이끄는 집권당인 한민당에는 정치·사회·경제 부문 등에 다수의 친일파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더욱이 경찰과 군대의 90%정도가 친일파나 과거 일본군에서 복무하는 자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처럼 실질적 정권을 친일세력에 둠으로써 이승만 정권은 약점을 메우기 위해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강제로 반민특위를 해체시키기에 이른다. 친일청산을 목적으로 등장한 반민특위는 8개월간의 활동을 끝으로 ‘반공’정신에 가려져 그 빛을 보지 못한 채 사라졌다. 그 뒤 4.19 혁명이후 친일파 청산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일본군 사관학교 출신인 박정희의 정권장악으로 인해 친일파 청산은 더욱 어려워졌다.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초기, 개혁바람을 타고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가운데 친일 협의자의 서훈 취소를 검토하다가 무산됐다. 이는 검토대상에 모 신문사 창업주가 포함되자 국회 보건사회위원회에서 당시 친일행위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보훈처를 거꾸로 질책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처럼 해방이후 친일청산의 노력을 보이는 듯 했으나 사회적·정치적 배경 때문에 남한에서는 친일파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후에도 2004년, 2005년 각각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특별법과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국가귀속특별법을 논란 끝에 제정했지만 결국 이렇다 할 성과는 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친일재산환수가 이뤄진 건 지난 2010년으로 ‘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 친일파 168명의 재산을 일부 환수했지만 이후 이렇다 할 친일 재산환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1910년 8월 22일 조인돼 29일 일방적인 위력에 발휘된 합병조약 문서에는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서명했다.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다.(사진출처_뉴시스)


역사는 미래의 거울, 과거를 기억하지 않고는 미래도 없다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으로 시작된 35년간의 일제강점기는 민족의 역사와 전통성이 철저히 단절된 치욕의 시간들이었다. 한반도 점령을 위해 시간을 틈타왔던 일본은 합병조약을 통해 우리나라를 철저히 식민지화하였다. 이러한 바탕에는 한국위정자들의 무능과 이완용을 필두로 한 친일내각과 이용구, 송병준 등으로 대표되는 일진회(一進會) 등 매국노들의 반역행위도 큰 몫을 했다.

일본은 한국병합을 달성한 뒤 종래의 통감부를 폐지하고 보다 강력한 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구체적인 한반도 경영에 들어갔다. 조선총독부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정책의 변동을 행사해 왔는데, 궁극적으로는 효율적인 식민지배를 위한 탄압, 영구예속화를 위한 고유성 말살, 우민화(愚民化), 철저한 경제적 수탈 등이 그 핵심이었다.

무단통치로 시작된 일제강점기 35년은 문화정치시기를 거처 한반도의 병참기지화 및 전시동원 시기로 이어졌다. 한민족의 생명과 인권에 대해 짐승만큼도 고려하지 않았던 일제의 횡포아래 많은 민초들은 고통을 겪었으며, 현재까지 문제가 되고 있는 종군위안부에 이르기까지 일제는 완전한 식민통치를 위해 갖가지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 속에서 민족의 해방을 위해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해 나갔던 우국선열들의 살신성인과 주권 없는 국민들의 통한을 뼛속 깊이 되새겨보는 건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서 당연히 우리가 해 나가야 할 일이다.

친일행위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는 한 친일문제는 현재형일 수밖에 없다. 역사적 과오를 덮어두는 것은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프랑스의 반민족행위자 처리과정을 보면 처벌대상이 150~200만 명중 실형선고가 15만 8,000명, 사형선고가 1만 1,500명, 그중 사형집행이 3,800여 명에 달한다.

그러나 우리나의 경우 처벌대상 7,000여 명 중 조사대상은 682명, 기소 221명, 실형선고는 7명에 불과하며 실제 형 집행은 단 한명도 없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그동안 우리나라의 친일청산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잘 알 수 있다. 당시 친일행위를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난 상태다. 그들에 대해 형 집행은 할 수 없지만 잘못된 판단으로 그들이 독립유공자로 둔갑해 서훈을 받고 국립묘지에 나라를 위해 싸운 독립투사들과 나란히 안장되어 있는 부끄러운 역사를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과거에서 미래의 비전을 그려나가는 역사적 관점에서라도 우리의 우매함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무차별하게 도륙되고 철저하게 인권마저 짓밟혔던 민족들의 피 맺힌 애환을 제대로 기억하고 되풀이 하지 않는 것. 또한 부끄러운 역사일수록 더욱 더 사실 그대로 기억해야 하는 것. 이것이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하는 역사적 숙명인 것이다. 이제 그들의 친일행각을 알리고 부끄러운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하며 73년이란 세월의 엇갈린 역사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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